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P 대신 덕후 모셨다…인기 없던 이 백화점, 매출 확 올린 손맛 [비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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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피셜

잘 만들어진 브랜드는 특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흔히 브랜드 정체성, 페르소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이죠. 비크닉이 브랜드라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편의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브랜드의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오피셜 스토리’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 롯데백화점 잠실점, 여의도 더현대 서울 그리고 아이파크몰 용산점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바로 올 상반기, 서울 시내에서 매출 상승률 두 자릿수를 기록한 단 네 개의 백화점이라는 사실이에요. 앞의 세 백화점은 규모와 명성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마지막 아이파크몰 용산점은 의외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듯 합니다. 그런데 이곳이 세운 기록이 하나 더 있어요. 최근 고물가로 유통업계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백화점 중 유일하게 31개월째 연속으로 매출 신장 기록을 쓰고 있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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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을 기준으로 아이파크몰 용산점은 31개월째 매출 신장 기록을 쓰고 있다. 고물가로 유통 업계 전반이 불황인 요즘 눈에 띄는 성과다. 사진 HDC아이파크몰

지난해 아이파크몰 용산점은 사상 최대 매출(거래액) 5000억원을 돌파했어요. 전년 대비 20% 성장한 결과죠. 불경기에도 영업이익 20% 증가라는 기록도 세웠죠. 사실 아이파크몰 용산점은 용산역사 내에 있다는 점 외에는 그동안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은 백화점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달 30일 김대수 HDC아이파크몰 대표(57)를 만났습니다. 그는 2022년 7월 대표로 합류, 아이파크몰 리브랜딩을 진두지휘해온 인물이죠. 오늘 비크닉은 아이파크몰 용산점을 통해 지금 오프라인 유통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해요. 덩치와 물량공세로 승부하던 대형유통 시장에서 뾰족한 타깃팅 전략과 고유의 브랜딩을 내세운 그만의 남다름을 알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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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서울 용산구 HDC아이파크몰 본사에서 김대수 대표(사진)를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HDC아이파크몰

용산역 관리사무소에서 도심 놀이터로

“용산구 주민으로 오랫동안 살았지만, 아이파크몰을 자세히 뜯어본 적은 없어요. 정몽규 HDC 회장의 미팅 요청을 받고, 쇼핑몰을 쭉 둘러봤는데 출입구는 너무 무겁고 벽으로 사방이 막혀있었죠. 쇼핑하는 사람은 물론 매장 직원들도 잘 안 보였고요. 마치 용산 역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관리사무소 같았어요.”

김 대표는 롯데백화점에서 패션·가전 등 상품본부를 거쳐 유통BU 마케팅 총괄까지 역임한 베테랑 ‘유통인’이에요. 당시 마라톤과 패션을 엮은 ‘스타일런’, 석촌 호수 카우스 프로젝트 등 대형 이슈 마케팅을 이끌었죠. 31년을 재직하다 퇴직한 지난 2022년, 갑작스레 정 회장의 호출을 받았죠. 그리고 미팅 직후, 아이파크몰 용산점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문 닫힌 거대한 성 같았던 아이파크몰 용산점은 김 대표 부임 후 불과 약 2년 만에 문턱 낮은 놀이터로 변모했어요. 가장 먼저 한 일은 용산 역사와 연결돼 길을 잃기 쉬운 점포 내 안내 표시물을 대거 보강한 일. 그리고 용산역과 연결된 3층을 대대적으로 정비했어요. 김 대표는 “용산 역 유동인구가  하루 10만명이지만 쇼핑몰로 넘어오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숫자죠. 아이파크몰은 1층이 아니라 3층에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는 판단이었어요”라고 말했어요.

으레 다른 쇼핑몰이 그렇듯이, 1층과 2층에 메인 점포를 넣고, 3층은 시계와 잡화, 구두 같은 작은 브랜드들로 구성했던 과거와 달리 3층에 아르켓·마시모두띠 같은 글로벌 SPA(제조·유통일괄형) 브랜드를 포진시켰죠. 핸드폰 판매점이 있었던 용산역과 리빙 파크 건물 연결점에는 유명 F&B 브랜드와 팝업 스토어를 배치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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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파크몰 용산점의 한 도넛 가게. 유명 패션과 F&B 매장을 강화해 용산역의 유동인구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썼다. 사진 HDC아이파크몰

최근 다른 백화점은 다 강화하는 추세인 VIP 혜택도 축소합니다. 일부 객단가 높은 우수 고객의 구매력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른 백화점과는 달리 아이파크몰은 젊은 고객 비중이 높고, 분산된 구매력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죠. 그래서 2025년부터는 우수 고객 선정 기준을 낮춰 분기별 300만원 선으로 조정하고, 인원도 3000명으로 확대하기로 했어요. 기존 소수 고객에게 투입됐던 VIP 라운지, 주차 편의 등의 비용을 낮추고 더 많은 고객에게 혜택(주차 쿠폰)을 주는 식으로 바뀌는 거죠.

‘덕후’ 성지 용산의 정체성을 이용하다

하드웨어를 바꿨다면 이제 소프트웨어를 바꿀 차례죠. 여러분은 ‘용산’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바로 전자상가죠. 우리나라 IT 산업의 메카이자, 게임 마니아들이 몰려들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지금은 쇠락한 전자상가의 이미지를 아이파크몰은 이용합니다.

