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정보] 강릉시 죽헌동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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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안녕하세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에 대하여 조사하는 건데요..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문화재를 알려주세요..
빨리 부탁드립니다(내일 까지여서..)
내공200~사진 첨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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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
파스칼8012님의 댓글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의 문화재)
1.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8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립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강릉에 있던 한송사가 폐사된 후 명주군 구정면 어단리에 있던 것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머리와 오른팔이 없어진 불완전한 보살상이지만, 입체감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희귀한 작품이다. 왼팔은 안으로 꺾어 왼다리에 얹었으며, 오른팔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져서 알 수 없다. 앉은 자세는 왼다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오른다리를 밖으로 내어 발을 그냥 바닥에 놓고 있다. 이런 자세는 보살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아마 어느 본존불을 모시던 협시보살이었을것으로 여겨진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천의(天衣)는 아주 가벼운 느낌을 주며, 목걸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아름답다.
이 보살상은 특이한 자세와 더불어 사실적이며 활달한 조각수법으로 특이할 만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조각수법이 흡사한 고려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
2.강릉 오죽헌
종 목 보물 제16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조선시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3.이이 수고본 격몽요결
종 목 보물 제602호 지 정 일 1976.04.2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이것은 율곡 이이(1536∼1584)선생이 42세 때인 선조 10년(1577) 관직을 떠나 해주에 있을 때 처음 글을 배우는 아동의 입문교재로 쓰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23세 때 별시에서 장원을 한 후 벼슬길에 올랐고, 호조좌랑, 예조좌랑, 우부승지를 거쳐 47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이의 성리학 사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이외에도 를 세우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그가 죽은 후 전국 20여개 서원에 위패가 모셔졌으며, 시호는 문성이다. 저서로는 『격몽요결』 외에 『성학집요』, 『기자실기』, 『만언봉사』 등이 있다.
이 책은 율곡이 직접 쓴 친필 원본으로 한지에 행서체로 단아하게 썼으며, 내용은 제1장 에서부터 의 항목으로 나누어 제10장으로 구성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이 책머리에는, 정조 12년(1788)에 이 책을 친히 열람하고 제목에 글을 지어 문신 이병모(1742∼1806)에게 명해 이를 책머리에 붙이게 하였다. 『격몽요결』은 조선 중기이후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어『동몽선습』과 함께 초학자의 입문서로 근세에까지 많이 읽혀져 왔다.
더욱이 이『격몽요결』은 여러차례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출간되어 왔으나, 유일한 친필본은 율곡의 이모가 시집간 권씨집안에 율곡의 유품과 함께 대대로 소장되어 왔으며, 이것은 율곡이 친히 쓴 친필원본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4.문무잡과방목
종 목 보물 제603호 지 정 일 1976.04.2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이것은 중종 8년(1513)에 실시한 문무잡과 시험에 합격한 합격자의 명단이다.
소장자의 선조인 심언광에게 내려져 전해져온 것으로, 같은 해에 실시된 사마시험의 대과합격자 명단인 「정덕계유사마방목」은 월성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문무잡과방목보다 앞서 보물 제52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매수 37매로 가로 17.5㎝, 세로 30㎝이다.
조선 후기의 방목은 많이 있으나 이것은 조선 전기의 방목으로서 희귀한 것이며, 더우기 문무잡과방목은 세 개 과의 합동방목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시대 주요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을 인쇄한 활자는 세종 갑인년에 주조한 갑인자로 인쇄문화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5.명안공주 관련 유물
종 목 보물 제1220호 지 정 일 1995.06.2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1664∼1687)와 그가 거처하던 명안궁과 관련된 전적류, 고문서류, 유물 등이다. 명안공주의 본명은 온희로, 숙종 5년(1679) 오태주와 결혼하였다.
