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1억원 내고 민간인 사냥”…이탈리아, 보스니아 내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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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 저격수의 집중 사격을 피해 몸을 숙이고 사라예보 시내를 통과하는 시민들. 로이터=연합뉴스
이탈리아 검찰이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이른바 ‘인간 사냥 관광(sniper tourism)’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전쟁 중 민간인을 돈을 내고 저격했다는 혐의다.
영국 가디언과 이탈리아 라 레푸블리카 등은 11일(현지시간) “밀라노 검찰이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에 금품을 주고 사라예보 주민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허가받은 서방국가 출신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수사는 알레산드로 고비 검사가 지휘하고 있으며, 혐의는 ‘잔혹하고 비열한 동기에 의한 자발적 살인’(voluntary murder aggravated by cruelty and abject motives)으로 알려졌다.
수사는 이탈리아 작가 에지오 가바체니(Ezio Gavazzeni)가 지난 2022년부터 사건의 증거를 수집해 제출한 고발장에서 비롯됐다. 그는 사라예보 전 시장 베냐미나 카리치(Benjamina Karić)의 보고서와 보스니아 정보국 관계자 증언, 목격자 진술 등을 근거로 검찰에 사건을 제기했다.
가바체니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탈리아·영국·프랑스·독일 등 서방 국가의 부유층 인사들이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거액을 지불하고 사라예보 외곽 언덕에서 민간인을 조준 사격하는 ‘저격 관광’에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세르비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측근들과 접촉해 이동 및 장비를 제공받았고, 트리에스테에서 출발해 베오그라드를 거쳐 사라예보로 향한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 4월,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한 남성이 아이를 안은 채 저격수의 집중 사격 지역을 다른 주민들과 함께 달려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이탈리아 언론들은 “참가자들은 지금 가치로 약 8만~10만 유로(약 1억1000만~1억4000만 원)를 지불했다”며 “사격 대상에 따라 가격이 달랐고, 어린이가 가장 비싸며, 무장 남성·여성이 그 다음, 노인은 무료였다”고 전했다. 검찰은 이들이 정치적 혹은 종교적 동기가 아닌, 단순한 쾌락과 사격에 대한 집착으로 범행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가바체니는 “이들은 총기를 좋아하고 사냥을 즐기는 부유한 사람들로, 단순히 ‘재미’를 위해 사람을 쐈다”며 “이는 명백히 악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최소 다섯 명의 이탈리아인 용의자를 특정했으며, 검찰이 조만간 이들을 소환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수사는 슬로베니아 감독 미란 주파니치의 다큐멘터리 사라예보 사파리(Sarajevo Safari)가 공개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이 작품에는 전직 세르비아군 병사와 계약자가 등장해 “서방 관광객들이 언덕에서 민간인을 향해 총을 쐈다”고 증언했다. 세르비아 참전용사 단체들은 이를 “사실이 아니다”라며 부인해 왔지만, 이탈리아 검찰은 가바체니가 제출한 증거를 바탕으로 본격 수사에 나선 상태다.
사라예보 포위전은 1992년부터 1996년까지 4년간 이어진 현대사 최장기 포위전으로, 세르비아군의 포격과 저격으로 1만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거리마다 ‘저격 주의’ 표지판을 피해 몸을 숙인 채 이동해야 했고, 메샤셀리모비치대로는 ‘저격수의 길’로 불렸다.
특히 1993년 한 저격수에게 희생된 연인 보슈코 브르키치(25)와 아드미라 이스미치(21)의 죽음은 다큐멘터리 사라예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
밀라노 검찰은 “30년 가까이 묻혀 있던 사건이지만, 수집된 증거는 충분히 신빙성이 높다”며 “관련자 식별과 기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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