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정보] 원주시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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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급하게 필요해서요.

원주시 문화재에 대한 사진하고 정확하고 짧은 설명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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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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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의 문화재)

1.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종 목  국보  제5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  시 대 고려시대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고려 선종2년(1085)에 세워진 작품으로, 거북등의 조각수법과 머릿돌의 모양이 새로운 것이 특징이다. 비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치밀함이 돋보여 형태와 조각이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2.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종 목  보물  제7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44  시 대 고려시대

거돈사터에서 동쪽으로 약 110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3.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종 목  보물  제463호  지 정 일 1968.07.05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  시 대 고려시대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4.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464호  지 정 일 1968.07.05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  시 대 고려시대

흥법사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흥법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던 거대한 사찰로, 원래 탑 외에도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흥법사진공대사탑부석관(보물 제365호) 등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5.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750호  지 정 일 1983.12.27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8  시 대 신라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6.원주 거돈사지

종 목  사적  제168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9  시 대 신라

한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 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7.원주 강원감영

종 목  사적  제439호  지 정 일 2002.03.09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85 (일산동 54-1)  시 대 조선시대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감영의 규모는 선화당(정청)을 비롯하여 재은당(내아), 포정루(정문), 4대문, 객사 및 부속건물 등 31동 건물이 있었으나 원주시 청사, 재향군인회관 등이 생기면서 그 모습을 잃어 버려 현재는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2000년 발굴조사 결과 중삼문터, 내삼문터, 공방고, 책방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포정루에서 중삼문터와 내삼문터를 거쳐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여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터, 행각터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선화당 뒤편에 있는 연못터인 방지의 호안석축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다.

 

강원감영지는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 당시의 건물이 원래의 위치에 잘 남아 있고, 중삼문, 내삼문, 공방고터, 책방고, 보도, 담장, 행각 등이 있던 흔적과 같은 관련 유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또한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터 등이 그 아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8.원주 영원산성

종 목  사적  제447호  지 정 일 2003.06.02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2외 1필  시 대 신라

영원산성은 원주의 치악산(해발 1,288m)에 위치한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북원의 양길·궁예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산성은 한강 상류의 요진으로 한동안 경영되다가 폐허가 되었다.

 

이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불규칙한 부정타원형으로, 성벽의 총 연장은 약 2.4㎞이며, 다듬지 않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동북 모서리에서 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이어서 꼬리처럼 된 용도를 만들었는데, 이 곳은 다른 지역과의 연락에 유리한 곳일 뿐만 아니라, 남대령 방면에서 능선을 타고 접근하는 적을 쉽사리 관찰하고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능선상에 성벽이 꺾어지는 곳은 능선을 타고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곡성을 마련하였는데, 동남쪽 성벽에 4곳, 북쪽 성벽에 4곳, 서쪽 성벽에 4곳이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한다. 지금 성안에는 남·북·서문터와 성안의 물이 배수되는 수구가 남아 있는데, 북문의 동쪽에는 치성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성안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세 곳에 숯가마가 남아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와 기와류 등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이 산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체성과 여장이 확실히 구분되면서도 성의 외벽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또한 여장에 사혈이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축성의 형식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산성 축조방식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위치의 선정, 용도 시설의 활용, 여장의 완전한 잔존, 성문과 치성의 구조 등에서 고려시대 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원주 영원산성은 학술적으로는 중세 산성의 특징(여장, 치성, 성문 등)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며, 역사적으로는 고려·조선시대를 걸쳐 전란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귀중한 유적이다.

   

9.원주 법천사지

종 목  사적  제466호  지 정 일 2005.08.31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9 외  시 대 통일신라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문헌에 전하는 법천사는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국사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과 탑비(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 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으며, 법천사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묘탑지와 부도전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2001년부터 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10.포정루 및 선화당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85 (일산동 54-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태조 4년(1395) 원주에 설치된 강원감영은 강원감사의 집무처로 70여 칸의 규모였다. 임진왜란(1592) 때 부서져 다시 건물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현재는 관찰사 집무처였던 선화당과 정문인 문루만 남아있다. 문루에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강원감영문루’라는 현판이 달려있었으나 『여지도서』등의 문헌을 근거로 하여 1991년에 ‘포정루’로 고쳐 달았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누각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하고 있는 팔작지붕이다. 1층 가운데 칸에는 2짝의 널문을 달았다. 2층은 주위를 난간으로 돌려 사방을 개방하였고 천장은 뼈대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감영의 자리에 군청이 들어섰지만 선화당은 그대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이후 1667년에 다시 지은 선화당은 앞면 7칸·옆면 4칸의 1층 건물로 문루와 같은 팔작지붕인 평범한 관아 건물이다. 대청쪽과 앞면, 오른쪽 등은 특이하게 띠살문으로 처리하였다.