전적류는 현종과 명성황후, 숙종의 한글 편지 등이 수록된 어필첩과 각종 판본, 오태주 일가의 글씨를 모은 유묵첩, 영조의 환갑을 맞이하여 왕세손과 신하들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모음집 등이 있다. 고문서류로는 각종 물품단자와 진정서이고, 유물들은 궁중에서 명안공주에게 보낸 생활용품들이다. 특히, 명안공주 작명단자는 왕실의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관련된 유물들은 그 종류가 다양해 당시 공주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며, 서예연구는 물론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당시의 궁중생활사 및 사회·경제사연구의 사료로서 소중한 자료들이다.
6.황기로 초서 - 이군옥시
종 목 보물 제1625-1호 지 정 일 2010.01.04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고산 황기로(1525~1575?)가 당나라 이군옥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그는 낙동강 지류 천보탄 가에 매학정을 짓고 살았던 처사로서 회소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 장필(1425~1487)을 따랐다. 이 초서는 회소와 장필을 배워 활달하고 운동세가 많은 획법과 변화로운 짜임을 잘 구사한 예이다.
이 필적은 황기로의 사위 덕수이씨 옥산 이우(1542~1609)의 후손인 이장희(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의 묵적 가운데 대폭이며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7.강릉 오죽헌 율곡매
종 목 천연기념물 제484호 면 적 79㎡(보호구역) 지 정 일 2007.10.08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도 매창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신사임당이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상당히 굵었을 고목 매화를 보아온 추억을 살려 훗날 매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 역사성이 깊은 나무이다.
매화의 여러 품종 중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 종류이며, 3월20일 전후 꽃이 필 때는 은은한 매향이 퍼져 오죽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 다른 매화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매실이 달리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8.이씨분재기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신사임당의 어머니이며, 강릉 향현사에 모셔져 있는 최응현 선생의 외손녀인 용인 이씨 부인이 5명의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재산분재 기록문이다.
한지 두루마리로 되어 있으며, 한문 원문에 이두로 토를 달았다. 이렇듯 재산상의 문서나 법률서에는 한문 원문을 끊어 읽는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기에 이두로 한문의 끝 부분에 토를 달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 문서는 조선시대 재산분배에 대한 원칙과 상속대상 등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9.율곡 유품(벼루,토지양여서)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쓰던 벼루와 토지 양여서이다.
벼루는 가운데가 타원형으로 오목하게 패여 있고, 위쪽과 아래쪽에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양각하였다. 벼루의 뒷면에는 글씨가 새겨 있는데, 정조 12년(1788)에 정조가 율곡 이이의 유품이 강릉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보시고, 쓰신 것을 그대로 새긴 것이다. 보신 후 율곡의 유품을 소중히 보존하기 위해 어제각이라는 건물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토지 양여서는 율곡이 그의 소유의 토지를 이종 권처균에게 양여 한다는 증서로, 계약서나 각서와 같은 성질의 문서이다. 이 문서는 선조 12년(1579)에 율곡이 친필로 작성한 것으로, 이 때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해주 석담에 가서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10.신사임당 초충도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조선시대
신사임당이 채색하여 그린 8폭의 병풍그림으로, 각 폭마다 각기 다른 풀과 벌레를 그려 놓아 ‘초충도’라고 부르고 있다.
병풍은 율곡 이이 선생을 모시는 송담서원에 있었는데, 순조 4년(1804) 강릉에 산불이 나면서 이 서원까지 불이 번지게 되어 분실되었다. 후에 강릉의 민가에 보관되어 오던 것을 후손인 이장희가 입수하여 율곡 기념관이 건립되자 1965년 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다.
그림은 자연의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하여 각 폭마다 꽃과 관련된 풀벌레를 중점으로 그렸으며, 그 종류가 20여 가지나 된다. 오이나 가지는 풍요한 느낌을 갖게 하고, 벌레나 잠자리 등은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생동감을 가져다 주며, 풀꽃들에 날아드는 나비나 벌의 표현도 재미있다.
