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온몸으로 받아들인 근대사…우리 집은 어디입니까 [왕겅우 회고록-청년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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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질 나라의 신입 국민 신분으로 이포에서 말라야대학으로 공부하러 갈 때 나는 나의 새집을 향한 첫걸음을 떼게 된 데 고마운 마음이었다. 내 공부가 어떤 길로 향하게 될지 모르고 있었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절에 내가 생각한 내 집이란 내 마음속에서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듯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중국을 대신할 어떤 나라였다. 다른 형태의 집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포에서 부모님은 우중충한 셋집에서 방 둘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가 쿠알라룸푸르(KL)로 가서는 연립주택에 세들어 사셨는데, 그 집에는 내 방도 있어서 1년에 두 주일 방학 때 썼다. 런던으로 떠날 때까지 5년 동안 대학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15인용 개방형에서 시작해 칸막이로 막은 방을 쓰다가 끝에는 듀니언 로에 있는 연립주택의 2인실 하나를 썼다. 내가 지내는 곳을 “내 집”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 시절에는 “집”의 개념이 머릿속에 뚜렷하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하는 장소로서 학교를 내가 속하는 공간으로 여기게 된 데 이유의 일부가 있었을 것이다. 말라야대학이 그런 공간이었다. 도서관과 실험실이 가까운 곳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살며 활발한 교류를 나누는 장소였다. 아름다운 식물원 터에 지은 학교였고 우리는 그 환경을 우리 것으로 누렸다. 5년 동안 매년 45주 이상 그곳에서 지냈으니 그 아름다운 캠퍼스가 “내 집”인 셈이었다.
그리고 런던에 갔다. 뒤이어 마거릿이 와 결혼하고 케임브리지에서 지내다가 런던으로 돌아왔다. 영국, 특히 런던은 문학과 음악이 깃든 문화의 공간이었다. 런던의 코노트 홀, 호머튼 칼리지, 그리고 오처드 로와 세퍼즈 부시의 아파트는 일하고 잠자기 위한 임시 거처였다. 파킨슨 교수가 나를 말라야대학 교수진에 넣을 생각이 분명해지자 옛 학교가 다시 내 집이 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마거릿은 물론 가족과 함께 15년 이상 살던 싱가포르를 집으로 생각했고, 내 부모님도 그리 오기로 결정함에 따라 커지고 있던 왕씨 집안이 1957년에 드디어 한 곳에 자리 잡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내 나라로 받아들인 말라야, 그리고 말라야대학의 새 캠퍼스를 짓고 있던 그 수도 KL로 눈길을 돌렸다. 싱가포르의 사택에서 KL의 사택으로 옮기고 1957년에서 1964년 사이에 네 곳 사택에서 즐거운 기억을 남길 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의 집이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캠퍼스와 붙어있는 장소이면서 자유롭고 열린 학문의 터전으로서 대학과 연계된 곳이었다. “집”의 개념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사실은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그저 지내기 편안하고 탐구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데 만족하는 장소를 바랐을 뿐이다.
이제 돌아보면 우리가 정말로 자리 잡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여러 겹 소속감이 합쳐지는 길이었다. 새 캠퍼스는 자라나고 있었다. 학과가 늘어나고 도서관 장서가 늘어날 뿐 아니라 새 건물들이 채워지는 데 따라 대학의 이념이 물질적 형태까지 갖춰가고 있었다. 학부장과 학과장을 지내면서 국가 건설 과업의 중심부에 가까이 들어갔다. 여러 해 걸려 〈건국 방략〉 책에 담은 “대(大) 말레이시아” 계획도 그 일부였다. 국외에서는 수카르노의 “대결” 정책과 중-소 공산세력과의 전쟁이 미국화하는 상황이 국가의식에 자극을 주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이제 익숙해졌다. KL과 위성도시 페탈링자야는 활기차고 흥미로운 곳이 되어가고 있었고, 동네 가게들과 이웃집들 사이에 친밀한 분위기가 자라나고 있었다. 마거릿은 영어교육 전문가로 잘 나가고 있었고, 아들은 영어 외에 말레이어와 중국어를 함께 배울 좋은 소학교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나라 최고의 중국인학교 교장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학교에서 내 일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1949년부터 나를 키워준 말라야대학의 전통은 잘 지켜지고 있었다.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하도록 해주는 학교의 지원도 넉넉했다. 학과는 동료들의 노력으로 학생들에게 역사 공부를 생산적인 경험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는 세상의 유능한 일꾼으로 키워주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국사학의 발전에 앞장서려는 내 노력은 매혹적인 영역으로 나를 이끌었고, 말레이시아 중국인사회의 역사는 그 일부였다. 학교 밖에서는 말레이언어문학원(Dewan Bahasa dan Pustaka)의 고전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기술적 정확성을 확인하는 역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가장 주의를 기울인 일은 우리 대학원 과정과 말레이시아 역사 연구를 체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양쪽이 나란히 발전해 나가면서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의 (관심을 가진 다른 학과 학생들 포함) 주례 세미나가 특히 좋은 성과를 거뒀다. 참가자 모두에게 큰 자극을 주는 세미나였다. 이 세미나를 3년 넘게 계속하면서 1968년 우리의 첫 국제학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길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아시아 역사 연구자들을 전 세계에서 초청하기 위해 열심히 애쓰던 동료들의 모습을 지금 기억해도 흐뭇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행정 업무에 강의 책임도 겹쳐져 내 중국사 연구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1967년 시카고와 앤아버 회의에 참석하면서 최신 연구를 따라잡기 어려운 문제를 절실하게 느꼈다. 