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정보] 원주시 소초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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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소초면의 문화재좀 찾아주세요...

요약하고,언제 만들어 졌는지.. 그런 것들 중요한 내용은

꼭 적어주는 센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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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스님의 댓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의 문화재)

1.원주 흥양리 마애불좌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산1  시 대 고려시대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에 있는 입석사의 큰 길로부터 서북 방향으로 30m 떨어진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불상의 얼굴은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으며, 몸체는 낮게 새겨져 있다. 불상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균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얼굴은 풍만한 모습이며 전체적으로 눈·코·입의 비례가 좋다. 양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다소 두꺼운 편인데, 옷주름은 간략화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 앞부분에 놓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무릎 폭이 비교적 넓어 안정감을 준다.

불신의 주변에는 둥근 머리광배와 타원형의 몸광배가 있으며, 연꽃잎이 2중 새겨진 대좌(臺座)가 있다. 대좌 아래 왼쪽에 9자 정도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풍화가 심하여 읽기 어려운 상태이다.

불상의 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원주 수암리 마애삼존불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산254-2  시 대 고려시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신양 마을 뒤의 야산 바위에 선으로 조각한 3존불상이 있다. 연꽃무늬 대좌의 중앙에 본존불이 있고 양 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다. 얼굴 부분은 모두 마모가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양 어깨에 걸친 옷자락에는 굵은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이 보인다. 손은 파손이 심하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양쪽의 보살상은 각각 둥근 머리광배를 갖고 있다. 왼쪽의 협시보살은 문수보살상으로 추정되는데, 부분적으로 선이 남아 있을 뿐 손상이 심해 모습은 알 수 없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보현보살로 추정되며,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았고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상체는 짧고 하체는 길어서 곡선미가 돋보인다.

비로자나삼존불 형식과 긴 하체의 표현은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이로 보아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3.원주 구룡사 보광루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지 정 일 2004.01.17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시 대 조선시대

보광루는 치악산 중턱에 위치한 구룡사의 불이문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구룡사의 진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밑을 지나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운 뒤에 그 위로 누각형 건물을 올렸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며,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한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누마루는 우물마루인데, 한때 마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4.원주 구룡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지 정 일  2015.11.06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시 대  조선시대

2014년 8월 개복한 조성발원문에 “강희27년병인4월일”이라는 조성연대가 적혀있다. 1686년 4월에 현 횡성군 봉복사 반야암에서 화원 금문ㆍ대웅ㆍ법휘가 관음보살로 조성하였다. 봉복사 반야암은 670년(문무왕 10)에 창건되어 1748년(영조 24)에 천진암과 같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외 1911년 발견된 개금발원문 내용으로 보살상은 1715년, 1767년, 1887년, 1911년까지 총 네 차례 개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반야암이 폐사된 후 1911년 이전 구룡사에 불상이 옮겨 봉안되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개금발원문에 불화의 제작 현황까지 정확하게 적어 놓아 조선말기 불교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87년 개금과 더불어 후불도ㆍ원불ㆍ신중도ㆍ현왕도ㆍ독성도가 그려졌고, 1911년 개금 시에 입석대(立石坮)에 봉안된 아미타불 개금, 본방 신중도, 미지산 용문사 신중도가 동시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을 제작한 수화승 금문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조각승으로, 수화승 혜희와 1655년 충북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1662년 전남 순천 송광사 관음전 목조보살좌상, 1666년 경기 안성 봉덕사 목조여래좌상을 조성하였다. 또한 1668년에 수화승 승일과 경북 김천 직지사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675년에 수화승 혜희와 전북 김제 금산사 대장전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후 금문은 1703년 5월에 경북 상주 운봉사 괘불도[문경 김룡사 소장] 조성 시 복장시주로 참여하고, 1703년 6월에 수화승으로 부산 기장 장안사 석조삼세불좌상 중수, 1706년 수화승으로 경기 안성 칠장사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원주 구룡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조각승 금문이 제작한 기년명 보살상이고, 그는 법령 → 혜희 → 마일, 금문, 청윤 → 세균으로 이어지는 조각승 계보에 속한 조각승으로 파악된다.

불상의 현상은 귀 양 옆으로 관대가 휘날리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에는 화염문과 구름무늬, 꽃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다. 이들 장식은 모두 따로 제작하여 보관에 부착한 것이다. 방형의 얼굴에 코가 큼직하며, 이목구비가 단정하다. 머리에서 내려온 보발은 귓바퀴를 가로질러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양 손은 따로 만들어 신체와 분리되며, 수인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을 결하고 있다. 양 손은 신체에 비하여 큰 편이다. 보살상은 천의가 아닌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이처럼 보살상이 가사를 입고 불상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 보살상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화려한 보관, 방형의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에 큰 코, 배 앞의 W자형 옷자락, 양 무릎 앞으로 부채처럼 퍼진 옷 주름 등은 이 보살좌상이 조선후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재의 대좌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복장유물은 원문, 개금원문, 다라니, 묘법연화경, 범자진언, 후령통이 있다.

