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7세기 인도 수학자의 혁신...수학사에서 0의 '발명'보다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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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다시 쓰는 수학의 역사
케이트 기타가와·티머시 레벨 지음
이충호 옮김
서해문집

최근까지 수학사 통사 서적은 최소한 수학 애호가는 되어야 읽어 나갈 수 있는 밀도 높은 책이거나, 위대한 수학자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 글들을 담은 어딘가 허전한 모음집이 상례였다. 비유하자면, 고도로 상징적인 초장편 영화 아니면 매회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구식 옴니버스 드라마.

이 갈림길에서 『다시 쓰는 수학의 역사』의 지은이들은 새로운 선택을 했다. 에피소드별로 하나의 이야기가 일단락되면서도, 여러 편에 걸쳐 큰 이야기의 흐름이 전개되는 방식. 시즌제 드라마에서 자주 채택하는 내러티브 방식이다. 덕분에 갖가지 삽화와 어울려, 읽기 쉬우면서도 지향이 뚜렷한 수학사 책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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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빌링즐리가 최초로 영여러 번역해 출간한 '유클리드의 원론'(1570). [사진 서해문집]

지은이들은 어떤 수학 개념이 한 장소에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에 걸쳐 비슷한 개념들이 여기저기 어렴풋이 발생하고 변형되다가 자리 잡았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산발적으로 발현한, 새로운 수학사를 써보자는 운동에 밑그림이 나온 셈이다.

예전의 수학사는 피타고라스가 증명 개념을 발명했고, 다른 문명권에 없었던 증명 개념이야말로 현대 수학을 낳은 산파라는 식이었다. 그런 관점에서는 누가 최초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반면 지은이들은 수학의 역사가 깊고, 넓고, 혼란스럽고 그래서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누가 최초인가라는 질문은 그다지 의미 없다고 본다. 천문학 등 여러 인접 분야들과 수학의 다양한 상호작용, 문화적·사회적 저변 확대 등이 수학의 내용과 어떻게 엮여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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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인 바크샬리에서 농부가 발견한 '바크샬리 필사본'. 여러 개의 점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맨 아래쪽에 있는 점은 자리 표시자 역할을 한다. 바크샬리 필사본은 70쪽의 자작나무 껍질에 글씨를 쓴 것으로, 산술과 기초 대수학과 기하학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세 쪽의 문서가 각각 300년경, 700년경, 900년경의 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 서해문집]책 '다시 쓰는 수학의 역사' 서평용 이미지..[사진 서해문집]

뜬금없어 보이던 ‘0’의 발명이 자연스럽고 납득하기 쉽게 서술되는 점은 새 방식의 큰 장점이다. 자릿수 개념은 각 문화권마다 따로 등장하거나, 아예 없거나 했다. 자릿수 개념을 활용한 계산술은 기원전 고대 바빌로니아와 중국의 산술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아마도 기원 전후 마야에서 해당 자릿수에 수가 없음을 표시하는 동그라미 기호가 처음 등장했다. 기원후에는 인도 수학도 뒤따랐다. 처음에는 점(.)을, 나중에는 '0'을 빈 자릿수를 표시하는 기호로 쓰다가, 드디어 7세기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가 0을 크기가 없는 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떤 수에 0을 더하거나 빼면, 그 수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어떤 수에 0을 곱하면, 그 결과는 0이 된다.”

덕분에 복잡한 수 계산을 물 흐르듯 실행할 수 있게 되었고, 대수학의 발달을 방해하는 개념적 장벽이 사라졌다. 즉, 수 0은 갑자기 튀어나온 천재적 발명은 아니지만, 브라마굽타가 덜 혁신적인 것도 아니다. 유럽인들은 13세기에 자릿수 기호 '0'을 이슬람인들로부터 전수받고도 15세기쯤에야 크기가 없는 수 0을 납득할 정도였다. 그들이 아둔했을까? 현대인도 때때로 빈 자릿수 기호 '0'과 크기가 없는 수 0을 혼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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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앞바다에 있는 방카섬에서 발견된 원 모양의 0. 새겨진 숫자는 608인데, 카사 시대의 한 해를 표시하기 위해 적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시간 기준에 따르면, 686년에 해당한다. [사진 서해문집]

아쉬운 점은 새로운 지향이 온전히 구현되지는 못했다는 점. 예컨대, 이 책은 증명 개념이 고대 그리스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다가 중국 수학자들이 먼저 증명한 것이 확실한 것처럼 서술한다. 유럽식 피타고라스 정리 증명이 동아시아에 알려지기 전에, 독자적으로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내용의 구고정리를 증명한 것은 맞고, 중국에서 먼저 증명한 듯한 근거도 강력하기는 한데, 확실히 입증할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또 뉴턴과 라이프니츠 중 누가 진정한 미적분의 발견자냐는 18세기 논쟁이 별 의미 없음을 강조하다 보니, 14세기 인도의 수학자 마다바가 뉴턴과 라이프니츠보다 400년 먼저 미적분에 필요한 개념들을 활용하지 않았겠냐고 방향을 튼다. 그렇게 추정이 허용된다면 고대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 0이 활용되었다고 말해도 된다. 아무래도 고중세 인도 수학을 서구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관점이 덜 극복된 듯하다.

이 책은 미 하버드대의 인기 일본사 교수였다가 몇 년 전 수학문화사로 전향한 케이트 기타가와가 영국의 과학저널리스트 티머시 레벨과 함께 썼다. 정교한 세밀화를 그리기에는 두 사람이 수학사를 천착한 시간이 아직 짧았지만, 앞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새로운 수학사의 밑그림을 목탄 크로키처럼 그려내는 솜씨는 질투를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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