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시뉴스] [강원의항구기행]아바이마을 오가는 갯배 구름에 가려진 설악산, 옛 추억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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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포구에서 쓰는 편지(7) 속초항

혼자 갯배를 타고 쇠줄을 당겨 건너간 아바이마을
인파들 북적이는 골목길 빠져나와 향한 작은 백사장
그 시절 함께 왔던 이들 재회하는 행운은 바람에 그쳐

이제는 실향민보다 더 많은 관광객을 태우고서
갯배는 여전히 속초항을 건너가고 또 건너오고

중앙시장을 향해 걷다 걸음 멈추게 한 속초역 간판
오랜 세월 고향 돌아가기 위해 철로 사라진 기차역서
매일같이 열차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아

아바이마을의 실향민동상. 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설악산 미시령옛길을 넘어 속초항에 도착한 k는 후미진 곳에 자동차를 주차했다. 수로 같은 항구를 건너 청호동 아바이마을로 가는 다리 옆이었는데 시멘트 틈 사이에서 자라난 잡초들이 시들어 가는 곳이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차가운 가랑비가 날리는 오후였다. k는 자동차의 위치를 몇 번이나 확인한 뒤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채 좁은 부두를 따라 도선장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속초항을 찾은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단풍 같은 설악대교를 지나 바다로 나가는 고깃배.

도선장에 도착하자 아바이마을 쪽에서 사람들을 가득 실은 갯배가 포구를 건너오고 있었다. 쇠줄에 쇠고리를 걸어서 운행하는 무동력선이었다. k는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그 모습을 찍었다. 우중충하고 다소 추운 날씨였는데도 배에 탄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는데 대부분 관광객들인 것 같았다. 도선장 주변 풍경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서울의 홍대 거리와 흡사한 가게들. k가 걸어온 포구 바로 옆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 포구를 가로지르는 대형 다리. 이 모든 것들은 k의 기억에 없는 풍경들이었다. 갯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억 속 회색 풍경들이 어느 날 갑자기 총천연색으로 변해버린 것 같아 k는 갯배를 타지 못하고 나무의자에 앉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k가 타지 않아도 배는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요. 저는 일이 있어 돌아가야 해요.

중앙동과 청호동을 오가는 갯배.

이십 대 후반 무렵 k가 포구 근처 허름한 식당에서 급하게 먹고 마신 오징어순대와 소주에 취해 조금 비틀거리며 제안했을 때 어느 여선생이 한 말이었다. k는 혼자 갯배를 타고 쇠고리로 쇠줄을 당겨 건너편 아바이마을로 건너갔다. 포구를 훑고 온 바람이 매운 겨울날이었다. 그 이후 k는 속초항을 방문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갯배를 타자고 제안을 했다. 건너가야만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 바닷가 모래 위에 정착한 이들의 낮은 지붕과 골목들을 볼 수 있다고 우겼다. 속초(束草)라는 한자의 의미는 풀을, 민초(民草)들을 묶은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렇게 k는 그동안 시인, 소설가, 화가, 연극인, 음악인들과 함께 갯배를 타고 속초항을 건너가고 건너왔다. 그러다가 발길을 끊었다.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속초항이 조금씩 멀어져갔던 것이다. k는 그 까닭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토해내지 않고 끝까지 삼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k는 갯배를 탔다. 쇠고리로 줄을 당기면 바닷물 속에 잠겨 있던 무거운 쇠줄이 위로 올라왔다. 사공과 손님들이 함께 그 일을 했다. 고깃배도 갯배가 지나갈 땐 잠시 멈췄다. 수로의 폭이 좁아서 갯배에는 의자가 없다. 손님들은 모두 서서 건너가야 하는데 물 위에 어룽거리는 그 그림자가 다채롭다. k는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지만 배는 벌써 실향1번지라 불리는 아바이마을에 접안하고 있었다. 물은 이내 하늘빛을 담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골목 상가들.

아바이마을의 골목은 징검다리 연휴를 맞아 찾아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어느 냉면집 앞엔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고 식당의 아주머니들은 가판에서 전을 부치느라 바빴다. k는 그 사이를 빠져나와 백사장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해수욕장이었다. 백사장의 나무의자들, 붉은 등대와 흰 등대, 항구를 빠져나가는 큰 어선을 따라가다가 돌아오는 갈매기 한 마리, 이산가족통일기념비와 조각상, 그리고...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설악산. K는 아바이마을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옛날 함께 왔던 사람들을 다시 재회하는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조금 기대하기도 했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났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대신 k는 그 세월 동안 속초항의 구수로(舊水路)와 청초호의 신수로, 그리고 백사장으로 둘러싸인 섬으로 변해버린 아바이마을에서 웃음을 풀어놓는 관광객들을 훔쳐보다가 먹물이 들어간 검은 소금빵을 구입한 뒤 도선장으로 돌아왔다. 갯배는 여전히 속초항을 건너가고 건너오고 있었다. 일제 말기부터 지금까지. 이제는 실향민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을 태우고서.

속초항의 구조는 독특했다. 속초항은 북쪽의 동명항과 붙어 있다. 청호동방파제와 동명(속초항)방파제 안쪽 가운데에 섬이 된 아바이마을이 있다. 바다에서 항구로 들어서면 먼저 동명항, 속초 국제여객터미널, 속초항, 구수로, 청초호가 이어져 있는데 바다에서 새로 생긴 신수로로 들어서면 왼쪽의 석호인 청초호, 오른쪽의 구수로도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니까 속초항은 갯배가 오가는 구수로까지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해안사구인 아바이마을의 위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아바이마을이 중앙동과 붙어 있었고 청초호의 물은 지금의 신수로 근처로 배출되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 속초항을 개발하면서 수심이 깊은 구수로를 준설하자 자연하천인 신수로는 사라졌다. 그런데 속초시가지가 커지면서 구수로로 돌아가는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청초호 물이 더러워지자 근래에 신수로가 생겨났다. 결국 섬이 된 아바이마을을 육지와 연결하기 위해 북쪽의 금강대교, 남쪽의 설악대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복잡한 파동 속에서도 갯배는 살아남은 것이었다. k는 다시 갯배에 올라탔다.

청호동 해수욕장의 의자, 그리고 동명방파제와 속초항방파제.

중앙동 도선장에 내린 k는 관광객들이 열에 한 명꼴로 손에 들고 다니는 닭강정을 사려고 중앙시장을 향해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속초역(束草驛). 처음엔 진짜 속초역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산 아래 안변과 양양을 연결했던 동해북부선의 한 역이었던 속초역. 분단과 전쟁으로 사라진 속초역. k는 속초역 건너편에 서서 유리창 너머의 대합실을 바라보았다.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철로가 사라진 기차역에서 매일같이 기차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아바이마을에서 갯배를 타고 건너온 그 누군가가 역무원을 잡고 투박한 함경도 말로 왜 기차가 이렇게 늦게 오는 거냐고 묻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자 k는 자신이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기억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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