 

포정루 및 선화당은 조선시대 감영의 형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1.일산동 석불좌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봉산로 134 (봉산동 836-1) 원주시립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말~고려초기

원래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고 다시 1962년 5월에 강원감영터로 이전하였다가 2000년 봉산동 시립박물관 야외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 이 석불은 5층석탑을 중심으로 좌우에 똑같은 모습으로 안치되어 있다.

 

이 2구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한 것이어서 원래의 모습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체구는 단정한 편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얇아서 신체의 윤곽이 잘 나타나 있으며, 평행옷주름은 다소 도식화되었다. 깨진 두 손은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손모양으로 보아 아마도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8각대좌로, 상대에는 연꽃을 2중으로 조각하였고, 중대에는 각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기고 그 안에 보살상을 새겼다. 하대에도 연꽃잎을 새겼으며, 그 아래에는 사자와 모란 등을 장식한 8각 기둥모양의 큰 돌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불신만으로도 조각수법이 뛰어남을 알 수 있는 이 석불들은 단정한 체구, 세련된 형태, 평행옷주름 등에서 신라말의 비로자나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12.일산동 오층석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봉산로 134 (봉산동 836-1) 원주시립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원래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62년 5월에 강원감영터로 이전하였다가 2000년 봉산동 시립박물관 야외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전체가 큼직한 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탑신의 각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위로 오를수록 서서히 줄어드는 비율이 단아하며, 형태도 정돈되어 있다. 지붕돌은 얇은 편이고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인데, 안타깝게도 파손된 부분이 많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13.상원사지 석탑 및 광배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로 930 (성남리 1060)  시 대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

상원사는 치악산 중턱인 해발 1,100m에 자리잡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무착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꿩이 이 절의 종을 울려서 스님을 살려 은혜를 갚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절내의 대웅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이 두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크기와 형식에 있어 서로 비슷하다. 아래 ·위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은 1층 몸돌이 큰 편이나, 2층부터는 높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모두 1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둥근 연꽃봉오리모양의 독특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붕돌 받침이 간략화된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동쪽 탑 앞에는 석불의 것으로 보이는 광배와 대좌가 놓여 있다. 광배는 불꽃무늬 테두리 안에 연꽃과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는데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대좌의 형태는 8각형이며, 한 면의 일부가 조금 깨졌다. 불상은 남아있지 않아 그 모습을 알 수 없으나, 광배와 대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고려전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14.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지 정 일 1973.07.31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402-1  시 대  고려시대

이곳은 불상 주위에 용운사라고 적힌 기와조각들이 주변에서 발견되어 예전에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은 광배만 없어졌을 뿐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통통한 얼굴은 자연스럽게 미소짓고 있는 현실적인 모습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옷주름은 계단식으로 도식화되고 구불구불한 선은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995호)등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을 계승하여 만들어진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손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3단으로 된 사각형인데, 큼직한 연꽃무늬와 안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비로자나불의 특징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만든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

  

15.용운사지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지 정 일 1973.07.31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402-1  시 대 고려시대

용운사터에 석불과 나란히 서있는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탑 주변에서 ‘용운사’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을 알게 되었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 맨 윗돌 위에는 연꽃을 두른 두툼한 괴임돌을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독특한 장식 수법이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느리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기단부 맨윗돌이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기단 윗부분에 아름다운 연꽃을 장식한 굄돌을 두고, 지붕돌 밑면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6.봉산동 당간지주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 정 일 1976.06.17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개봉교길 41 (봉산동 1146-1)  시 대 고려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데, 이 깃발을 다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원주시 봉산동 내천 옆에 자리한 이 당간지주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내에 서 있던 것이라 한다.

