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정보] 정선군의 문화재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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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에 대해서 문화재를 알아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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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홍님의 댓글

(강원도 정선군의 문화재)

1.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종    목  보물  제410호    지 정 일  1964.09.04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 (고한리 산214)   시     대 고려시대    정암사 적멸보궁 뒤의 산비탈에 세워진 7층의 모전석탑이다. 모전석탑이란 전탑을 모방한 탑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화강암으로 6단의 기단을 쌓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회녹색을 띤 석회암으로 쌓았는데, 표면을 정교하게 잘 정돈하여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의 남쪽면에는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했으며, 1장의 돌을 세워 문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고 추녀끝에서 살짝 들려있으며, 풍경이 달려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단,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 돌벽돌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 그리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가 세련되고 수법 또한 정교한 탑이다. 탑 앞에 돌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연꽃무늬, 안상 등은 모두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파손이 심해서 1972년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운 이유를 담은 탑지석(塔誌石) 5개와 금·은·동으로 만들어진 사리구가 발견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언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정암사에 있는 여러 유물과 비교해 볼 때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2.외재 이단하 내외 옷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65.10.12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수고당길 110 (봉산리 216-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이단하 선생의 옷과 그의 부인이 입었던 옷, 그리고 그에 따른 머리 장식품들이다. 이단하(1625∼1689) 선생은 송시열 선생의 제자로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숙종 때에는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재직할 때에는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고 죽은 뒤에는 그의 학문과 충성심을 높이 여겨 나라에서 ‘문충’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유품은 좌의정 시절 그가 입었던 중치막 1점과 정경부인으로서 그의 부인이 입었던 대례복 1점, 누비저고리 1점, 그리고 머리 장식물인 봉대 1점, 다리 1점, 도투락댕기 1점, 용잠 1점 등 모두 7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치막은 사대부들이 관복 속에 입거나 겉옷으로 평소에 입는 옷인 창의의 일종으로,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동정이 없고 소매가 넓고 길며 옆이 터져있는 흰 모시로 만든 겉옷이다.

대례복은 녹색으로, 어깨와 밑부분에 금실로 수놓은 넓은 단이 있고 안쪽은 붉은색으로 선이 둘러져 있다. 뒤가 앞보다 길고 소매가 길고 넓으며, 소매 끝에는 홍·황색의 줄과 덧댄 소매인 흰색의 한삼이 붙어 있다. 이 대례복을 입을 때 큰 머리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103㎝나 되는 가발과 자주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도투락댕기, 동에 금을 입힌 용무늬가 있는 비녀, 그리고 붉은색 바탕에 봉황무늬를 금박한 봉대 등은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누비저고리는 방한용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에 따라 복식은 양식이 달라지는데 이것들은 시대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복식 형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정선 수고당 고택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수고당길 110 (봉산리 216-1)   시 대 조선시대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옛집으로,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것이라 한다.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며, 90여 년 전에 안채를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었고, 동남향을 하고 있다. 1m 정도의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지었으며,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안채는 영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겹집형에, 영서·중부지방에서 일반적인 대청과 건넌방이 ㄱ자형으로 접하여 있다. 대청에는 모두 문을 달았고, 건넌방과 대청·안방부분에도 툇마루를 달아 외부와 연결을 주었다.

부엌의 앞면에서 광·외양간과 대문·사랑채가 ㄷ자형으로 이어졌다. 사랑채는 큰사랑·작은사랑·서함·대청·머슴방으로 구성되었고, 특히 외양간이 대문 오른쪽에서 돌출된 것이 특이하다. 사랑채의 대청에도 문을 달았고, 앞뒷면에 툇마루를 두어 시원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의 서쪽에는 별채인 수고당이 있으며, 대청·작은마루·다락·서고로 구성되어 있다. 수고당에는 외재 이단하 내외분의 옷(중요민속자료 제4호)이 있어 조선시대 의복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외에 각종 시문초고·교지 및 전적과 간찰·서화가 보존되어 있다.

4.정선 상유재 고택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9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3길 22-8 (봉양리 217-1) 시 대 조선시대

여말선초 제주고씨 중시조가 낙향 건립한 목조 건축물로 정선읍내 현존하는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물 정(井)자 형의 평면을 지녔으며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 건립되어 있다.

