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기타] 겸제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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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제정선이 조선시대 회화사에 끼친 영향이 뭘까요??ㅠㅠㅠ

쳐봐도 안나오길래 급해요! 빠른답변 부탁드릴께욯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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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공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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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 선생님의 회화의 가치와,평가를 잘 설명한 글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정선 [ 鄭敾 , 1676~1759 ]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 광주(光州). 자 원백(元伯). 호 겸재(謙齋)·난곡(蘭谷).

약관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畵員)이 되고 그 뒤 현감을 지냈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沈師正)·조영석(趙榮)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단절되었다.

문재(文才)가 없었으므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의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다. 저서에 《도설경해(圖說經解)》가 있고 그림 작품으로는 《입암도(立巖圖)》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노송영지(老松靈芝)》 등이 있다

우리의 산천을 직접 다니며 우리 시각으로 그린 진경산수의 명작이 여러 점 나오는데, 특히 72세에 완성한

'금강내산(金剛內山)'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암봉을 마치 한떨기 흰 연꽃송이처럼 화 폭에 담아내

진경산수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정선은 기이한 산천의 모습이나 안개 낀 풍경 등 머리 속으로만 상상한경치를 그린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린 진경(眞景)산수화를 완성했다.

“정선에 와서야 우리 산수화가 개벽되었다”는 같은 시대 화가 조영석의 표현처럼, 그는 조선 300년 산수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낸 천재 화가다.  謙齋 鄭敾(1676∼1759)은 조선 영조 때의 사대부 화가로 아버지 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 씨의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金祖淳(1765∼1831)의 『風皐集』에 나오는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있었으며 부모님이 연로해서 가계를 떠맡아야 했기에 김조순의 고조되는 金昌集(1648∼1722)에게 취직을 부탁하니 그가 도화서에 들어가 볼 것을 권하였다 '는 내용에 의해 겸재를 화원화가로 알게된다. 그러나 겸재의 집안 가세가 한 때 상당히 기운 것은 사실이지만 신분상의 변화가 있을 만큼은 아니였기에 중인계급 이하가 나가는 도화서에 사대부계층인 그가 들어갈 이유가 없었으며, 의리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자로서 당시 사회를 주도했던 서인 노론계의 장동 김씨네 후원으로 정치적, 문화적 핵심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념실현의 선구적 역할로서 진경산 수를 완성했기에 그가 화원이 될 가능성은 근원적으로 없었다고 본다. 상류 사대부가문의 혈통을 잇고 태어난 겸재는 7세때에 스승 김창흡이 30세의 한창 나이로 그의 동네에 洛誦樓라는 독서당을 짓고 讀書와 講學賦詩에 전념한 것을 보고, 어린 겸재는 이들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 이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그는 이웃인 三洲 金昌翁(1653∼1722)과 老稼齋 金昌業(1658∼1721)형제들의 영향으로 정통 畵道修練에 몰입하게 되는듯한데 이 당시는 소위 남종화풍이 수용되어 『顧氏畵譜』 나 『芥子園畵傳』같은 화본의 모방에 충실한 때였기에 겸재도 이런 시대사조에 따라 이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화명이 국내외에 떨치게 되는 계기는 역시 김창집 형제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당시 좌우상의 재상자리를

오르내리던 김창집이 燕行을 하게 되어 그의 아우 김창업을 수행 시키는데, 겸재를 지도하였을 김창업이 겸재의

그림을 가져가 제일로 꼽히게 된 것이다. 그 후 그의 평생지기이며 동네친구이고 같은 삼연 문하생으로 장차 삼연의 뒤를 이어 東國 眞體詩壇을 이끌어 가는 사천 李秉滯(1671∼1751)이 금화현감으로 나가 있으면서 (1710년 5월부터 1715년 1월까지)겸재를 초청하여 금강산 유람을 함께 떠나게 된다. 그는 금강산 여행중 받은 감동을 내외 금강산 진경 30폭에 담아 사천의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주는데, 이 로 인해

겸재의 화명이 자자해져 당시 좌상으로 있던 김창집이 천거하고 보증을 서서 관직 을 얻게 되니 이때 겸재의 나이가 40세를 전후한 때이다. 그 뒤 양천현령을 거쳐 종2품인 壽喜大夫同知中樞府事에까지 이르러 자칫 落班될 위기를 모면하여

가문을 재건한다. 이와 같이 초년의 어려움을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하고 만년에는 온갖 명예와 복록을 누리었던 겸재는 84세의

천수를 누리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걸작을 남긴채 위대한 생애를 마친다. 정선이 개인적으로 언제부터 실경을 그리는 일에 관심 갖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히 밝혀 져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예를 정리하여 연대가 확실한 작품을 종합 분류해 보면 대략3기로 구분된다. 30∼40대에서 50대 전반까지는 정선화풍의 형성기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드물고 연대가 밝혀진 진경산수화

중 초기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金 剛山 畵帖」인데 이 화첩은 13면의 금강산 승경도와 발문으로 꾸며져 있으며 ,에서 에 이르기까지 내외 해금강의 명승 고적 을 담은 것이다. 를 보면 자신의 개성적인 화법이 계발되었지만 전체적인 조화미와 필력이 부족한 느낌이고 아직

