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시/정보] 동해시 쇄운동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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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슬님의 댓글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의 문화재)

 

1.용산서원 학규현판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8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효자로 583 (쇄운동 200-6) 용산서원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31년(1705) 이세필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삼척의 학문을 일으키기 위해 용산서원을 창건하고 학규 21조를 제정하여 이것을 손수 써서 판각한 것으로, 오늘날의 교칙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학규현판은 피나무판으로 가로 156㎝, 세로 48㎝의 크기이다.

 

용산서원은 그후 고종 5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가 1966년 이곳의 사림들이 유서가 깊은 서원이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건물로 새로 지어놓았다.

 

이 현판의 글씨는 글자 모양이 가장 반듯한 해자로 썼고 이것을 음각하여 교생들이 지키도록 문에 걸어 놓았으며, 표제를 ‘학규’라 하였다.

 

이것은 관학인 향교의 일정한 규범과는 다른 사학인 서원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어 서원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동해 용산서원 전적류 일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지 정 일 2007.01.19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효자로 583 (쇄운동 200-6) 용산서원  시 대 조선시대

용산서원은 조선 숙종 31년(1705) 삼척 부사 이세필이 창건하여 교학에 힘썼으며, 그 뒤 여러번 중수되어 오다가 고종 5년( 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던것을 1966년 이 고장에서는 유서 깊은 서원이라 하여 이곳 사림들에 의하여 1966년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동해 용산서원 소장 전적류는 모두 8점으로 동해서원의 운영에 대해 규정한 전적들로, 18세기 삼척지방에서의 생활사와 교육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높다.

 

 

3.동해 문희주 효자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 시 대  일제강점기

문희주는 호를 천곡이라 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 부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니 문효자는 곁을 떠나지 않고 3년간 병간호를 하며 행여 부친의 마음이 상할까 극진한 효성으로 즐겁게 해 드렸다. 부친의 병환을 끝내 고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함을 깊이 한탄하고 슬퍼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그는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생시와 같이 묘소를 돌보았다.

효자각은 1910년 문희주의 효행을 기리기 우하여 건립되었으며, 전면에는 효자문이라고 쓴 현판을 걸었고, 내부에는 ‘효자조대태부남평공희주지려'라고 쓴 비석을 세웠는데 뒷면에는 기유팔월이라고 썼다. 내부에는 표창문이 걸렸는데 끝에 ‘성기이천사백칠십년 공부자성적도오윤행실중간소 도유사 정성묵’ 이라고 하였다.

 

 

4.연일정씨 열녀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 시 대  조선시대

이 비각은 42번 국도에서 백봉령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나타난다. 비각의 주인공은 ‘연녀 정씨는 연일 사람 수억의 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행동이 지극히 훌륭했다.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 섬기기를 천정에서 부모를 섬기듯 했다.

열녀 정씨는 김한경의 부인으로 평소 남편과 시부모를 정성껏 섬겨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22세때 남편이 병석에 눕게되니, 정씨부인은 밤마다 목욕재계하고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며 좋다는 약을 구해 다 써보고 용한 의원을 모셔오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남편의 병에 차도가 없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 라 그 피로 약을 만들어 공양하였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뒤 남편이 병으로 죽자 자기의 부덕과 정성의 부족으로 죽었다고 한탄하며 조용히 의절하여 죽은 남편을 따랐다 한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 때에 여각을 세웠다. 여각은 취병산 아래에 있었는데 정조 정유년(1777) 홍수때 무너져서 정조 신해년(1791)에 취병산 북쪽에 증건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여각의 기문이 있다.

 

 

5.최용채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 시 대  조선시대

이 효자각은 삼화동으로 올라가는 국도 42번선의 우측 길건너 우무골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용채’는 이름을 영채로 고쳤으며 자는 성언, 강릉 최씨 생원 도봉의 아들인데 쇄운동에서 살았다.

최용채는 자라면서 부모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으며 부친이 병석에 눕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극진히 병간호를 하였다. 또 부친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3년간 더 시묘살이를 하였다.

효자각은 효행이 지극한 용채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30년(1893)에 건립되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형식으로 지어졌다. 비각의 정면에 ‘효자강릉최공용채지려’의 현액이 있고, 내부에 효자비와 졍려기, 이건기, 중수기 등의 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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