11.매창 매화도 및 옥산 국화도첩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조선시대
이매창과 이옥산은 신사임당의 자녀로, 둘 모두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예능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매창의 매화도는 가로 26.5㎝, 세로 30㎝의 종이에 그린 묵화로, 굵은 가지와 잔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은은한 달빛아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는 매화를 실제로 보는 듯 하며, 깔끔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옥산의 국화도는 가로 25㎝, 세로 35㎝ 크기의 종이에 그린 묵화로, 국화 한줄기가 화면에 솟아오른 단순한 구도이면서도 만발한 국화를 보는 듯 담백한 여운을 풍긴다.
매창과 옥산 남매의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후손인 이장희 가에 소장되어 오던 것을 1965년에 2개로 나누어 오죽헌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2.옥산서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조선시대
옥산서병은 이옥산의 글씨를 모아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오죽헌 기념관에 있는 것으로, 이옥산의 어렸을 때의 작품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초서체로 쓴 것인데,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씨체를 닮았다.
이옥산은 어려서 어머니 사임당에게서 글씨를 배웠고, 장성한 뒤에는 당대의 명필이라 일컫던 그의 장인 고산 황기노의 필체를 배웠다. 그래서 이옥산의 유묵(죽은이가 남긴 글씨나 그림)은 어렸을 때의 것은 사임당 글씨를 닮았고 말년의 것은 장인 황기노 필체를 닮은 것이 많다.
이 옥산서병은 원래는 17매로 된 글씨 첩(책 종이를 병풍처럼 접은 형태)이었던 것을 9폭의 병풍으로 고쳐 꾸민 것으로, 병풍 맨 끝에는 민태식이 쓴 발문이 한 폭 더 붙어있다.
13.신사임당 초서 병풍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 지 정 일 1973.07.3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조선시대
이 병풍은 신사임당(1504∼1551)이 초서로 쓴 오언절구의 6폭 병풍이다.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초충도, 노아도, 요안조압도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것은 신사임당의 이종 손녀가 최대해에게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이웃 고을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강릉 부사 이향달이 듣고 주선하여 도로 찾았다. 그 후 강릉시 두산동의 최돈길가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을 1971년 강릉시가 인계받아 율곡기념관에 보관하게 되었다.
여기에 쓰인 신사임당의 글씨가 각판되어 오죽헌에 있다. 이 각판은 고종 때의 강릉부사 윤종의가 병풍의 글씨를 베끼어 따로따로 각판을 만든 것으로 이 각판에서 많은 탁본을 만들었다. 또한 이 병풍에는 부사의 발문이 따로 붙여있는데 병풍이 전하여 오게된 연유를 적고 있다.
14.박중신 문과급제 교지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6호 지 정 일 1996.02.27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교지는 임금이 신하에게 어떤 사실이나 명령을 전할 때 내리는 문서이다. 이것은 조선 세종 20년(1438) 박중신(1390∼?)이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음을 알리는 교지로서, 박중신의 18세손의 집에 소장되어 온 것이다.
박중신은 강릉 사람으로 세종 20년 문과에 합격하여 영흥판관을 지냈으며,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와 강릉향교를 중건하는 등 선행이 뛰어났다.
교지의 종이질은 닥나무종이로 크기는 가로 64㎝, 세로 78㎝이다. 내용은 4행 34자로 이루어졌으며, 마지막 행에는 ‘정통삼년사월십칠일’ 이라고 연도가 쓰여 있고, 그 위에 ‘국왕신보’라는 임금의 도장이 찍혀 있다.
15.난설헌 시집 목판 초간본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난설헌시집』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남긴 210여수의 작품을 모은 시문집으로, 이를 동생인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난설헌은 호이다. 아버지인 허엽과 형제인 허성, 허봉, 허균은 ‘초당오문장(楚堂五文章)’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문장가의 가문이었다.
선조 22년(1589) 허균이 27세라는 젊은 나이로 숨진 누이 허난설헌이 남긴 원고 모아 『난설헌고』를 편집하여 오언고시 15수, 칠언고시 8수, 오언율시 8수, 칠언율시 13수, 오언절구 24수, 칠언절구 142수를 싣고 부록으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과 「한정일첩」, 「몽유광상시서」와 「오언고시」1수를 실었다.
