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60년 전 선풍기 등장, 탄성 터져나왔다…기업들 '시간여행'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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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전자 탁상용 레트로 선풍기. 신일전자
“오, 진짜 그 느낌이다.”
회전 다이얼을 돌리면서 특유의 ‘딸칵, 딸칵’하는 기계음이 나자 탄성이 터져나왔다. 20일 경기 고양 스타필드 일렉트로마트 매장에서 신일전자의 ‘탁상용 레트로 선풍기’를 본 이모(35)씨는 “옛날 할머니 집에서 보던 그 느낌 그대로인데 걸핏하면 벌어졌던 선풍기 덮개는 확실히 견고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신일전자가 2022년부터 출시한 이 제품은 1970~80년대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선풍기의 외형을 본떠 제작됐다. 투명한 푸른 날개, 쇠로 된 촘촘한 보호망, 돌리면 ‘드르륵, 딸칵’ 소리가 나는 레버식 타이머 등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그대로 구현돼 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수십 년 전 상징적인 제품을 선보이거나 창업주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헤리티지(heritage·유산) 경영’에 잇따라 나서고 있다. 단순한 복각을 넘어 브랜드 정체성과 팬덤을 강화하는 전략이다.
굿즈로 레트로 감성 소환
LG전자도 금성사 시절 제작된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라디오 ‘A-501’과 최초의 국산 선풍기 ‘D-301’을 현대적으로 복각한 ‘굿즈’를 각각 지난 3월과 5월 잇따라 내놨다. 등록 문화재이기도 한 라디오는 블루투스 스피커 겸 라디오로 재출시됐고, 선풍기는 오리지널 대비 4분의 1 크기로 축소된 탁상형 선풍기로 재탄생했다. 특히 두 제품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던 1950년대 말 고(故) 구인회 창업주 시절 전자산업에 처음 진입하며 만들어진 최초의 국산 가전으로 ‘가전은 금성’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상징적인 제품들이다. 재계 관계자는 “단순한 디자인 재현이 아니라 당시 기술적 제약 속에서 시작된 산업의 출발점을 현재의 브랜드 경험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풀이했다.
이들 굿즈는 현재 임직원 행사나 LG전자 팬 커뮤니티 등을 통해서만 배포되고 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한정판으로만 풀기엔 너무 아깝다” “정식 판매를 기대한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가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에게 복각 라디오를 선물하자 나델라 CEO는 “정말 마음에 든다. 매우 사려 깊은 선물”이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LG전자

사티아 나델라 MS CEO는 지난 3월 조주완 LG전자 사장이 나델라 CEO와 만난 사실을 공개한 글에 ″라디오가 정말 마음에 든다. 매우 사려 깊은 선물″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링크드인 캡처
철학은 기록으로…공간·목소리도 브랜드 유산
헤리티지 마케팅의 또 다른 축은 ‘기록’이다. 현대차·기아는 오는 2027년 창립 60주년을 앞두고 사사(社史)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현대차·기아 총괄 조직으로 십여 명 규모의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고(故) 정주영 선대회장으로부터 이어져 온 인간 중심 철학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포부다. 현대차 관계자는 “양재본사는 물론 연구소 등 다양한 부서의 인원들이 모여있다”고 전했다. 현대차와 기아가 각각 운 ‘헤리티지 부서’를 운영 중인 가운데 현대차에서는 브랜드 다큐멘터리 ‘위대한 유산-자동차’를 제작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공개하는 등 그룹 헤리티지 정체성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헤리티지는 ‘공간’과 ‘시청각’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SK는 그룹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선경 시절의 역사를 정리한 ‘선경실록’을 편찬한 데 이어, 지난해부터는 창업회장과 선대회장의 생가인 SK고택을 복원해 그룹의 정체성을 체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두산그룹도 1896년 종로4가에서 출발한 ‘박승직상점’의 127년 역사를 담은 전시공간 ‘두산 헤리티지 1896’을 경기 분당 두산타워에 조성했다. 신세계도 지난 4월 90년 된 옛 제일은행 본점을 ‘더 헤리티지’로 복원해 백화점 본점으로 재개관하며 공간 재해석 흐름에 합류했다. 동국제강과 현대차·SK·삼양 등은 선대 회장의 목소리를 AI 기술로 복원해 고객과 임직원에게 그룹의 정신적 유산을 시청각적으로 전하고 있다.

1925년 종로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점이었던 박승직상점의 현판. 당시의 현판 모형이 두산 헤리티지 1896 역사관에도 전시돼 있다. 두산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헤리티지 마케팅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제품 제조 강국으로 올라선 한국 산업사의 뿌리를 확인하고 브랜드의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는 도구”라며 “맨손으로 도전해 산업을 일으킨 창업세대의 정신은 소비자뿐 아니라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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