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뉴스] [강원의 항구기행]동해안 최북단 삶의 현장 마도로스의 꿈 다시 떠올라

본문

산골서 자라며 바다의 삶 동경
어른이 된 후에도 소망 계속돼

대진항서 듣게 된 비상계엄령
중2 때 겪었던 통행금지의 기억
위기 이겨내고 따뜻한 겨울 되길

분주한 어선·손 녹이는 어민들
강태공과 고양이 한폭의 그림

이곳은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대진항입니다. 봄날 삼척 장호항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름과 가을이 지나갔습니다. 생각해 보니 동해안의 포구를 찾아가는 일은 마치 어떤 순례를 하는 느낌이었지요.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는 터미널 같은 포구들. 그 포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연 저는 무엇을 찾으려고 포구를 찾아갔던 것일까요? 마지막 포구인 대진항에 도착하니 이 질문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네요.

바다가 없는 산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 저의 꿈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어른이 되면 오은주의 노래 ‘아빠는 마도로스’에서 흘러나오던 바로 그 마도로스(Matroos)가 되고 싶었습니다. 배를 타고 태풍이 불고 경보가 내린 바다를 항해하는 마도로스. 정말 근사해 보였지요. 그 꿈은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남아 멀리 남쪽에 있는 해양고등학교 진학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아, 당연히 엄마의 반대로 꿈이 꺾이기는 했지만 제 마음속에서 마도로스는 꽤 오래 떠나지 않고 세상의 바다와 항구를 여행하고 있었지요.

어른이 되자 어느 날 그 마도로스가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해 이 땅의 포구들을 여행하는 게 어떻겠냐고. 동해, 남해, 서해, 그리고 무수한 섬들의 포구를 찾아가 며칠씩 머물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가슴이 설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꿈도 당연히 방파제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처럼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철부지 마음만은 한동안 따스했습니다.

장호항, 삼척항, 묵호항, 심곡항, 주문진항, 낙산항, 속초항, 거진항, 그리고 화진포항을 배가 아닌 자동차로 방문했던 계절이 지나고 겨울이 도착했습니다. 초겨울에 폭설이 내렸고 그 나흘 뒤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비상계엄령이 해일처럼 이 땅의 하룻밤을 휩쓸고 갔습니다.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대관령에서 겪었던, 야간통행금지를 내렸던 계엄령의 밤이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이번엔 화가 치솟고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던 밤이었지요. 그나마 안심이 되고 든든했던 것은 포구의 등대처럼 굳건한 국민이 있어서였지요. 그렇게 우리는 계엄령의 밤을 건너고 탄핵의 바다를 지나 다시 저마다의 포구에 도착한 것이겠지요. 저 역시 휴전선이 가까운 대진항의 흰 등대에 도착해 하늘을 가득 채운 새털구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 새털구름은 여의도와 광화문에 모인 국민의 마음처럼 보입니다.

고성군은 대진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네요. ‘대진리(大津里)는 동해안 최북단 면소재지이며 동쪽은 동해, 서쪽은 마달리, 북쪽은 마차진리, 남쪽은 초도리 철통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처음엔 대범미진이라 불렀고 그후 안(安)씨와 김(金)씨가 개척하였다고 해서 안금리(安金里)라고 칭하다가 고려시대에는 여산현(驪山縣), 그 후에는 열산현(烈山縣)에 속해 황금리(皇琴里·황구리)라고 불러왔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한나루(大津里)라고 개칭하였다. 그 후 동해안을 따라 확장하는 신작로가 개설되고 1920년에는 고성군 현내면 소재지로 승격하였으며 한나루에 축항을 쌓아 명실공히 조그마한 어항으로 축조되었다. 1925년부터 동해북부선 철도공사가 시작되어 1935년에 개통을 보게 됨으로써 어항을 모체로 풍부한 수산자원(청어, 정어리)과 농산물을 원산으로 수송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대진항은 이후 명태가 많이 잡혔고 지금의 주요 어종은 가자미, 문어 등과 가리비, 성게 등을 양식한다고 하네요. 무엇보다도 대진항은 고성 통일전망대로 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마지막 포구인 것이지요.

포구 주변을 걷습니다. 해상공원을 서성거리고 한가롭게 쉬고 있는 어선들을 기웃거립니다. 방파제의 하얀 등대도 찾아가고 빨간 등대를 바라보며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의 낚싯대가 파르르 떨리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강태공 주변을 서성거리는 고양이 세 마리의 자세가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발길이 오래 머무네요. 등대 전망대로 가는 계단 중간쯤에서는 종아리를 주물러주었습니다. 녹슨 윤형철조망과 해안초소가 보이네요. 등대에서 내려오는 길은 포구 반대편, 북쪽으로 정했습니다. 해안 철책을 따라 언덕길을 다 내려오니 저편 바다 건너에 자리한 금강산콘도가 보입니다. 철조망 너머의 새털구름은 여전히 삼삼오오 뭉친 채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금강산콘도 너머는 마차진일 테고 그 너머엔 민통선 마을인 명파리가 있겠지요. 또 그다음엔 해금강 말무리반도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합니다. 작은 언덕을 넘으며 휴대폰의 지도앱을 열고 대진항 너머 휴전선 북쪽의 포구들을 검색합니다. 장전항, 통천항, 원산항, 함흥항, 청진항. 이렇게 큰 항구들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자그마한 포구들이 숨어 있을까요. 언제 그곳들을 가볼 수 있을까요. 이 혹독한 계엄의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오면 갈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한반도의 가장 북쪽인 나진, 선봉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포구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겠지요. 포구에 내리는 눈은 어떤 풍경일까요. 정박한 어선에 쌓이는 눈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드럼통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에 언 손을 녹이는 어민들이 떠오릅니다.

어부들은 한겨울에도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겠지요. 그렇게 잡아 온 물고기들이 바다의 터미널인 포구에서 또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겠지요. 그중 일부는 제 고향 대관령으로 찾아와 눈보라 몰아치는 덕장에 걸려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황태로 변할 겁니다. 그러면 고향으로 찾아가 나만 알고 있는, 구들장이 절절 끓는 허름한 식당을 찾아가 뜨끈한 황탯국과 양념장이 잘 스며든 황태구이를 시켜놓고 돌배술을 홀짝거리겠지요. 찢어진 문풍지 밖으로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 오후에.

대진항을 떠납니다. 이번 겨울 모두 따스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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