책의 간행기록이 없어서 언제 발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허균의 발문으로 보아 선조 41년(1608)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강릉 석불입상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립박물관내 시 대 고려시대
강릉시 옥천동에 있던 것을 1992년 오죽헌 시립박물관으로 이전한 높이 1.78m의 석불상이다. 대좌와 불신은 다른 돌로 만들었으며, 머리와 몸통은 2조각 나 있던 것을 보수하였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은 마멸이 심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타원형의 얼굴에 코는 길쭉하며, 눈은 가늘게 찢어졌고, 입은 비교적 불륨있게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옷주름이 평판적으로 처리되었으며, 가슴에는 3가닥의 속옷 자락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해서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향하고 있으나 파손되었다.
원만한 얼굴 표정은 신라 불상의 얼굴을 연상시키지만 어깨가 지나치게 좁은 점, 평판적인 옷주름, 연꽃무늬 대좌 형식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7.강릉 옥천동 석탑재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립박물관내 시 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부분으로, 1940년 신라의 옛 사찰인 무진사터로 전하는 곳에서 발견되어 관음사 경내로 옮겼다가,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이들은 모두 2개인데 하나는 위층 기단의 일부로 여겨지고, 다른 하나는 탑신의 1층 몸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단으로 보이는 석재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칸을 만든 후 각 칸마다 8부신상(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여덟무리)을 조각해 놓았고, 탑신의 1층 몸돌로 보이는 석재에는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어 각 면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18.강릉 비석군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8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강릉 오죽헌 시립박물관 앞뜰에 자리잡고 있는 비들로, 모두 19기에 이른다. 역대 강릉 부사 및 관찰사를 지낸 이들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굶주림속에서도 부사의 목숨을 구해준 노비의 행적을 기리는 ‘충노 문리동 행적비’도 함께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비들은 땅위로 얕게 드러난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으며, 머릿돌을 올려 조각으로 장식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원래는 명주군청에 있었으나, 1954년 남문동의 남대천가로 옮겼다가 1992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19.강릉 운파 고택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유죽길465번길 9 (죽헌동 454) 시 대 일제강점기
1913년경 세운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뒤 2열로 공간이 나뉜 겹집이며 각각 3칸씩 방을 두었다.
사랑채는 안채로 통하는 대문 옆에 물품을 보관하던 마루방을 두었다. 마루방 뒤쪽에도 방을 조성하고, 건물의 바깥쪽으로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각 방으로 출입이 쉽도록 연결해 주고 있다.
20.강릉 김윤기 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7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유죽길465번길 35 (죽헌동 389) 시 대 일제강점기
1919년 지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 평면을 이루고 있고 마당 건너편에는 ㄱ자형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앞·뒤 2열로 조성된 겹집인데 앞쪽에는 안방을 중심으로 부엌과 건넌방을 배치하였고, 뒤쪽에는 골방과 뒷방, 상방을 두었다. 지금은 앞쪽 마루방을 온돌방으로 개조하였으며 안방과 건넌방을 확장하여 안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에는 앞쪽과 옆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21.강릉 오죽헌ㆍ박물관 소장 임영족회첩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5호
지 정 일 2013.01.1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임영족회는 1615년(광해군 7)에 강원관찰사 여우길이 강릉지역을 순행하던 중 이 지역 사족 55명과 처음 만들었다. 이후 1670년(현종 11)에는 강릉부사 여민제와 사족 157명, 1678년(숙종 4)에는 강원관찰사 최문식과 사족 106명, 1679년(숙종 5)에는 강릉부사 여성제와 사족 75명, 1722년(경종 2) 강원관찰사 여필용과 사족 226명이 족회를 열었다. 좌목을 작성한 필체로 보아 창립회원은 20명으로 추정된다. 별록 2책, 기구계 수입ㆍ지출부 각 1책, 기구계 좌목 1책이 함께 있다. 서문과 발문으로 족회의 명분과 상황을 밝혔고 참석한 자들의 명부가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명부에는 참석자들의 직역과 자, 그리고 출생년도의 간지와 본관을 기록하였다. 족회가 열릴 때마다 명부를 작성하고 서문과 발문을 기록하였으며, 조선중기 강릉지역 사족과 관원들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으며, 아울러 전환기의 친족관계 의식과 질서의 변화상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를 갖는다.