가옥구조는 전반적으로 양반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며 사랑채의 마루는 정자형으로 건축되어 있고 1921년경 가옥 일부를 중·보수한 적이 있다고 하며 대문 우측에는 수령 약600여년 된 뽕나무 2주가 도기념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근대에는 1934년 을해년 수해시 사랑채 보수가 있었으며. 1999∼2000년 8월까지 안채와 사랑채 전면 해체 보수와 토석담장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창고 등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이 에 행랑채 및 기타 부속 건물을 합하여 200여 평이 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고학규 고택에는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인 넓은 후원이 없고, 집 서쪽에 정원의 위치로 보이는 터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5.정선 강릉부 산삼 봉표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3호

지 정 일 1994.09.23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정선군 정선읍 가내길 100 (회동리 산1)  시 대 조선시대

봉표란 나라에서 일정한 곳의 출입을 금지하는 경계표로, 이 비는 정선군 정선읍 회동리에서 평창군 진부면 장전리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옛부터 이 지역은 인삼과 산삼이 많이 나는 곳으로 삼을 캐려는 사람들의 손길이 빈번했다. 이에 나라에서 삼의 주산지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를 세워 출입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성격의 봉표로서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유일한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비는 길쭉한 자연석을 옆면과 뒷면만 다듬어 사용하였다. 앞면에는 가로로 ‘강릉부삼산봉표’라는 글씨를 크게 새기고 오른쪽 옆면에는 ‘지명마항’, 왼쪽 옆면에는 ‘정선계’라는 작은 글씨를 새겼다.

비석을 세운 시기는『신보수교집록』형전 금제조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3년(1723) 경으로 추측된다.  

안채는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는 대청마루·웃방·안방·부엌이 있고, 대청마루에서 건넌방이 부엌에서는 정지방이 ㄷ자로 연결되어 있다.

6.정선 화암굴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33호

지 정 일  1980.02.26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화암동굴길 12-1 (화암리 534)

시 대  고생대

정선 화암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로, 총 길이는 약 500m이다. 입구에서 약 20m 들어간 곳에는 큰 공간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석회동굴의 빈 공간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직경 100m, 높이 40m에 달한다. 큰 공간 안에는 높이 7∼8m, 둘레 5m에 달하는 커다란 석순 2개가 있으며, 높이 25∼30m, 너비 20m 안팎의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이 벽을 이루고 있다. 동굴은 이 큰 공간을 중심으로 작은 굴들이 나뭇가지처럼 퍼져있는 모양이다. 작은 굴 안에는 성모 마리아상을 닮은 2개의 석순과 물웅덩이 등이 있다. 이 물웅덩이에는 이무기가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놀라 물속에 빠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정선 화암굴은 동굴의 형태나 동굴 안의 생성물 등이 장중한 것이 특징이다.

7.정선 비룡굴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34호

지 정 일  1980.02.26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비룡동길 208 (용탄리 754)

시 대  고생대

정선 비룡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로서, 총 길이는 1.2㎞에 달한다. 동굴은 가로 한 줄의 형태로 되어있으며 곳곳에 넓은 공간이 있는데, 동굴 속에 용이 살고 있어 홍수와 가뭄 등의 피해를 준다고 하여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동굴은 동굴 안에 흐르는 물이 없어 동굴 퇴적물의 생성을 볼 수 없는 퇴화과정의 동굴로, 꽃모양의 석화(石花)는 많이 발달하고 있으나 지하수의 침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석순이나 종유석 등은 빈약하다. 정선 비룡굴에는 들어가는 부분의 넓은 공간과 동굴 끝 부분의 물웅덩이에 화석으로만 볼 수 있다는 갈로와 벌레가 살고 있어 이름나 있다.