“용산은 게임과 캐릭터 굿즈, 캠핑 같은 취미 콘텐트를 찾는 이른바 ‘덕후’들의 성지로 인식돼 있죠. 덕후 몰이를 할 수 있는 콘텐트를 집결시킨다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산역의 접근성, 주 고객층 연령대가 30대로 타 백화점 대비 열 살쯤 낮다는 점도 고려했고요. 젊은 고객들이 선호하고, 전국에서도 찾아올 수 있는 최초·최대 규모 콘텐트 팝업 기획에 공을 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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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열린 일본 인기 캐릭터 작가 나가노의 '나가노 마켓 서울 팝업' 현장. 사진 HDC아이파크몰

결과는 대성공. 지난 9월 일본 인기 캐릭터 작가 나가노의 ‘나가노 마켓 서울 팝업’은 사전 예약 오픈과 동시에 18만 명이 동시 접속해 예약 서버가 다운됐습니다. 전 타임 매진은 물론 후반부 현장 선착순 입장 때도 긴 줄이 늘어섰고요. 지난 2022년 10월에 열린 일본 닌텐도 직영 공식 팝업 스토어는 매일 기본 대기 시간 3시간, 한 달 매출 40억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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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열린 쿠키런 브레이버스 팝업 스토어 현장 대기 고객 모습. 사진 HDC아이파크몰

이웃한 영화관 CGV와의 연계 기획도 빛을 발했습니다. ‘명탐정 코난’이 개봉할 땐 관련 팝업을 열어 수억 원대의 매출을 올렸고, ‘임영웅-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개봉 시기에는 4층 정원 ‘더 가든’을 ‘히어로 홀’로 꾸며 팬들을 끌어들였죠.

테니스? 우리는 빠델…. 나만의 길 간다

사실 요즘 팝업은 길거리에서도, 백화점에서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콘텐트죠. 팝업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화제가 되기 어려워요. 그런데 아이파크몰 용산점 팝업은 뭔가 달라요. 김 대표 표현에 의하면 한 끝 다른 ‘손맛’이 있는 팝업이죠.

지난 봄 진행된 유튜버 ‘와인킹’과의 팝업이 좋은 예죠. 약 70여개 와인 수입사가 참여해 500여 종의 주류를 현장에서 직접 맛보고 구매할 수 있는 장터를 열었어요. 쇼핑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와인 장터지만 ‘시음’이라는 체험 요소를 가미했죠. 재미있는 콘텐트에 고픈 유튜버들, 인플루언서들이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자발적으로 행사장을 찾으면서 와인 장터는 순식간에 전국구 이슈 행사가 됐죠. 20일간 10만명이 다녀간 것은 물론, 행사 마지막 날 최대 매출을 올리는 등 성황리에 마무리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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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열린 유명 유튜버 '와인킹' 팝업 스토어 현장. 사진 HDC아이파크몰

“지난 4월에는 유통 최초로 ‘빠델 구장’을 오픈했어요. 테니스가 아니라 왜 빠델(유럽 라켓 스포츠)이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죠. 다른 데서도 다 볼 수 있는 걸 하고 싶지 않았어요. 결국 동호회 분들이 하나둘 들어오더니 평일에도 4개 코트가 다 차요. 이 분들이 와서 맥주도 한 잔씩 하니까 F&B 매장들도 활성화됐죠. 우리 MD들에도 같은 스타벅스라도, 아이파크몰 스타벅스는 다르게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하죠. 구석구석 손품, 발품을 팔아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는 점포로 채운다면 요즘 같은 온라인 대세에도 오프라인이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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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유통업체 최초로 빠델을 칠 수 있는 경기장을 만들었다. 빠델은 스페인 국민 스포츠로 알려진 라켓 스포츠다. 사진 HDC아이파크몰

오프라인 유통이 가야 할 길

지금 대형 오프라인 유통은 과거와 다른 길을 걷고 있어요. 대형 유통 자체가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너도나도 이 검증된 유통, 즉 플랫폼에 올라타고 싶어했죠. ‘00 백화점 입점’이라는 것 자체가 브랜드를 설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식어였으니까요. 지금은 달라졌어요. 유통의 합종연횡이 이어지면서 온라인부터 집 근처 편의점까지 너무 많은 유효한 유통처가 생겨났습니다. 오히려 입점할만한 좋은 브랜드를 찾기가 어려워졌죠. 하다못해 브랜드 스스로가 온라인에 자사 몰을 만들고, SNS로 홍보해도 어느 정도는 팔리는 시대니까요.

좋은 브랜드가 백화점에 입점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그중 살아남은 소수의 브랜드만 입점했던 과거에 백화점의 성장은 어쩌면 당연했죠. 그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검증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발걸음을 했으니까요.

이제는 반대가 됐어요. 대형 오프라인 유통도 좋은 브랜드를 발굴하고, 고객들이 찾아올만한 콘텐트를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유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됐죠. 유통 스스로가 브랜드가 되어야 하는 셈이죠. 그러니 이제 ‘백화점이라면 으레, 쇼핑몰이라면 당연히’라는 표현은 점차 없어지고 있어요. 아이파크몰이 백화점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VIP 라운지 대신 빠델 구장을 만들고, 어디에나 있는 브랜드 점포가 아니라 팬덤 몰이를 하는 특화 팝업을 기획하는 이유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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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 내 야외 휴게 공간을 활용해 무료 영화 상영회 '더 가든 시네마'를 열었다. 사진 HDC아이파크몰

“유통의 대세는 점차 몰로 재편될 겁니다. 그것도 생활권, 즉 지근 거리에 있는 쇼핑몰이 대세가 되죠. 갈수록 상품 구매는 온라인으로 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니터만 볼 순 없으니 우선 슬리퍼를 끌고 나와 갈 수 있는 쇼핑몰이 필요하죠. 할 일 없을 때 나와 빠델을 치고, 영화도 보고, 나온 김에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는 문턱 낮은 ‘도심형 놀이터’가 바로 아이파크몰이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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