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정보] 우리고장 옛이야기(강원도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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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뵤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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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의 옛 이야기)

1.은항아리가 나온 은아릿골

옛날에 이서방이라는 아주 마음씨 착하고 효성심이 지극한 농부가 동산면 원창리에 살고 있었다. 보릿고개가 되어 먹을 것이 없어도 자기 내외와 자식들은 굶길지언정 늙은 어머님만은 잘 봉양하여 드렸다. 그리고 일 밖에 모르는 이서방이었다. 겨울이 되면 거의가 투전판을 벌여 가산을 탕진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이서방은 투전도 몰랐다.

"이서방, 투전을 하는 자네나 안하는 자네나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진데 자네 혼자 효자 노릇하나? 이 사람아 꽁생원 노릇하려면 뭣 때문에 남자로 태어났나?"

하고 사람들이 빈정거리고 따돌렸지만 이서방은 한번도 이렇다 저렇다 대꾸를 한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열심히 일해서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데만 정성을 쏟았을 뿐이다.

어느날 이서방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쉬는 사이에 잠깐 잠이 들어 버렸다.

"이서방, 그렇게 낮잠만 자지 말고 내말을 듣거라. 이서방은 마음씨가 하두 곱고 착해서 상을 준다. 네가 앉아 있는데서 왼쪽 골짜기로 백 발자국만 올라가면 큰 노송이 있을 게다. 그 밑을 파보거라."

산신령은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로 화하면서 사라졌다.

놀라 깬 이서방은 비로소 꿈인 줄 알았다. 이서방은 산신령이 계시해 준대로 찾아가 보았다. 과연 노송 한그루가 시원스럽게 솔바람 소리를 내면서 서 있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노송 밑을 파보니 은항아리가 나왔다. 평생에 처음 보는 은항아리였다. 흙을 털고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았다. 햋빛을 받은 은항아리는 반짝거렸다.

은항아리를 가지고 집에 돌아온 이서방은 늙으신 어머니와 집안 식구를 모이게 하고 은항아리를 얻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은항아리를 이서방이 얻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온 동리로 퍼져 나갔고 구경꾼들도 장사진을 이루웠다.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하고 효성심이 지극한 이서방은 큰 부자가 되었다. 번들번들 놀면서 투전을 일삼던 친구들도 언젠가는 은항아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바램 속에서 투전에 손을 떼고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고 훗날 은항아리가 은아리로 변하여 골짜기 이름이 되었다.

2.잣방산과 덕쇠의 효도

옛날에 덕쇠라는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고 있었다. 나이 스물이 되어도 장가갈 생각은 안하고 소처럼 묵묵히 일만 했다. 십년동안 받은 새경으로 논 열마지기 정도는 살수 있었지만 이참봉댁 머슴으로 물러 앉아 일만 하면서 어머니 한분만 모시고 걱정없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어머니가,

"덕쇠야, 어서 빨리 장가 가야지. 며느리도 보고 손주도 보고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

"어머니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논 스므마지기를 살때가지는 장가를 안 가겠어요. 가난한 주제에 장가를 가서 자식들 고생시킬 바에야 안가는 것만 못합니다."

"오냐, 너 좋을 때로 해라. 부지런히 벌어서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아야지. 내가 못나서 너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그러던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병을 얻어 몸져 눕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낫기는 커녕 병은 더해 갔다.

"신령님. 제가 모아 논 것이라곤 논 열마지기 살 돈 밖에 없습니다. 닷마지기가 없어졌지만 다들어가도 좋습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그저 어머니 병만 낫게 해주소서......." 덕쇠는 매일 새벽 정화수를 떠다가 장독대 옆에 놓고 빌었다.

어느날 해질무렵 한 노승이 찾아와 염불을 했다. 덕쇠는 성심껏 시주를 했다.

"고맙소이다. 젊은이.. 저기 보이는 저 잣방산 맨 꼭댓기에 올라가면 큰 잣나무 두 그루가 있을 거요. 바른쪽 잣나무에 매다려 있는 잣 세송이를 따다가 갈아서 그 물을 어머니께 먹이시오."

