[화천군/정보] 화천군의 문화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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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군의 관내에 존재하고 있는 역사유적 및 문화유적 중에서

매우 이름높고 학술적으로도 가치높은 문화재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잘 알고 계시면은 답변을 부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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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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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이트 ㅌ클릭하시면 화천굼 역사문화 유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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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our.ihc.go.kr/hb/portal/sub01_06?mode=listForm&curPage=1

꽃님이님의 댓글

(화천군의 문화재)

1.화천 계성리 석등

종 목  보물  제496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계성리 594  시 대 고려시대

계성리 마을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이다. 이 마을에는 계성사의 옛터가 있으며, 절터에는 쓰러진 석탑의 일부와 종모양의 부도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석등은 일제 때 절터에서 약 200m밑으로 강제로 옮겨진 것으로 정확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로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에는 8각, 고려시대에는 4각인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 독특하게 6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래받침돌은 거의 묻혀 있어 윗부분만 보이며, 가운데받침돌은 원통형의 기둥에 띠를 두른 것으로, 띠를 이루는 부분에 각종 무늬를 새겨 놓았다. 원통형의 기둥은 고려시대 석등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나, 그 모양이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했던 장고 모양을 닮아 있어 흥미롭다. 화사석은 특히 주목되는 부분으로, 6개의 돌을 세워 6각을 이루게 하였다. 각각의 돌은 좌우를 반타원형으로 깎아낸 것으로, 옆돌과 맞추어져 6개의 타원형 창이 만들어 졌다. 지붕돌은 각 귀퉁이선이 뚜렷하고 추녀 위로는 꽃조각이 작게 돌출되어 있어 멋스럽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는데, 지나치게 커서 아래를 누르고 있는 듯 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6각형 석등은 북한지역에 2기를 포함하여 모두 4기가 남아 있는데, 이 석등도 그 중의 하나이다. 높은 기둥 위에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균형감이 흐르고 있으며, 건립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2.위라리 칠층석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춘화로 3370 (위라리 397)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7층 석탑이다. 기단부재, 탑몸돌, 지붕돌 등이 사방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다시 세운 것으로, 지붕돌과 탑신의 1 ·2 ·3층의 몸돌은 원래의 것이고 4층 이상의 몸돌은 1975년 복원할 때 보충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커다란 바닥돌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겨놓았고, 2층에서 1층에 비해 큰 폭으로 높이가 줄어들다가 그 이후부터는 아주 조금씩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둥근 돌 하나만 남아 있다.

 

규모만 작을 뿐, 탑신의 몸돌에 기둥을 조각한 것이나 지붕돌받침이 3단인 점 등이 남계원칠층석탑(국보 제100호)과 매우 비슷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어 두 탑의 제작연대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3.화천 성불사지 석불입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지 정 일 1996.02.27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유촌리 산20-2  시 대  고려시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성불사 절터에 있는 불상으로, 현재 머리와 목 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상체와 하체는 딴 돌로 만들어져 분리될 수 있다.

 

상체는 떡 벌어진 어깨와 발달된 가슴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얇은 옷을 몸에 밀착시켜서 잘록한 허리가 더욱 강조되었다. 양 어깨에 두른 옷에는 U자형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도식적인 옷주름 처리로 사실성이 결여되고 조각수법의 미숙으로 생동감이 떨어지고 있다.

 

오른쪽 어깨와 손목 부분이 깨졌는데, 다소 부자연스럽게 표현된 두 손은 정확한 모양을 알 수 없다. 왼손은 팔을 약간 벌린 듯 구부려 왼쪽 가슴에 얹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손등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편 채 배에 대고 있는 듯 하다. 하체는 다리의 두께가 가슴과 복부보다 얇아 상체에 비해 양감이 훨씬 떨어지는 모습이다.

 

대좌는 4각형의 평평한 돌 위에 원형의 연꽃무늬를 새긴 형태이다. 연꽃무늬 위에는 몸체를 꽂을 수 있는 홈이 파여 있고 홈 앞에는 두 발을 도드라지게 새겨 발목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짧은 상체에 비해 하체는 불상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길어져 인체의 비례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적이지 못하고 양감이 떨어지며 돌기둥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고려시대 석불입상에서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로, 다른 불상들과 비교해 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4.화천 화음동정사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63호

지 정 일 1990.05.31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화악산로 718 (삼일리 1097)외 6필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현종 때 성리학자인 곡운 김수증이 지은 정자이다.

 

김수증은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하게 된 숙종15년(1689)의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이 죽자 낙향하여 이 정자를 짓고 은둔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송풍정, 삼일정, 부지암, 유지당 등 몇 채의 건물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흩어져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삼일정", "월굴암", "천근석"이라 새긴 조경용 바위만 남아있다. 그리고 현재 송풍정과 삼일정은 복원된 것이다.

  

5.화천 용암리 선사유적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83호

지 정 일 2004.01.17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1121외 34필지  시 대 청동시대

이 유적은 지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강원문화재연구소의 발굴 결과 집자리 176기, 수혈유구 32기, 굴립주 건물 14동, 토광묘 11기 등 유구의 수가 230여기가 넘어 국내 최고의 밀집도를 보여 주는 청동기시대의 집단 취락유적이다.

