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세계 곳곳 이름난 과학 연구소들은 "사회가 발명한 전략 장치"[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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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승리
배대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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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소설 『프랑켄슈타인』 이래로, 세상과 고립된 천재가 비밀을 독점하거나 과학을 선도한다는 모티브는 집요하게 변주되어 왔다. 화학을 공부했다지만 실제로는 주술적 연금술사에 가까운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여전히 ‘미친 과학자’의 상징처럼 소비되는가 하면, 빅테크 기업의 CEO들이 경영자임에도 과학기술의 창조자이자 혁신가인 듯한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미디어 전략도 흔하다.

1938년 미국 버클리 방사선연구소의 과학기술 관련 직원들이 60인치 사이클로트론의 자석 주변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사진 계단]
물론 오늘날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홀연히 혁신적 발견을 이루는 극적인 신화를 이전만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연구 규모나 운영 방식이 19세기의 개인 연구실을 연상시키는 경우조차 다수 연구자가 상시 활동하는 것처럼 ‘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이는 시대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구소라는 제도·형식은 언제, 어떻게 등장했을까.
『연구소의 승리』는 이 물음에 대한 역사적 서사를 제시한다. 책은 1887년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 설립에서 출발해, 2022년 미국 NASA와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의 최신 활동에 이르기까지, 130여 년 동안 다양한 연구소들의 등장과 변화를 추적한다. 미국의 여러 대형 국립연구소는 물론 일본의 리켄,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유럽의 CERN 등 주요 기관들이 망라된다. 저자는 연구소를 “사회가 발명한 전략 장치”로 규정하며, 그 역사를 단순한 연구 공간의 진화가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를 재설계해온 과정으로 읽어낸다. 다양한 자료, 기관 보고서, 인터뷰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 연구소들의 성립과 변신을 조감도와 세밀화를 넘나들며 제시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1943년 완성된 일본 리켄(이화학연구소)의 두 번째 사이클로트론. [사진 계단]
포괄적인 만큼 아쉬움도 있다. 책은 국가연구소, 특히 ‘기초연구’를 담당하는 기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국가 경쟁력에서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해온 산업체 연구소의 역사는 매우 소략하다. 산업혁명 이후 표준화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며 국가연구소가 등장했다는 진술에는 찬동하지만, 동시에 표준화의 파트너인 산업체 연구소들이 어떻게 출현하고 작동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보강되었으면 한다. 벨연구소, GE, IBM, 필립스, 소니 등은 기초연구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남긴 바 있다.
또 한 가지는 국가연구소 중심 시각으로 인해 빚어지는 관점의 차이다. KIST가 한국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 과정에서 국가주도 개발체제가 기초연구를 상대적으로는 약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KIST는 “과학자의 공간”이라기보다 관료제와 산업계를 연결하는 접속점에 가까웠고, 이는 당시 한정된 자원을 고려하면 개발전략상 탁월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수요기반 연구모델의 ‘승리’로만 보는 해석은 단선적이다.
아울러 사회·국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제도적 복잡성을 깊이 반영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예컨대 미국·유럽의 사립대학은 명문일수록 민영 공공기관적 성격이 강하고 각종 정부들이 설립한 대학도 상당히 자율적이다. 반면 동북아 대학들은 재정·운영 면에서 중앙관료제에 더 깊이 의존한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의 연구중심대학 총장들은 정부 자금을 직접 받아 대학 내 연구소를 세우는 데 주저했다. 학문과 대학의 자율성이 훼손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전쟁과 스푸트니크 쇼크가 계기가 되어 연방정부와 연구중심대학의 관계가 급격히 밀착됐고, 때로는 유착이라는 비판까지 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국가, 산업체, 대학의 연구활동은 서로가 상대의 환경이자 함께 공진화하는 파트너이다.

새턴 V 로켓 옆에서 포즈를 취한 베르터 폰 브라운 박사. 미국 NASA 이미지 앤 비디오 라이브러리에 소장된 사진이다. [사진 계단]
그리고 국가는 직접적인 연구성과만을 위해 연구를 지원하지는 않는다. 의약·식품 규제기관의 연구활동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민간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의 근거가 된다. 연구결과가 국가적 목표와 직접 연결되지 않아도, 국가적 위기 발생 시 즉시 동원 가능한 상시 연구인력 풀이기도 하다.
몇몇 아쉬움과 시각 차이를 제시하는 것도 『연구소의 승리』가 보여주는 근본 전제, 즉 과학기술은 사회적 의지와 제도 설계에도 좌우된다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누구나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했다고 여기는 현재, 국가의 과학 활동을 단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들을 어떻게 잘 조합해서 조직할 것인가 생각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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