하고는 안개 처럼 사라졌다.

덕쇠는 산신령이 나타나서 계시해 주었음을 직감하고 산신령이 살아진 곳을 향하여 수없이 감사하다고 절을 하였다. 곧바로 잣방산을 치달려 갔다. 과연 잣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수 없이 많은 잣이 달려 있었다. 덕쇠는 신령님이 일러 주신 대로 세 송이만 따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갈라서 그 물을 어머니께 드렸다. 잣물 약을 드신 어머님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나았다. 오래간만에 어머니와 덕쇠는 웃음을 되찾았고 덕쇠는 더욱 열심히 일해서 새경으로 논 스므마지기를 샀다.

그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장가를 들어 아들 딸을 낳고 오래오래 살았다고 한다. 잣방산은 춘천시 남면 발산리와 한덕리 경계에 있는데 마치 송아지처럼 생겼다 한다.

3.장마에 떠내려온 산

부래산(서면외도) 서면 신매리에 있는 고산은 모랫벌 가운데 오똑하게 솟아 있는 조그마한 바위산이다.

편편한 모래벌판 가운데에 홀로 서 있어서 고산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장마 때 금성에서 떠내려온 것이다. 원래 금강산에 있던 것이어서 부래산이라고도 부른다.

금성의 관리가 해마다 춘천에 와서 세금을 걷어 갔다. 이 산 때문에 이곳 경치가 좋아 졌으니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며 집집마다에서 세금을 걷어 갔다.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 세금을 내어서 가난해지고 이에 따라 고을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 졌다. 이에 수령은 고민에 빠져 병석에 누웠다.

그제서야 수령의 어린 아들이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금성에서 세금을 받으러 온 관리에게 어린아이가 대들었다.

"저 바위산이 깔고 앉은 자리세를 내세요. 그리고 저 바위산은 춘천에는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 가세요."

그후로는 아무도 세금을 받으러 오지 못했다.

4.장 수 못

옛날에 신북읍 유포리에 정씨라는 아주 무지무지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노랭이로 소문이 나서 머슴들의 새경을 몇 년이 밀려도 주지 않았으며, 이웃이 흉년이 들어 굶어 죽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거지나 중이 와서 동냥을 달라고 해도 일절 주지 않았다.

또한 심보도 고약하여 외부인이 샘밭을 지날 때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보내줬어도,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잡아다 볼기를 치고 돈을 빼앗아 권세를 부렸다. 말을 타고 지나다 정부자네 종놈들한테 걸려들면 무조건, "샌님, 저기 말을 타고 갑니다." 그러면, "양반 앞에 말을 타고 가는 놈을 붙잡아라." 그리고는 붙잡아다가 볼기를 쳐서 돌려 보내곤 했다.

어느날 아침에는 중이 목탁을 치면서 시주를 왔는데 정부자가 이를 대청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중이 문턱을 서서 뚝닥거리며 가정의 번영과 안영을 위해 부처님께 귀의하라고 말하며 시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자가 중에게 다가가서는,

"원 별 미친놈의 중을 다 보는군. 내가 언제 부처님 덕으로 살았나? 난 누구에게 공짜로 얻어 이렇게 살지는 않아. 내가 벌어서 내 입에 풀칠할 뿐이야. 그리고 남에게 공짜로 준 일 없으니 썩 꺼져!"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중은,

"정부자님, 그럼 시주는 그만두고 지금 몹시 시장하니 요기나 시켜 주시면 왕생극락하도록 빌겠으니 자비를 베푸십시오."

라고 중이 청하자 정부자는 종에게,

"거기 쇠똥가래를 이리 줘라."

종이 쇠똥가래를 주인에게 넘겨주자,

"너 같은 놈 쌀 주기는 아깝고 이걸 가져 가거라."

하고 정부자가 쇠똥을 한 삽 퍼서 중에게 내밀자 중은 바랑을 썩 내밀며,

"아이구 정부자님 그것도 감사합니다."

