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군/정보] 횡성군 공근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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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군 공근면의 문화재좀 찾아주세요...
요약하고,언제 만들어 졌는지.. 그런 것들 중요한 내용은
꼭 적어주는 센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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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스님의 댓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의 문화재)
1.상동리 석불좌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495-1 시 대 통일신라시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에 있는 상동리 3층석탑과 나란히 있는 돌로 만든 불상이다.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은 입가에 미소를 띠어 자비스럽게 보이는데 신라 전성기 불상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당당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무릎 위에 올려 왼손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자연스런 손모양,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의 유려한 옷주름 등에서도 역시 이상적 사실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좌는 8각 연화좌인데 하대는 땅에 묻혀서 확실한 모양을 알 수 없으나, 연꽃을 새긴 원형의 상대와 각면에 안상을 새긴 중대는 전형적인 9세기 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원만한 인상, 부드러운 옷주름, 8각의 대좌 등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아 8세기의 불상양식을 잘 계승한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인다.
2.상동리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1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495-1 시 대 고려시대
성덕사의 옛터에 석불좌상과 함께 남아있는 3층 석탑이다.
기단은 아랫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3층 몸돌은 잃어버려 없어진 것을 탑을 복원하면서 새로이 끼워 넣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층과 2층은 4단씩, 3층은 3단으로 새겼으며, 낙수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위로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붕돌의 너비가 좁고 두꺼워지는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3.육절려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5호
지 정 일 1981.08.05 소 재 지 강원 횡성군 공근면 공근남로169번길 92-7 (매곡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숨진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한 그의 일가족 6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예원은 조선 선조 26년(1593) 왜적의 2차 침입 때 적은 군사와 무기를 가지고 진주성을 굳게 지키다 결국 전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와 큰아들 계성, 며느리 노씨 그리고 어린 딸도 밤낮으로 군사들을 도우며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 아들 계철은 강에 몸을 던졌으나, 왜적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3년 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숙종 4년(1678)에 서씨 가족의 충절이 밝혀진 후, 숙종 18년(1692) 일가족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 정려각을 세웠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10개의 원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네벽은 붉은색을 칠한 긴 나무막대를 돌려 세웠다.
4.전통자기도공
종 목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89.05.01
소 재 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창봉길 32 (창봉리 533-1)
예능보유자 장송모
전통자기도공은 전통적인 기법으로 자기를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신석기부터 흙으로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10세기 초에는 중국 당나라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상감청자를 만들게 되었다. 그 후 몽고의 침입으로 청자 제작기법은 쇠퇴하고, 조선 전기에 분청사기와 조선백자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을 거치면서 가마가 파괴되고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면서 도자기술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는데, 다행히도 광주관요가 유일하게 남게되어 조선백자를 중심으로 하는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전통자기의 제작과정은 제토 · 성형 · 조각 · 시유 · 소성 등의 과정을 거친다. 제토과정은 돌을 깨뜨려 가루로 만든 뒤 흙을 풀어서 섞은 후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수비과정을 거친 다음 바탕흙(태토)을 짓이긴다. 짓이긴 흙을 물레에 올려 물건의 형태를 만들고, 성형이 끝나면 말려서 칼로 문양을 새긴다. 이어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바른 뒤 재벌구이를 마치면 작품완성이다. 제작용구는 물레·방망이·지래박·수레·물가죽·쇠홀태·목홀태·전칼 등이 쓰인다. 전통자기도공은 한국의 미를 표현하는 전통공예기술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전통도자기 제작기능을 이수한 강원도의 장송모씨가 강원도자문화연구회 설립을 통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5.정현구 효자 정려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학담리
시 대 조선시대
정현구 효자 정려문은 공근면 학담리 공근중학교 뒤편에 있다. 정현구의 본관은 초계로 팔계군 정종영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남달리 지극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3년 동안 새벽마다 묘소를 찾았으며, 삭망일에는 성묘 후에 묘소를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91년(고종 28년)에 정려되었다고 한다. 현판의 크기는 가로 186cm, 세로 49.5cm이다. 정려문의 1966년 5월에 중수 되었다.
6.청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부창리
시 대 현대
공근면 부창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각으로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유봉수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951년에 건립하였다.
효자 유봉수는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어려서부터 주위의 칭송을 받아 온 효자였다. 어머니 김씨가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 유씨의 정성과 간호에도 보람없이 사경에 이르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소생케 함으로써 팔순이 넘도록 장수하였다 한다.
이를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전주 유씨 문중과 주민들이 이 각을 세우고 청원각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