22.강릉 오죽헌ㆍ박물관 소장 미타계첩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지 정 일 2013.01.1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미타계의 참석자와 규칙 등을 기록한 글로, 모임의 내력을 소개한 서문과 740여 명의 계원 명부를 포함한다. 미타계는 아미타불을 신봉하여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에 강릉 보현사 불자들이 조직한 계모임이다. 1681년(숙종 7)을 전후한 시기에 보현사의 신도회로 성격이 변화하였고, 향리세력의 상층부를 구성하던 호장들이 이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미타계의 성격은 개방적이어서 속인과 승려, 성별, 반상의 구분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미타계원선안》 1책, 《미타계원좌목》 1책, 미타계직인 1점이 함께 있으며, 미타계직인은 소유주가 다르다. 총 162면으로 구성한 《미타계원선안》은 계원 중 사망한 자들의 명단이다. 계첩의 주요 내용으로는 미타계원의 명단과 계원으로서 사망한 자들의 명단 등이 있다. 아울러 모임 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벌하고 3회 이상 불참한 자를 탈퇴시키는 등의 각종 계칙 등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계칙은 영구적으로 준수하도록 권장하였다.
《미타계원선안》의 권두에는 1681년에 작성한 ‘강희20년신유6월일’ 이라는 간지와 서문이 있고, 그 뒤에 좌목이 나온다. 1758년 작성한 부분에는 ‘건륭22년무인월일’ 이라는 간지와 서문이 있고, 그 뒤로는 1719년 작성한 ‘만력기원후삼기해’의 간지, 서문, 1908년 작성한 ‘융희2년무신’의 간지, 추서, 별록, 명단 등이 이어진다. 《미타계원좌목》은 1908년에 쓴 서문, 사조열록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시기별로 여러 번 작성하여 첨부한 서문은 미타계의 연원과 전통성을 밝히고 계원들의 결속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계첩은 세로 27.8cm, 가로 26.5cm 크기의 저지(닥나무로 만든 종이)에 필사로 기록하였다. 표지 색은 바래고 글자가 흐릿해졌으며 서책의 본문에도 얼룩이 남아 있으나,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여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조선시대 지역 사회 계모임의 성격을 보여주는 계첩으로서 의미를 지니며, 조선 후기 향도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3.경락첩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5호
지 정 일 2015.03.0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조선시대
강릉 경포와 양양 낙산에 거주하는 사족들의 모임이다. 계의 명칭도 경포와 낙산의 첫 글자를 취하여 경락계로 하였다. 1750년 결성되어 시작되엇으며, 초기에는 음력 7월 경포, 음력 10월 낙산에서 연회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음력 3월 187일 양양, 음력 7월 18일 강릉에서 모임이 있으며 호원은 모두 70여명이다.
이 계첩은 1720년 처음 작성돤 것이고 이후의 것은 6.25때 소실되고 남아 있지 않다. 1960년 대 이후부터 다시 작성하기 시작한 조문첩, 도기,원부,회의록 등을 회원이 따로 보관하고 있다.
24.문성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현대
율곡 이이를 기리기 위해 1976년 오죽헌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졌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정치가로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을 지냈으며, 문성사라는 이름은 이이의 시호인 문성에서 유래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콘크리트 구조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과 율곡 이이가 저술한 《격몽요결》과 직접 사용했던 벼루 등이 전시되어 있다.
24.효자 김형중 정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유죽길 437 (죽헌동 산42) 시 대 조선시대
김형중은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1839년(헌종 3) 여름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김형중의 아버지도 전염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김형중은 아버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으며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아버지에게 마시게 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그 슬퍼함이 너무도 애절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김형중의 효성을 추천하여 1861년(철종 12)에 정려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