하고서 쇠똥을 받아 등에 짊어 메고 다른 집 시주도 하지 않고 휭하니 갔다. 이때 며느리가 부엌에서 쌀을 씻다가 시아버지 하는 양을 보고 생각다 못해 시아버지 몰래 씻던 쌀을 한 바가지 들고 중 뒤를 따라갔다.

"스님! 스님!"

며느리가 부르는 소리에 중은 뒤를 돌아봤다.

"부인, 왜 그러시요?"

숨을 헐덕이며 며느리가 중에게 쌀이 든 바가지를 내밀며,

"스님, 용서하세요. 저의 아버님의 성품이 워낙 고지식하셔서 스님을 푸대접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버님 몰래 가지고 나왔으니 이것을 받으시고 저의 아버님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하니까, 중이 가만히 생각하기를 '며느리는 착한 며느리인데 주인이 심보가 고약하곤' 하며,

"여보, 부인!"

"예!"

"당신 집에 화기 미칠 텐데, 살려면 지금 나를 따라 오시오. 단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뒤를 보면 후회하게 될 것이오."

하며 화천 오음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향하여 부지런히 걸었다.

며느리도 중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며느리가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두당탕퉁탕'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등 뒤의 마을쪽에서도 꾸르릉하고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무심결에 뒤돌아본 며느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집은 이미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거센 물이 소용돌이 치면서 막 지붕까지 삼키고 있었다. 며느리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며느리는 그 자리에 뒤를 돌아다보는 자세로 선 채로 바위가 되어 버렸다. 지금 유포리에 있는 아침못은 바로 그때 생긴것이다. 하루아침에 생겼다고해서 사람들은 그곳을 아침못이라 부른다.

5.죽림동의 효녀 처녀 우례

신라때 춘천땅에 우례 모녀가 살았다. 어머니가 어느날 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일어나면서 세차게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우례는 산으로 나물캐러 간 어머니는 근심이 되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려 근심이 태산 같았다.

한편 나물캐러 간 어머니는 비 피할데를 찾아 허둥대였다. 나물 다래기를 옆에 끼고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산비탈을 헤매였다. 잘못하여 칡넝쿨에 발이 걸려 정신없이 넘어져 있었다. 그때 바위가 굴러 내려 쓰러진 어머니를 쳤다. 우례 어머니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를 찾아 나선 우례는 폭우를 무릎쓰고 이 골짝 저 골짝 차장 헤매면서 어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날이 세었다. 새 소리에 정신이 든 우례 어머니는 사방을 둘러 보다가 자기 옆에 우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흔들어 깨우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우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모녀가 서로 얼싸안고 반가움에 울음을 터트렸다. 앞가슴과 넙적다리께가 피로 물들어진 큰 상처를 보고 우례는 치마폭울 뜯어 상처난 곳을 대충 처매고는 어머니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례는 그날부터 바느질과 품팔이를 하면서 정성으로 어머니의 병구환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이 갈수록 더해 갔다.

한숨으로 날을 보내던 어느날 꿈속에서 백발 신령이 나타나 앞일을 계시해 주고는 사라졌다.

"남쪽 서라벌에 가면 인삼이라는 신기한 약이 있을 터이니 일 첩만 다려 드리면 쾌유 하리라."

이튿날 우례는 행장을 수습하고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라벌로 떠났다. 서라벌의 약방이란 약방은 모조리 뒤졌다. 그러나 인삼 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한 약방 영감이

"서라벌의 어느 귀인이 죽어가는데 그 영혼을 시중들 처녀를 구한다고 한다. 그 댁을 찾아가 순장을 승낙하면 인삼을 줄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었다. 우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례는 약방 영감이 가르쳐준 댁을 찾아가 순장을 승낙하고 인삼 열 첩분을 얻어 어머니께 인편으로 보내었다. 인삼을 다려 먹은 어머니는 약효가 있어 쾌차 하였고 우례는 순장되어 죽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이 날이나 저 날이나 우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어머니는 지쳐 그만 실성해 버린나머지 어느날 집에다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타 죽고 말았다.

그후 불 탄자리에 죽순 하나가 솟아 났다. 이곳에 한 그루 대나무가 퍼지고 퍼져서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동리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우례의 애절한 효성의 화신이라고 하면서 서로 본볻기를 다투었다. 죽림동이 바로 이 모녀의 슬픈 전설이 깃든 곳이라고 전해온다.