 

발굴유구 중 주거지는 상부 구조, 벽체, 출입구 시설 등이 확인되어 청동기시대의 가옥구조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주거지들의 중복관계를 볼 때 화천군 하남면 위라리와 용암리의 하안 충적대지 상에 여러 기간 동안 형성된 취락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토유물은 박편의 일부를 갈아 인부를 만든 석기(박편석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석부와 석촉을 비롯,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석기들이 완제품 또는 반제품의 형태로 출토되어 석기 제작과정 및 변화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유적의 시기는 앞으로 주거지와 출토유물에 대하여 종합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검토될 예정이지만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로 볼 때 청동기시대 전기의 유적으로, 그 중심시기는 기원전 9세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상한연대는 기원전 10세기경을 상회하는 것도 있을 것으로 보이며, 하한연대는 기원전 6세기경까지도 취락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화천 용암리 일대에 형성된 청동기시대 취락은 최소한 기원전 10세기경부터 6세기 경까지 형성된 집단취락으로서 청동기시대 북한강유역의 생활문화양상과 주거발달사 연구, 청동기문화의 전파경로를 밝혀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며, 동아시아에서도 유례가 드문 마을유적이라는 점에서 지정·보존가치가 크다.

 

6.화천 성불사지 석장승

종 목  강원도 민속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96.02.27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유촌리 산20-2  시 대 미상

성불사터에서 600m 떨어진 암자터 옆에 서 있는 돌장승으로, 절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장승의 허리부분이 부러져 아랫부분은 오랫동안 땅에 묻혔다가 최근에 발견되었고, 1993년 5월 마을 주민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크기는 높이 196㎝에 어깨너비가 60㎝이고 얼굴 두께 58㎝, 몸통이 47㎝로,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다. 조선시대 무관이 쓰던 전립 모양의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눈과 코가 크고, 얼굴은 턱을 앞으로 내민 듯하다. 구슬띠 무늬를 두고, 조선시대 문신이 임금을 뵐 때 손에 쥐던 홀을 새겨 놓아 전체적으로 신장의 얼굴에 문인석의 몸체가 결합되어 있는 형상이다. 대개의 호법장승이 송곳니를 날카롭게 드러내 도깨비의 얼굴모습을 하는데 비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신장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몸체가 온전하게 조각되어 있는 보기드문 장승이다.

 

장승을 세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장승의 모습이 일반적인 돌장승의 성격과는 다른 독특한 예로, 강원도에 호법장승이 없다고 알려진 지금까지의 인식을 바꿔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화천향교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2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상승로1길 48-16 (하리 108)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화천향교를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며, 한국전쟁 중 향교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대성전과 내삼문을 다시 지었다. 1963년에는 담장공사를 하였고, 1975년에는 명륜당을 지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제기고 등이다.

 

외삼문 안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명륜당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 안에 앞면 3칸·옆면 2칸의 대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8.화천 인민군 사령부 막사

종 목  등록문화재  제27호  등 록 일 2002.05.31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361-1 시 대 근대(1945년)

1945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단순한 형태의 1층 건물로 6·25전쟁 당시 화천과 철원 일대를 관할하던 인민군사령부 막사로 사용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국군의 피복 수선소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이후 방치되어왔다.

31.3X1.2m 크기의 직사각형 평면에 화강석과 시멘트로 마감하여 아직도 튼튼한 벽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인민군 시설의 면모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희귀성이 인정되는 군사시설이다.

   

 

9.화천 수력발전소

종 목  등록문화재  제109호  등 록 일 2004.09.04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1319-2번지 외 4필지  시 대 일제강점기

시설용량 총 10만 8000kW. 1939년 2월에 설립된 한강수력전기회사에서 단위용량 2만 7000kW의 발전기 4대를 설치할 것을 계획하고, 1944년 5월 제1호기를 준공, 발전을 개시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2호기도 준공하였다. 이어서 후속 발전기의 건설을 서두르던 중 3호기는 기기 설치 도중에, 4호기는 기초공사를 완료한 무렵에 8 ·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때 발전소의 위치가 38선 이북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화천 전투의 승리로 발전소가 수복되었다.

 

한강수력전기회사를 이미 흡수한 조선전업에서 1·2호기와 동일 용량인 3호기를 1957년 11월 준공하고, 3호기에 인접하여 증설된 4호기(동일 용량)는 1968년 6월 한전에 의하여 준공되었다. 터빈·발전기·주변압기 등 주요기기는 1·2·3·4호기 모두 일본 히타치제작소에서 제작, 공급한 것이며, 4호기의 증설로 연간 발전량은 1,300만kWh로 늘어났다.

­준공 당시 전력공급을 위한 중요시설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견인차적인 역할을 한 발전소로 기능과 디자인의 조형미가 돋보인다.

 

10.화천 꺼먹다리

종 목  등록문화재  제110호  등 록 일 2004.09.04 소 재 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 468 외, 간동면 구만리 산9-1 외  시 대 일제강점기

화천댐이 준공되면서 1945년에 건설한 다리이다. 길이 4.92m, 폭 4.8m이며 전체적인 외관이 단순하면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철근콘크리트 주각 위에 형강을 깐 다음 각재를 덧댄 가구식 구조이다. 나무로 만든 상판에 검은색 타르를 칠해‘꺼먹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천 수력발전소와 함께 당시의 산업을 엿볼 수 있는 시설물이며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근대 가구식 구조 교량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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