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호르무즈 오염” 케미호 나포했던 이란…나무호에도 ‘회색지대 전법’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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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 4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HMM 소속 화물선 ‘나무호’에서 폭발과 화재가 발생했으며 미상 비행체의 타격에서 일어났다고 밝혔다. 사진은 미상 비행체의 타격으로 피해 입은 선박 외부의 모습. 사진 외교부

“가짜 깃발 작전(False Flag Operations)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해선 안 되고 이는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에스마일 바가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역내 일부 세력이 지역의 불안정을 고조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을 모든 나라가 알아야 한다”며 이처럼 말했다. 전날 아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과 조현 한국 외교부 장관의 통화에 대해 언급하던 중이었다. 조 장관은 당시 통화에서 나무호 피격과 관련해 “우리 정부의 추가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설명한 뒤 이란 측에 사실관계에 대한 입장을 요구했다.

가짜 깃발 작전은 공격 주체가 자신을 숨기고 제3자의 소행처럼 꾸며 전쟁 명분을 조작하거나 상대를 고립시키는 위장 전술이다. 바가이 대변인은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무호 피격이 이스라엘의 소행이라는 취지로 읽혔다. 통상 이란 측은 가짜 깃발 작전의 주체로 이스라엘을 지목해왔다. 이란의 소행이 맞다면, 공공연한 부인에 교란까지 더한 셈이었다.

나무호를 공격한 주체를 규명하기 위한 정부 조사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든 가운데 이란이 회색지대 전법(무력 충돌로 이어지기 어려운 저강도 도발)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호르무즈에 발이 묶인 선박의 안전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을 노린 공격일 수 있다는 의심이 짙어지는 분위기다. 지난 20일 한국 유조선이 처음으로 호르무즈해협을 빠져나왔지만, 나무호를 비롯한 한국 국적선 25척은 해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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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이란에 붙잡혀 있던 한국 화학 운반선 한국케미호와 선장이 억류 95일 만에 석방됐다. 억류에서 풀려난 한국케미호가 출항하는 모습. 사진 외교부

상징적이면서도 약한 고리를 건드려 타격을 입히는 건 이란의 오랜 전략이기도 하다. 2021년 1월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가 호르무즈해협에서 한국케미호를 나포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혁명수비대는 ‘환경 오염’을 나포 사유로 들었고 이란 외무부도 “이 사안은 완전히 기술적인 조치이며 해양오염을 조사하라는 법원 명령에 따른 것”이라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한국의 은행에 동결된 이란의 원유수출대금 70억 달러(약 5700억원)를 받기 위해 케미호를 나포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한국 정부가 이란 정부가 내야 할 유엔(UN)분담금 1600만 달러(약 184억원)를 동결자금으로 대신 납부하고 코백스 퍼실리티로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케미호는 풀려났다. 이란이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의 유조선을 나포해 조 바이든 행정부에 핵 합의 협상 테이블에 복귀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이란은 2005년 한국산 전자제품에 금수조치(엠바고)를 하기도 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의무 불이행을 결의했을 때 한국도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후 이란 내 한국산 제품에 대한 통관지연, 신용장(LC) 발급제한, 수입 불허 등이 횡행했다. 이란 당국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수입 견적 송장(PI) 접수를 거부했다. 신청을 받더라도 수입승인을 하지 않으면서 뚜렷한 이유를 대지 않았다.

수습을 위해 이규형 외교통상부 2차관이 이란을 찾았지만 마누셰르 모타키 이란 외교장관은 “한국상품 수입제한 조치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내려진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다만 모타키는 “차기 IAEA 이사회에서 한국 측의 협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사실상 IAEA 결의안 찬성에 대한 불만이 작용하고 있음을 간접 시인한 셈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소식통은 “이란으로서는 자국에 잠재적 불이익을 가한 국가를 응징했다는 대내 메시지를 발신하면서 한국에 암묵적 경고를 날린 셈”이라며 “미국의 동맹 중 한국에 대한 금수조치가 가장 가시적 효과가 있는 점,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란에 투자하고 있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한 조치”라고 분석했다.

외교적 파장을 최소화하면서도 가시적으로 보복 효과를 내는 이란의 회색지대 전략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란 메흐르 통신은 지난 4일(현지시간) “한국이 이란에 대해 긍정적이고 건설적 접근 방식을 보여줬다”며 “한국은 미국의 압박, 에너지 안보, 인도적 우려, 그리고 이란과의 소통 채널 유지라는 복잡한 변수들 사이에서 신중한 균형 잡기를 시도했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국을 꼭 집어 프로젝트 프리덤(해방 작전) 참여를 촉구한 날이었는데 사실상 한국이 참전하면 즉각적인 보복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로 읽혔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은 “한국은 미국의 가까운 동맹국이고 독일, 일본 등과 다르게 경제 규모나 국제사회에서의 리더십이 확실하게 구축된 국가가 아니다 보니 이란 등의 우회적 공격이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며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대비해 ‘미들 파워’(중견국)로서의 외교적 고민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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