 

기단부가 땅에 묻혀 있어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좌우 두 기둥과 기둥사이의 당간받침돌만이 남아있다. 자연돌로 만든 당간받침돌은 양끝을 기둥밑부분이 들어갈 수 있도록 파낸 후 기둥을 끼웠고, 그 윗면에는 가운데에 동그랗게 테를 돌린 후 깃대를 끼워 세울수 있도록 구멍을 파 놓았다. 양 기둥은 직사각형이나 위로 오를수록 차츰 좁아져 맨끝은 뾰족하게 모아진 형태이다.

 

각 부분에서 날카로운 부분을 다듬어 부드러운 모습을 나타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세워진 시기는 대체적으로 정교한 꾸밈이 없었던 고려시대로 여겨진다. 1910년 ‘한일합방’당시 기둥 한쪽이 파손되어 1980년 4월 복원해 놓았다.

   

17.원주 태장동 왕녀 복란 태실비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6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태장동 1266-11  시 대  조선시대 

태실비는 태실(왕이나 왕실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돌로 만든 방) 옆에 세우는 비로, 모셔진 태의 주인공을 알려준다. 이 비는 조선 성종 17년(1486)에 태어난 왕녀 복란의 태실비이다.

 

비는 사각형의 비받침과 비몸, 머릿돌이 한돌로 되어 있다. 머릿돌은 연꽃잎을 씌운 것처럼 조각하였고 꼭대기에는 보주(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조각하여 머리장식을 하였다.

 

1992년 한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 시 비석 뒤 3m 지점에서 태를 담은 돌함을 따로 발견하였다. 이 마을은 태가 묻혀있다 하여 ‘태장정’으로 불리다가 1955년 ‘태장동’으로 바뀌었다.

 

  

18.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산6-1  시 대  고려시대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사람키 만한 석조보살 입상이다.

 

머리에는 관(冠)을 쓰고 있으며, 풍만한 얼굴에 눈·코·입은 작게 표현되어 있지만 미소를 띠고 있어 친근한 인상이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신체에 비해 팔은 가늘고 손이 작아서 불균형한 모습이다.

 

상체의 옷은 양복처럼 보이고, 큰 체구에 구름무늬 같은 하체의 옷주름이나 머리에 쓴 관 모양이 일반적인 보살과 거리가 먼 특이한 형태이다.

 

친근한 인상과 옷이나 신체 등 형식적인 세부표현에서 고려 보살상의 특징과 지방색이 어우러져 있는 작품으로, 이 지방의 불상양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19.원주 비두리 귀부 및 이수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귀문로 1008 (비두리 959-3)  시 대 조선시대

비두리 마을에 놓여 있는 비로, 원래는 후용리 마을의 용바위골에 있던 것을 인근에 법당을 세우면서 옮겨갔다가, 비두리 마을 주민의 건의에 따라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비는 바닥돌 위로 거북받침을 두었고, 그 위로 비몸이 사라진 채 머릿돌만 놓여 있다. 거북받침은 머리가 뒤로 바짝 돌려져 비를 바라다 보는 형상이며, 등에는 2중의 육각무늬가 가득 차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거니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얼굴을 마주보고 몸은 서로 뒤엉킨 모습으로 요동치는 용의 움직임이 힘차다.

 

비몸이 사라져 비을 세운 시기나 그 주인공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조각솜씨가 돋보이며, 특히 뒤로 돌려져 등에 붙어 있는 거북머리는 매우 독특한 발상이다.

  

 

20.김두한 가옥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6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문막읍 지샘등안길 46-13 (건등리 852-4)  시 대  조선시대

원주목사와 남원목사를 지낸 김탄행(1714∼1774)의 묘를 관리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약 240여 년 전에 처음 지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으며, 1936년에 크게 보수하였다고 한다.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ㄷ자형을 이루고, 사랑채 끝에 대문과 헛간 등이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안방과 웃방이 부엌에 접하여 있고 그 옆으로 대청과 건넌방이 있으며, 지붕 옆면은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는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앞면 3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왼쪽 1칸은 마루방·오른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마루방 뒤쪽에는 사방 1칸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이 뒤쪽으로 안채의 부엌과 닿아있다.

