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정보] 홍천군 남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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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새우깡님의 댓글

(홍천군 남면의 문화재) 

 

1.양덕원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양덕원리 210-2,3  시 대 고려시대

무너져 있던 것을 다시 쌓아 놓은 탑으로,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커다란 자연석 위에 올려진 기단은 맨윗돌이 뒤집혀진 채 놓여 있다. 탑신부는 1층 몸돌만 한돌로 이루어져 있고, 1층 지붕돌부터는 지붕돌과 그 위층의 몸돌이 각각 합쳐져 한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뾰족하게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잇다. 하나는 어느 대사가 조선 태조(이성계)의 도읍지를 찾아 다니던 중 이곳을 지니다가 땅의 모양이 용의 형상이므로 머지않아 재앙이 미칠 것을 예상하여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절을 짓고 이 탑을 세워 재앙을 미리 막았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 석탑을 움직일 경우 마을에 재앙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2.이희명 효자정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유치리 시 대  조선시대

지금부터 약 2백여년 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오르면 태백산맥을 등줄기로 하여 요리조리 뻗어나간 크고 작은 산줄기들 사이에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마을에 이희명이란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은 가두독이라고 불리워졌으니 이 곳은 산꿩들이 많이 살며 그 꿩들이 날적마다 ‘까두독’소리를 내면서 평화로운 마을을 더욱 한가롭게 만든 유래라고 전하여 진다.

  갈남 (굴참나무)숲이 우거져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특히 가을이 되면 갈나무 잎들이 바람이 일적마다 수런거리는 소리며 아람이 든 도토리들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산여울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주어 가두독이란 이름이 붙여져 지금까지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마을에 희명이라는 소년은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효성이 지극하고 머리가 매우 총명한 어린이였다.가난한 살림에도 부모님을 도와 논과 밭에 나가 김을 매거나 산에 올라 나무 할 때에도 시간을 내어 서당에서 배운 글을 중얼거리며 복습도 하고 넓적한 바위 위에다 칡덩굴을 뜯어 글씨를 써 가며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나. 서당에서도 다른 아이들은 천자문을 몇 달을 배우거나 일년을 배워야 다 배우는데도 희명이는 불과 한 달만에 다 배우는 아주 명석한 소년일 뿐 아니라 이 마을 가난한 집의 어른들이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만 들어도 자기 부모님이 앓고 계신 양 바쁜 시간을 내어 산에 가서 약초를 캐다 드리거나 돌창 개여울을 뒤지며 미꾸라지와 버드장이를 잡아다 웃 어른들을 공경하는 효행이 지극한 소년이므로 마을의 어른들이나 아이들까지 칭찬이 자자한 아이였다.

이 소년은 몸도 마음도 바르고 성실하게 자라 19세의 어린 나이로 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그의 인품은 온 나라 안에 떨쳤으며 27세 되는 해에 임금님께서 부르시어 호조참판이란 높은 벼슬에 올라 임금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나라의 큰 일을 맡아 백성과 임금님을 위해 밤낮으로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던 중 시골(가두독)에 사시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임금님께 아뢰기를 “상감마마, 소신은 소신의 아비에게 효도를 못하는 주제에 어찌 상감마마를 바로 뫼실 수 있아오며 나라에 충성을 할 수 있으오리까? 마마 소신의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소신을 고향에 계신 아비의 곁으로 돌아가게 하여 자식된 도리를 다하게 굽어 살피옵소서" 하며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그의 덕행과 인품이 뛰어난 지라 나라의 일을 맡아 계속 일한 것을 거듭 부탁 하였으나 너무나 효성이 지극한 희명 참판의 굳은 마음을 임금님께서도 꺾지 못하시고 갸륵한 효성심에 탄복하시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높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병환으로 누워계신 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펴 드렸으며 호조참판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희명은 워낙 성격이 바르고 곧아 효성과 충성심만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었지만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으며 초가삼간인 오막살이 집에서 살았기에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할 약 한첩 살 돈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정성과 구할 수 있는 약을 몸소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형편이었다. 효자 희명은 아버지에게 좋은 것이라면 추운겨울이나 험한 산이라도 약초와 약물을 직접 구하여 정성껏 보살펴 중병이 낫게 되었다. 이 소식이 온 마을에 전해지고 전국에 퍼져 가두독마을에 효자가 탄생했다며 온 마을이 떠들썩 하였다.

그 후 임금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크게 상을 내리시고 효자 희명에게 격려를 하였으며 벼슬길에 다시 오르라는 명을 내리셨지만 한사코 마다하고 아버지께서 80세가 넘어 늙어 돌아가실 때까지 공경하며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효자 희명 뿐만 아니라 그의 친동생 희봉 역시 효심이 지극하여 두 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가두독마을 건너편에 아버지의 산소를 모시고 7년간이나 초막을 짓고 삼탕에서 목욕을 한 다음 아침 저녁으로 젯밥을 정성스레 만든다음 제사를 드렸다.두 형제가 늙어 세상을 떠난 다음 순조 대왕께서 그 효심을 갸륵히 여기시어 칙명을 내리시어 큰 아들 회명에게 -큰 효자 정문-작은아들 회봉에게는 작은효자정문을 짓게 하시어 오늘날까지도 매봉 위에 효자 형제의 효자각이 있어 이 곳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효심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3.이공소 효자정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남면 남로일리 시 대  조선시대

이 효자 정문은 조선경종 2년에 이 공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이공소는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여 7세에 효경을 읽고 11세에는 주역을 읽었다한다. 밖에서는 스스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적극 도와 주며 집안에서는 극진한 효자였다. 모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었을 때에는 이를 고쳐 드리고자 갖은 고생을 하며 애쓴 보람으로 여러차례 하늘이 돕는 일이 있어 어머니의 병을 고친바 있다.

이공소의 남다른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경종 임금께서는 이조판사에 명하여 이곳 정문을 짓게 하고 동덕낭의 머슴까지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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