 

8.정선 고성리산성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68호

지 정 일  1994.09.23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의림로 414-10 (고성리 산319) 외 3필지

시 대  삼국시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의 고성리와 덕천리 경계지점인 해발 425m의 산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선군의 동쪽 5리 지점에 둘레 782척(237m), 높이 8척(2.4m)으로 돌을 쌓아올렸고, 그 안에 성황사가 있었으나 절반이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은 점판암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은 약 8m 정도이고, 안쪽은 약 4m 정도이다. 성벽의 바깥으로는 ㄷ자 모양으로 또 하나의 성벽을 튀어나오게 쌓아 방어력을 높였는데 폭은 5m, 길이 6m, 높이는 3.7m이다. 성 안에는 약 500여 평의 평지가 있는데 건물터로 짐작되며, 현재 출입구로 이용되는 곳에는 건물터의 기단으로 보이는 돌들이 약 15m 길이로 2단이 드러나 있다. 성의 남쪽에는 문터로 짐작되는 출입구가 남아 있으며, 성 안의 서남쪽 가장 높은 곳에 봉수대터라고 전하는 흔적이 있다.

9.정선 송계리산성 및 고분군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70호

지 정 일  1995.03.09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장찬동길 80 (송계리 산80)

시 대  삼국시대

송계리의 앞산 능선에 삼척시를 바라보며 지어진 성과 그 주위에 분포한 무덤들이다. 송계리산성은 강릉·동해지역으로부터 정선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삽당령과 백복령이 한 눈에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성은 경사가 심한 구릉의 동쪽면에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채운 내탁산성으로 비교적 일직선으로 쌓았다. 남쪽 성벽의 끝부분에서 구릉은 급격히 낮아져 다시 능선을 형성하는데, 이곳을 따라 4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모두 도굴되어 돌덧널(석곽)이 노출되어 있는데 1기의 대형무덤만 내부를 확인할 수 있다. 확인된 내부구조는 앞트기식돌덧널무덤(횡구식석곽묘)이다. 산성과 무덤은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산성 안쪽에도 무덤이 안치되어 있어 무덤이 산성보다 늦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산성과 무덤주변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들이 수습되었으나, 산성이 정확하게 지어진 때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9.정선 백전리 물레방아

종 목  강원도 민속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96.09.30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소금강로 2626-6 (백전리 601)

시 대  조선시대

백전리 마을에 있는 물레방아이다. 물레방아는 물의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동채방아와 흘러가는 힘을 이용하는 밀채방아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 방아는 동채방아이다. 물이 잠시 고였다 떨어지는 구유가 56개로 구성되어 있고, 물레는 지름 250㎝, 폭 67㎝의 크기이다. 50m 쯤 떨어져 있는 보(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에서 물을 끌어 사용하고 있는데, 보의 위쪽으로 용소(지하수가 솟아나오는 곳)가 마련되어 있어 풍부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물레방아는 방아틀(눌림대)을 한 대만 거는데 비해, 이 곳은 물이 넉넉하여 좌우 양쪽으로 두 대를 설치해 놓았다. 이 방아틀이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어 방앗간 내부에 설치된 방아공이가 서로 번갈아 오르내리며 곡식을 찧게 된다. 방앗간은 앞면 2칸·옆면 1칸의 규모로, 벽채는 나무판자로 되어있고, 대마(大麻)의 속대공으로 엮은 지붕을 씌웠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9세기 말경에 만들었다고 전하며 처음 만들 당시에는 주변에 6기가 함께 있었다 하나, 현재는 이 방아만 남아있다. 방앗간은 1992년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10.정암사 적멸보궁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   지 정 일  1972.02.01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 (고한리 2)   시     대 신라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모셔놓는 건물을 가리킨다. 정암사 적멸보궁은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영조 47년(1771)에 고쳐 지은 것으로 미루어 18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이곳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정암사에 수마노탑을 세워 안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불상이 없고 신중탱화 2점과 동종 1점을 보관하고 있다. 이는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사리가 있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적멸보궁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통도사, 법흥사, 상원사, 봉정암의 적멸보궁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불린다. 

  11.정선향교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비봉로 67-5 (봉양리 385)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정선향교는 원래 삼봉산 기슭에 있었는데, 조선 선조 38년(1605)에 대홍수로 향교가 없어져 몇 차례 옮겨 지었다가 영조 8년(1732) 지금 있는 자리에 세웠다. 대성전과 동·서무를 먼저 완성하였고, 그 다음해 학생들의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부속 건물을 완성하였다. 1960년 대성전을 새롭게 단장하고 명륜당과 다른 건물은 그 이후에 보수하였다. 배치는 대성전 앞 양쪽에 각각 동무와 서무가 있다. 대성전 앞면에는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명륜당 앞 양쪽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이며, 동재·서재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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