6.호인이 오면 흔들리는 고개

병자호란 때의 이야기이다. 춘천 회동(지금의 신북읍 용산리)에 무작개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이돌봉은 군대에 징집되어 나가고 시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어느날 무작개가 산고개를 넘고 있는데 호병(청나라 군사)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덮쳤다. 무작개는 사력을 다해 버티면서 머리로 호병의 턱을 치받아서 호병의 이를 부러뜨려 놓았다.

호병은 자기 이가 부러진 보복으로 무작개의 머리가죽을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또다시 겁탈하려고 대들었다. 이에 무작개는 있는 힘을 다하여 호병의 국부를 움켜쥐고 죽어라 늘어졌다. 몸부림치던 끝에 간신히 무작개의 손을 뿌리친 호병이 이번에는 칼로 무작개의 손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리고는 또다시 겁탈 하려고 대들었다.

두 손이 잘려나간 무작개는 입으로 호병의 코를 물어뜯었다. 호병은 자기의 코가 잘려나간 보복으로 무작개의 입을 돌로 으깨어 버렸다. 그래도 무작개는 펄떡펄떡 뛰었다. 호병은 무작개의 몸을 토막내어 고갯길에 묻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땅이 들썩거렸다. 그것을 본 호병은 혼이 나가 죽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의 되소금(호염)장수가 춘천으로 소금을 팔러 왔다. 그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으려 하자 이 고개가 다시 들썩거렸다. 청나라 소금장수는 당황하여 소금짐을 뒤엎어 놓고 미쳐버렸다.

그 후로는 소금장수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이 이 고개를 넘으려 하면 사정없이 이 고개가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이었다. 이 고개가 바로 신북읍에 있는 뜨내리재(부심치)이다. 뜨내리재는 마적산 줄기에 있다. 마적산은 마작산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무작개의 이름을 따서 무작산이었다고 한다.

7.등선폭포

옛날 한처녀가 병으로 몸져 누워있는 어머니 병환을 고쳐드리기 위해 등선폭포에서 백일 정성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열심히 정성을 다한 것을 하늘도 아시는지 백일째 되는 날에 어머니 병이 다 나았다. 그 후 효녀는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선녀가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다른 전설은 옛날의 가난한 나뭇꾼 총각이 이 곳에서 목욕하는 선녀의 옷을 훔쳐 가지고 와 선녀로 하여금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자기와 결혼하여 두 자식을 얻으면 그때 선녀옷을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녀는 나무꾼 총각과 결혼을 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선녀가 두 자식을 두었으니 하늘로 올라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선녀옷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제야 안심한 남편은 숨겨 놓았던 옷을 찾아 보여 주었다. 부인은 그 옷을 입어 보고는 양 겨드랑이에 자식 하나씩 끼고 그만 하늘 나라로 올라가 버렸다.

나무꾼은 그후 실의에 찬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꿈에 하늘에서 선녀들이 타고 올라갈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꾼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춘천시 서면 덕두원에 있는 등선폭포가 바로 그 폭포이며 일명 경천폭이라고도 부른다.