사랑채 옆은 대문으로 여기에 이어져 헛간·창고방들이 ㄴ자로 연결되어 있다. 대문에서 헛간부분은 사랑채보다 현저히 낮게 구성되어 지붕선도 층단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이용하는 공간이 구분되어 전체의 가옥형태를 이루는데, 이 집은 사랑채의 주요공간이 안채의 부엌 앞쪽에 닿아 있는 특이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21.원주 보문사 청석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지 정 일 1985.09.13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105  시 대 고려시대

보문사터로 알려진 곳에 지금의 절을 새로 지을 때 중 땅속에서 발견된 탑으로, 점판암(벼루를 만들던 돌)으로 이루어진 청석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구조인데, 기단과 탑신의 모습이 비슷하여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현재는 이 탑을 보호하기 위해 탑의 아래에 화강암의 높고 널찍한 2층의 단을 마련해 놓았다. 아래·위층 기단은 윗면에 연꽃을 새겨놓았고,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불교문자인 범어를 새겼다. 현재 탑을 이루고 있는 전체가 모두 원래의 것은 아니고, 탑신의 2·3·4층의 몸돌과 5개의 지붕돌, 두 기단의 맨윗돌 외에는 최근에 새로 만들어 끼워놓은 것이다.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있었던 탓인지 심하게 닳고 부서진 부분이 많으나, 고려시대의 청석탑 양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탑이다. 

 

22.원주 구룡사 보광루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지 정 일  2004.01.17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시 대  조선시대

보광루는 치악산 중턱에 위치한 구룡사의 불이문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구룡사의 진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밑을 지나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운 뒤에 그 위로 누각형 건물을 올렸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며,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한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누마루는 우물마루인데, 한때 마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23.학곡리 황장금표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30호

지 정 일 1979.05.30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234-1 (학곡리 1061)  시 대 조선시대

치악산 내의 구룡사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황장목의 보호를 위하여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하는 경계의 표시이다.

 

황장목은 나무의 안쪽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질이 좋은 소나무로서 왕실에 올리는 특산물 중의 하나이며, 궁에서 신관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치악산은 질이 좋은 소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관아가 가까이 있어 관리도 유리하였고, 한강의 상류에 자리하여 뗏목으로 한양까지의 운송이 편리하여 전국에 있는 60여 개소의 황장목 보호림 가운데에도 이름난 곳의 하나였다.

 

금표는 작은 바위의 한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황장금표’라는 글귀를 새긴 모습으로, 최근에 ‘금’자와 ‘표’자 사이의 윗부분에 ‘동’자가 새로이 발견되었다. 구룡사 입구에서 100여m 정도 내려가면 도로가의 흙속에 일부가 묻혀 있는 1기의 금표가 더 남아 있는데, ‘금표’의 글귀 윗부분에 ‘외’자가 보인다.

 

이렇듯 보호림 구역을 만들어 표시를 해놓는 제도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생겨난 것으로, 강원도에는 이곳 외에도 인제, 영월, 양양 등에 있다. 

 

24.원주 운곡 원천석묘역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75호

지 정 일  2000.11.18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37

시 대  조선시대

운곡 원천석(1330∼?) 선생의 묘이다. 원천석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밝아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기도 하였다.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조선왕조가 들어서 선생에게 벼슬이 주어지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묘역 내에는 봉분 앞에 묘비와 제사음식을 차려 놓을 수 있는 상석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있는 소박한 형태이다.

25.원주 조엄묘역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76호

지 정 일  2000.11.18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산69-12

시 대  조선시대

문익공 조엄(1719∼1777)의 묘역이다. 조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문장에 능하고 민생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지평, 수찬 등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조창을 설치하고 조세부담을 줄이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영조 39년(1763)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고구마의 종자를 가져와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봉분 앞에는 제사음식을 차려 놓을 수 있는 상석, 망주석 2기가 있고 상석에서 조금 왼쪽으로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곳에서 100m 떨어진 묘소 진입로 쪽에 신도비가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26.입석사 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9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산1  시 대 고려시대

입석사에 있는 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세워 둔 것인데, 2기의 석탑 부재가 섞여 있는 듯 하다.

 

부재들은 두툼하고 네모난 연꽃받침이 2개, 얇은 연꽃받침이 1개, 각 면에 기둥 모양을 새긴 탑신의 몸돌이 3개, 네모난 판돌이 4개이다.