회의에서 만난 중국사 연구자들은 중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요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대중국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는 문제가 내 연구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상황을 이해하고 중국 청년들이 마오쩌둥의 파괴적 선동에 따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중국사 연구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한국에 가 있던 몇 주일 동안 굳혔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마거릿과 함께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는 중국사 연구자로서 내 진로가 걸린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캔버라로 갈 것을 권했다. 부모님도 우리 계획을 알리자 서슴없이 지지해 주셨다. 언제나 그러신 것처럼 내가 학문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으셨고, 그 방향에 도움이 되는 길이 제일 좋은 길이라는 생각이셨다. 말레이시아는 우리나라였고, 말라야대학은 내 지성의 고향이었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집도 있었다.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우리가 떠난 후 나라의 모습을 바꿔버린 1969년의 치명적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거릿은 언제나처럼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에서는 3년간 사택을 제공했으나 우리 세간살이를 가져가지 않으면 새것을 사야 할 형편이었다. 우리는 페탈링자야 집을 세놓을 생각이었는데, 그러려면 가구를 빼는 편이 좋았다. 국제회의를 마친 후 짐을 싸고 준비를 했다. 9월 중순 집을 떠나기 전날 밤 마거릿은 집을 둘러보며 가져갈 것을 생각하다가 내게 돌아서서 말했다. “있는 곳이 집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Home is Where We Are / “있는 곳이 집”
18년간 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우리는 “집”을 찾았는가? “집”이란 곳이 어느 나라나 어느 도시여야 하는가? 10년 가까이 지낸 홍콩처럼? 아니면 24년 넘게 살아온 다민족 도시국가 싱가포르처럼? 가옥의 형태를 가진 것이어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아주 편안한 가옥에서 살아 봤고, 싱가포르의 아파트도 그중 하나다.
어느 곳에서 살고 일할지 미리 내다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행운아였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흥미를 느끼는 질문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게 해준 대학들의 역할이 컸다. 예를 들어 끈질기게 긴 세월을 겪어 온 문화로서 중국, 2천 년에 걸쳐 여러 모습의 제국으로 나타난 중국, 그리고 다민족 현대국가로서 중국에 관한 질문들이다. 나처럼 중국 밖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장소에 사는 “중국인”의 정체가 또한 질문의 대상이다. 어느 캠퍼스에서나 마거릿과 나는 친구를 사귀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흥미로운 점들에 관해 동료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보면 KL에서 캔버라로 옮긴 지 50년이 넘었다. 우리 집이 어디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콕 집어 대답할 수가 없어서, 있는 곳이 집이라고,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모든 곳이 집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캔버라에서 우리는 대학이 제공하는 주택에서 3년간 살았다. 연구실이 있는 쿰스 빌딩까지 2백 미터 거리였고, 바로 건너편에 도서관이 있었다. 마거릿은 아시아연구 학위를 더 따기로 결정하고 50미터 더 떨어진 건물로 다녔다.
아들이 다니는 캔버라중학이 가까운 근교의 아란다로 옮겨가고 딸아이들이 그쪽의 소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우리는 그 동네에 집을 지었다. 경험이 늘어난 마거릿은 편안한 주택을 설계해서 15년간 살게 되었다.
1977년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취득했다. 마거릿은 말레이시아 국적을 몇 해 더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과 손자들이 집을 어디로 생각했는지는 자기네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페탈링자야의 집을 세주고 있다가 캔버라에 집을 지으면서 팔았다. 아들 밍은 시드니로 공부하러 떠난 후 우리랑 함께 살지 않게 되었다. 결혼하고 시드니에 정착했다. 딸애들은 ANU에서 공부하고 메이가 결혼할 때까지 우리랑 함께 살았다. 란은 졸업 후 자기 집에서 따로 살았다. 어머니가 우리랑 살러 와 계셔서 아란다 집에는 세 식구가 살았다.
ANU에서 18년을 지낸 후 홍콩으로 가서는 으리으리한 총장 공관에서 살았고 어머니도 같이 와 계셨다. 홍콩대학에서 얼마 동안 있다가 돌아갈 생각으로 아란다 집은 세를 줬다. 그런데 또 그렇게 되지 않았다. 홍콩대학 퇴직 후 싱가포르의 동남아시아학연구소로 갔고, 동아시아정치경제연구소 이사장을 맡다가 나중에는 싱가포르국립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도 모두 캔버라를 떠났기 때문에 그곳 집을 팔고 싱가포르에 아파트 하나를 사놓기로 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언제 돌아갈지, 돌아간다면 밍이 있는 시드니에서 살지, 아니면 메이와 란이 사는 멜버른에서 살지 우리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계속 살았고, 이제 24년째다. 처음 와 살던 콘도는 통째로 팔리는 바람에 이사해야 했고, 옆 동네 아파트로 옮겼다. 이곳은 아주 편안해서 싱가포르에 있는 한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지낸 곳은 집 아닌 곳이 없었다.
2026년 3월 10일 오후 역자가 저자 댁에 찾아가 차 대접을 받았다. 자기 글이 한국에서 번역-출판된다는 사실을 매우 흥미로워 한다는 사실이 역자에게는 흥미로웠다. 60년 전 한국 방문 (연재 20회에 나옴)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을 보며 한국에 와본 일도 많지 않고 한국에 관해 쓴 글도 많지 않지만, 동아시아문명권 안에서 한국의 위치와 특성에 대한 관심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를 떠나는 중대 결정을 (일생을 통해 가장 중대한 결정으로 보임) 그 한국 방문 동안 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박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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