8.부모 위해 송자을 삶은 효자

효자동에 '효자' 라는 단어가 동네 이름으로 쓰이기 전, 옛날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홀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다. 그런데 홀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우시게 되었다. 총각은 열일을 제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다 드렸다. 그러나 홀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깊어만 갔다. 어머니의 병구완에만 전심하느라 총각도 날로 여위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은 지치고 지쳐 어머니 옆에서 잠이 들었다. 구름이 몰려와서는 흩어지며 하얗게 센 머리를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노인은 또렸하게 말했다. "대룡산으로 가거라. 골짜기에 시체 세 구가 있을 것이다. 시체중 가운데 시체의 목을 잘라다가 푹 고아서 어머니께 드려라." 말을 마치고 노인은 사라졌고 총각은 잠에서 깼다. 그날 저녁 총각은 어둠 속에서 골짜기를 헤메다가 드디어 시체 세 구가 누워 있는 곳을 찾아냈다. 총각은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 가운데 시체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것을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가마솥에 넣고 삶았다. 한밤중에 시체의 머리를 삶은 물을 마시고 어머니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튿날 가마솥을 다시 열어보니 산삼뿌리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동내면 거두리는 그때 그 총각이 시체의 머리를 들고 온 곳이다. 처음에는 거수리였었는데 후에 거두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원기를 회복한 어머니는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총각은 다시 대룡산으로 갔다. 그러나 한겨울에 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산골짜기에는 눈보라만 휘몰아치고 있었다. 총각이 추위에 떨며 지쳐 있을 때 맞은편 골짜기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흰 눈 속에 다홍빛이 뭉텅이 지어 환상처럼 어른거렸다. 총각이 기운을 차려 달려가 보니 그것은 바로 딸기였다. 총각은 기쁨에 겨워 합장배례하고 딸기를 땄다. 내려오던 중 눈보라치는 캄캄한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둠 속에서 두 눈에 빛을 발하며 호랑이가 나타났다. 총각은 정신을 차리려고 기를 썼으나 목이 타고 온몸이 오싹 해지는 것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호랑이는 온순한 몸짓으로 총각 앞에 와 엎드리고는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호랑이는 총각을 등에 태우고 총각의 집으로 데려다 주고는 사라졌다.

이러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그 총각이 사는 마을에 효자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마을을 효자문 거리라고 불렀다. 이곳이 바로 춘천의 효자동이다. 효자정문은 지금의 효자동 춘천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이 전설의 주인공은 조선시대의 반희연 이라 한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병환에 드셨을 때. "제가 앞으로 살 햇수 만큼 저에게서 떼어 내어 그만큼 더 어머니를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9.공주를 사랑하다 뱀이 된 총각

옛날 옛적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

어느 미천한 가정의 총각이 가엾게도 임금의 딸 공주를 사랑했다. 비록 그의 가정이 미천하기는 하지만 그 총각의 순박한 진실성에 공주도 마음이 차츰차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임금은 당황했다. 임금은 미천한 총각으로부터 공주를 떼어 놓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그 총각이 공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집념은 그만큼 강했다. 이에 임금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미천한 총각을 죽여 버렸다. 그 후 어느 날 밤 공주가 혼자 있는 방에 커다란 뱀이 기어 들어왔다. 공주는 놀라서 질겁을 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뱀은 공주의 몸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칭칭 감아 올라갔다. 그리고는 영영 공주를 풀어주지 않았다. 뱀은 대가리를 바로 공주의 얼굴 앞에 대고 쏘아보며 혓바닥을 날름날름 놀렸다. 공주가 음식을 먹으려 하면 뱀이 먼저 빼앗아 먹기도 하였다.

공주는 그 뱀이 바로 자기를 사랑했던 총각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금에게 죽임을 당한 미천한 총각이 죽어서 뱀이 된 것이다. 뱀은 끝끝내 공주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공주는 날로 여위어 갔다. 임금은 나라안에서 유명한 점장이나 의원들을 불러 보았으나 허사였다. 온갖 방법이 다 허사로 돌아가자 임금은 공주에게 시키기를 중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빌라고 하였다. 중국의 명산대찰은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공주는 고려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빌기로 하였다. 고려 땅에 들어와서 공주는 지금의 강원도 춘천에 있는 청평사(淸平寺)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청평사 입구에 이르러 공주는 뱀에게 말하였다.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올 테니 잠깐만 나를 풀어다오.”

중국에서는 전혀 말을 듣지 않던 뱀이 이번에는 이상하게 말을 잘 들었다. 공주는 절에 들어가 가사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절 입구에서 공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뱀은 아무리 기다려도 공주가 나오지 않으므로 절로 기어 들어갔다. 뱀이 회전문에 이르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울리며 폭우가 쏟아졌다. 뱀은 회전문 앞에서 회전하여 물에 쓸려나갔고 공주는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 회전문이 지금도 남아 있고 청평사 계곡의 공주폭포는 그때 뱀이 쓸려간 폭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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