 

연꽃무늬 조각이나 탑신의 몸돌을 다듬은 솜씨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이 왕위에 오른 후 어린 시절의 스승 운곡 원천석을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며 나타나지 않으니, 그를 생각하며 이 탑을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 내려온다.

 

27.법천사 당간지주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0  시 대 통일신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깃발을 달게 되는데, 이 깃발을 거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가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법천사 절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터를 지키고 있다.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다.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놓았다.

 

당간의 받침돌이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작품으로, 기둥 형태가 안정감이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28.김제남 신도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흥법사지길 18 (안창리 413)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선조임금의 장인이었던 김제남(1562∼161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선조 18년(1585)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활동을 시작하였고,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에는 이조좌랑에까지 올랐다. 둘째 딸이 선조의 둘째 비인 인목왕후로 추천되자 연흥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광해군 5년(1613)에는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채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후에야 명예가 회복되어 그를 위한 사당을 지었고,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구조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비를 바라보듯 뒤를 향하고 있어 재미있는 모습이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이 가득 새겨 있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세운 비로, 왕의 명령으로 그의 사당을 지을 때 함께 세워두었다 한다.

29.주포리 미륵불 및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25-2

시 대  고려시대

황산사의 옛 터에 남아 있는 3층 석탑과 이 터에서 멀리 떨어진 뒷산의 높은 봉우리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이다. 석탑은 절터에 흐트러져 있던 것을 다시 세워놓은 것으로,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던 기단이 없어진 채 3층의 탑신만 남아있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 뜬 조각을 두었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3단씩의 받침을 밑면에 새겼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느리게 위로 들려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을 한 큼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두꺼운 지붕돌에 비해 몸돌이 가늘고 높아 전체적으로 길쭉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불상은 화사하게 장식된 연꽃받침 위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네모진 얼굴에 눈·코·입·귀 등을 큼직하게 새겨 토속적인 인상을 준다. 얇게 새긴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있는데 주름의 표현이 분명하지 않고, 손의 모양도 뚜렷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머리에 비해 체구가 작고, 팔이나 손 등의 표현이 투박하고 토속적이어서 고려시대 전기에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지방화 되어 가던 고려시대의 석불양식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30.흥법사지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외 7필지  시 대 고려시대

흥법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신라 때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염거화상탑, 진공대사부도(보물 제365호), 진공대사탑비가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보물 제463호)만이 남아있다.

 

 

31.원주향교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98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향교길 37-1 (명륜동 255)  시 대 고려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원주향교는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처음 지었고, 조선 태종 2년(1402)에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차례 수리·복원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 동재·서재, 외삼문, 수복실 등이다.

 

맨 뒤쪽 가운데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고, 그 양쪽에 동무·서무를 배치하였다. 대성전 앞쪽에는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을 두고, 명륜당 앞 양쪽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배치하였다. 동재 옆에 수복실을, 명륜당 앞에 외삼문을 배치하였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32.원주 교항리 석조불두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교항리 1019

시대  고려시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교항리 도로변의 큼직한 화강암 바위 위에 불상의 머리 하나만이 놓여있는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는 평장리와 교항리의 경계가 되는 언덕 위에 있는 암벽에 있었던 것으로 불상의 몸 부분을 조각하고 그 위에 머리 부분만을 올려 놓았던 것인데,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불상의 머리만 현재 위치로 옮겼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은 서툴지만 그런대로 불상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각부의 조각 양식 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33.원주 원충갑묘역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지 정 일  2006.07.28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산25

시 대  조선시대

원충갑(1250~1321)은 고려의 무신으로 원주 출신이며 본관은 원주고, 시호는 충숙이다. 향공진사로 원주별초에 있으면서 1291년(충렬왕 17) 합단적이 치악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렀다. 원충갑의 이러한 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로, 다시 1308년 원주목으로 승격되었고,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과 잡공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원충갑 또한 여섯 번 전임하여 삼사 우윤에 올랐다. 충선왕 때 응양군 상호군이 되었고, 합단적을 물리친 공으로 1319년(충숙왕 6)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이 되었다. 원충갑은 충숙왕 8년(1321)나이 72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원충갑사가 세워져 제사를 모시다가 1669년(현종 10) 사당을 세워 원충갑을 주향하고 김제갑과 원호를 배향 하였고, 1670(현종11) 윤2월 7일 충렬사로 사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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