 

5.학곡리 황장금표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30호

지 정 일 1979.05.30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409 (학곡리 1061)  시 대 조선시대

치악산 내의 구룡사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황장목의 보호를 위하여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하는 경계의 표시이다.

 

황장목은 나무의 안쪽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질이 좋은 소나무로서 왕실에 올리는 특산물 중의 하나이며, 궁에서 신관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치악산은 질이 좋은 소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관아가 가까이 있어 관리도 유리하였고, 한강의 상류에 자리하여 뗏목으로 한양까지의 운송이 편리하여 전국에 있는 60여 개소의 황장목 보호림 가운데에도 이름난 곳의 하나였다.

 

금표는 작은 바위의 한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황장금표’라는 글귀를 새긴 모습으로, 최근에 ‘금’자와 ‘표’자 사이의 윗부분에 ‘동’자가 새로이 발견되었다. 구룡사 입구에서 100여m 정도 내려가면 도로가의 흙속에 일부가 묻혀 있는 1기의 금표가 더 남아 있는데, ‘금표’의 글귀 윗부분에 ‘외’자가 보인다.

 

이렇듯 보호림 구역을 만들어 표시를 해놓는 제도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생겨난 것으로, 강원도에는 이곳 외에도 인제, 영월, 양양 등에 있다. 

 

 

6.입석사 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9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소초면 황골로 707 (흥양리 1784)  시 대 고려시대

입석사에 있는 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세워 둔 것인데, 2기의 석탑 부재가 섞여 있는 듯 하다.

 

부재들은 두툼하고 네모난 연꽃받침이 2개, 얇은 연꽃받침이 1개, 각 면에 기둥 모양을 새긴 탑신의 몸돌이 3개, 네모난 판돌이 4개이다.

 

연꽃무늬 조각이나 탑신의 몸돌을 다듬은 솜씨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이 왕위에 오른 후 어린 시절의 스승 운곡 원천석을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며 나타나지 않으니, 그를 생각하며 이 탑을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 내려온다.

 

 

7.원주 부흥사지 석탑재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2호  지 정 일 1998.04.18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1164-4  시 대 고려시대

부흥사터에 흩어져 있던 탑의 일부분들로, 아래층 기단과 위층 기단 일부, 탑신의 몸돌 1개, 지붕돌 2개를 수습하여 민가 옆에 모아 놓았다.

위층 기단은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 두었고,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8부신중(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여덟무리의 신)을 각각 조각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네 귀퉁이에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위층 기단의 신상 조각 머리부분에 특이하게도 둥근 두광을 새겨 놓아 눈길을 끄는 탑으로, 원주지역의 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위층기단의 조각양식과 탑신의 짜임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8.원주 교항리 석조불두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교항리 1019  시 대 고려시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교항리 도로변의 큼직한 화강암 바위 위에 불상의 머리 하나만이 놓여있는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는 평장리와 교항리의 경계가 되는 언덕 위에 있는 암벽에 있었던 것으로 불상의 몸 부분을 조각하고 그 위에 머리 부분만을 올려 놓았던 것인데,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불상의 머리만 현재 위치로 옮겼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은 서툴지만 그런대로 불상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각부의 조각 양식 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9.원주 구룡사 아미타설법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0호

지 정 일  2014.03.07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시 대  조선시대

구룡사 아미타설법도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입상을 포함하여 4구의 보살상이 협시하고, 그 바깥쪽에 사천왕이 각각 2구씩 배치되어 있으며 화면의 위쪽에는 가섭과 아난존자를 포함하여 여덟 제자상이 배치되어 총 17존상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구성은 단순한 편이다.

아미타불의 팔대보살을 4대보살로 줄이고, 여래의 십대제자를 여덟 존자로 줄였지만 형태의 표현이나 배채기법이 안정적이고 금니도 풍부하게 사용되어 그림의 격을 높여준다.

불화의 전체적인 구도와 배치가 안정적이고 화기를 통해 제작자와 제작시기(1887년)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조선후기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승려 화사들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10.원주 구룡사 금고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지 정 일  2014.03.07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시 대  조선시대

구룡사 금고는 중앙의 당좌구를 중심으로 6개의 동심원을 두르고 있는데, 동심원 사이의 간격을 다양하게 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중앙 당좌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는 고려시대 금고와 달리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의 금고는 중앙 당좌구에 문양이 표현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대신 동심원의 간격이 가장 넓은 구획에 범자문을 새겨 넣고 있다. 범자는 둥근 원 안에 새겨져 있는데, 6개의 범자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있다.

금고의 측면에는 금고를 매달기 위한 3개의 반원형 고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두 줄의 양각된 선으로 측면을 장식하고 있다. 통상 측면이나 후면 구연부에는 금고를 만든 시기, 사명, 발원문, 제작자, 무게 등 금고의 제작과 관련된 명문을 기록한 경우가 많지만, 구룡사 금고의 경우 아쉽게도 명문은 새겨져 있지 않다.