실경에 대한 자신감 넘치는 표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기는 50대 후반∼60대 후반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 시기이며 정선화풍의 완성기이다. 1734년에 그린 는 1711년의 와 흡사하지만 경물의 응집력이나 힘찬 필세에 있어서

혁신적인 탈바꿈이며 화풍의 완성을 보인 작품이다. 이러한 면모는 1739년에 그린 나 (1740∼1741),(1742) 등 서울과

한강일대의 명승도 제작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60대의 진경작품들은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습윤한 피마준법, 듬성이 찍은 미점과 태점, 수목표현 등을 우리의

실경 형상으로 소화하였으며, 정선화풍의 특징인 부감법의 원형구도, 대각선이나 사선의 화면구성, 수직준,

부벽준을 변형시킨 적묵법의 바위표현, 편필 직필의 'J'자형 소나무묘법 등 전형적인 모습을 보다. 이러한 전형적인 정선화풍은 70∼80대에 와서 형식화되지만 세련미의 절정을 이루어 완숙기로 접어든다. 그 대표적인 예로 1751년에 그린 가 있으며, 그 외에도 ,등 여러 진경작품이

전한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은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완숙해졌으며, 수묵의 구사나 필력은 사실적 태도에서 벗어나 더욱

활달해져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여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었다. 당시 이러한 정선의 화풍은 화단에 많은 추종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정선파 화가들로 불리는 이들을 보면 중인계열

작가인 강희언, 김윤겸, 정황 등과 도화서 화가들인 최북, 김응환, 김득신, 김석신 등이 있다. 이들 정선파 화가들의 진경산수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澹拙 姜熙彦(1710∼?)의 인데 바위의 묵법,

산의 미점, 나무표현에는 정선의 영 향이 뚜렷하나 산의 세부묘사까지 표현한 미점의 구사나 원근법에 근거를 둔

가옥. 수목 등 사실적인 표현과 담채처리가 현대적 느낌을 주고 있다. 眞宰 金允謙(1711∼1775)은 정선의 화풍에 따르면서도 대담한 스케치풍의 표현, 조감도 형태의 전경도 형식에서

벗어난 구도 등 참신함을 보이고 있으며, 겸재의 손자였던 選菴 鄭榥(1735∼7)은 나름대로 진경을 해석하였지만

정선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 復軒 金應煥(1742∼1789)은 도화서 출신으로 겸재화풍을 수용한 전형적 화가인데 그의『復軒白華詩畵帖』에

그려진 (도판9)는 그대로 정선의 작품을 보는 듯 하나 말년으로 가면 정선으로부터 벗어난 면 모를 보여준다. 毫生館 崔北(18세기)의 를 보면 수직준, 미점의 사용에 있어서는 정선을, 태점이나 담채 등 남종화풍의 분위기는 심사정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이들 이후의 도화서 화가인 兢齋 金得臣(1754∼1822), 焦園 金碩臣(1758∼?)은 정선화풍에 김홍도 화풍을 혼용하는 경향으로 변모한다. 이처럼 진경산수는 화원이나 사대부층에 들지 않는 화가들에게 계승되어 조선후기 화단 을 풍미하였는데, 도화서

출신화가들이 정선의 화풍을 답습하는 경향을 띠는데 비해 여기적 수준의 화가들은 정선의 진경산수를 바탕으로

비교적 개성적인 자기화풍을 세우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 드러나 보이는 차이점을 보인다, 또 정선의 화풍은 비록 널리 파급되지는 못하였지만 玄齋 沈師正(1707∼1769), 豹菴 姜世晃(1713∼1791), 之又齋 鄭遂榮(1743∼1831) 등 문인화가들에게까지 작품을 남기게 하고 있다. 이들은 18세기 화단에서 일가를 이룬 문인화가 들로 명 ·청대의 남종화풍을 적극 수용하여 조선화된 남종화풍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대가들이었다. 영조년간에는 정선과 정선파 화가들, 그에 공감한 선비화가들의 참여로 진경 산수화의 발달은 극대화되었고,

정조년간에는 그 추세가 감소하지만 檀園 金弘道(1745∼ 1816), 古松流水館道人 李寅文(1745∼1821) 등의 뛰어난 작가들에게 진경산수가 이어져 질적으로 세련된 회화를 이루었다. 진경산수는 정조년간 김홍도의 출현으로 제2의 변모를 하며 순조년간 까지는 그 양식적 세련미를 유지하였지만

말기화단에 득세한 김정회파나 김수철파 등에 밀려나게 된다. 이 시대의 화단은 秋史 金正喜(1786∼1856)의 영향권에서 文氣나 書卷氣를 중시하는 중국 문인 화풍의 추종이

만연하였고 이색적인 畵格을 지닌 鶴山 尹齋弘(1764∼?)의 화풍을 이은 北山 金秀哲(19세기) 등이 부상 하였다. 이 중 특히 19세기를 휩쓴 남종화풍의 범람, 즉 김정희의 출현과 화단에서 그의 영향력이 불러온 남종화풍의

유행에 진경산수가 그 맥을 잇지 못하고 퇴조해 버리게 된다. 비록 잠시의 단절은 있었지만 우리 민족의 각성에 의한 현실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이루었다는 것은 큰 의의를

가지며, 또한 그들의 예술정신과 표현기법은 우리들에게 현대 회화를 이루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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