뒷면은 넓게 뚫려 있으며, 여러 줄의 동심원 자국은 금고의 제작기법과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처럼 당좌구역에 문양이 전혀 없고, 가장자리의 넓은 구획면에 6개의 범자문을 새겨 넣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 후기 금고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현재 강원도 지역에서는 1788년에 제작된 속초 신흥사의 금고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신흥사 금고는 전면에 동심원 문양과 측면의 띠만 둘려져 있고 무늬가 전혀 없는 단순한 형태의 금고이지만, 측면에 정확한 제작연대가 적혀 있어 구룡사 금고와는 차이가 있다.

금고의 범자문과 후면의 동심원 자국은 18세기 금고의 단정한 주조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강원도내에서는 희소가치가 크다.

 

11.구룡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시 대  신라

신라 문무왕 6년(66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자리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하여 현재의 명칭인 구룡사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치악산구룡사사적』에 따르면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강희45년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어 숙종 32년(1706)에 구룡사가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앞 좌우에는 서상원과 보광루, 적묵당, 심검당의 승사가 있으며 이밖에도 원통문, 국사단, 사천왕문, 범종각, 응진전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부도군이 있고, 또 구룡사의 전설을 말해주는 거북바위와 폭포아래에 용소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만든 황장금표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표식이다.  

 

12.입석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황골로 707 (흥양리 1784) 시 대  신라

소초면 흥양3리 산1784번지에 있는 입석사는 치악산 서남쪽 중턱에 있다. 자세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이곳에 와서 수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은 최근에 신축되었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일부 사용하여 복원한 3층 석탑이 있다.

본래 입석사는 입석대로부터 원주 쪽으로 약1km정도 떨어진 곳에 암자가 있던 것을 뒤에 현재 입석사 옆의 옛터로 옮겼다가 최근에 다시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13.경현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교항리 공산마을 시 대  조선시대

  이 공산 마을의 경현사는 1965년 건립 되었다. 이곳에 많이 거주하는 추씨집안에서 양지추씨의 시조인 고려 충렬왕대의 문신 로당 추적의 영정을 봉인 하였다. 이 사자에 봉안된 로당은 한문 교양서인 명심보감을 편찬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충렬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직사관,좌사간을 지냈다.

그 후 1298년(충렬왕 24) 환관이었던 황석량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인 합덕부곡을 현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서명을 거부하여 황석량의 무고로 순마소에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북계 용주의 수령을 지냈다. 충렬왕 말년에 안향에 의해 발탁되어 7품이하의 관리나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하였고 후에 승진하여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경현사는 공산 마을 안쪽의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치악산 비로봉이 눈앞에 바라다 보인다.

현재 이곳에는 '첨학제'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과 그 후면에 로당추적의 영정을 봉안한 경현사가 있다.

첨학제 건물은 신축 당시에 강원 감영의 내삼문과 중삼문을 헐어다가 지었다고 한다.

 

14.구룡사 대웅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구룡사 시 대  현대

신라 666년(문무왕 6) 의상대사가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와 얽힌 사연으로 구룡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며, 1706년(숙종 32)에 중건되었다.

대웅전은 앞면에서 보아 기둥 위에 주심포식 공포를 두고 주심포 사이에도 공간포를 2조씩 배치한 다포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이다. 공포의 외부는 앙설형이 중첩되어 있고 앙설에는 각각 연꽃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내부는 하나로 연결하여 당초 무늬를 새겼다. 불상 위에 있는 닫집이 중층인 것이 특징이다.

천장의 중앙부는 우물천장을, 둘레에는 빗천장을 가설하였고 연꽃·봉황·구름무늬·비천상 등을 채화하여 금단청과 함께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다. 이 불전은 공포 내·외부의 장식적인 조각솜씨와 구조수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6년 보수 단청하였다.

 

2003년 9월 30일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15.구룡사 부도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 (학곡리 1029) 구룡사 시 대 조선시대

구룡사 경내에 있는 부도군은 승려들의 묘탑을 모아 놓은곳을 말한다. 구룡사 원통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넓은 대지에 부도군이 있는 부도밭이 있다.부도군에는 묘탑 9기의 석조부도가 안치되어 있다. 모두 조선후기의 것으로 보이며 석종형과 석비형의 부도 이다. 9기 가운데 주인공이 명시된 것은 6기 이고 건립연대가 명시된 것은 2기뿐이다.

주인공이 명시된 부도군 중에서 제3기(세염당초운대사탑)는 을축 1745년 4월 일에 건립되었고 제8기(상파당보경대사 영주탑)는 석비형으로 영주탑 높이는 1.07m 이다. 숭정 후 세 번재 계사년(1773) 윤 3월 일에 건립 되었다.

부도군이 있는 곳은 구룡사 경내의 비교적 넓은 곳에 잘 보존되고 있으므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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