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정보] 영월군 영월읍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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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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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의 문화재)

 

1.영월 장릉

종 목  사적  제196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산133-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2.영월 정양산성

종 목  사적  제446호  지 정 일 2003.06.02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1외 8필  시 대 삼국시대

영월 정양산성은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해발 430―565m)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 성은 문헌기록상 그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투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둘레 798보, 성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의 전체적인 평면모습은 서북쪽을 향하여 넓은 사다리꼴 또는 키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로서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에 달한다. 그리고 북서쪽에 자리잡은 정양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에 5개, 외성 내에 2∼3개의 차단벽을 갖고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매우 정교하게 쌓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벽만 해도 높이가 최고 11.5m에 달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산성 중에서 성벽 규모만으로 볼 때 최대로 꼽히고 있는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비교된다. 한편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이 남아 있다.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3군데에 다락문 같은 현문 형식의 문터가 있고, 성벽이 꺾어지는 3군데에서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 혹은 곡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월 정양산성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성벽과 문터, 곡성과 치성, 그리고 후대의 외성과 차단벽을 갖춘 유일한 산성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있다.

 

3.영월부 관아

종 목  사적 제534호

지 정 일  2016.03.08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중앙로 61 (영흥리 984-1) 관풍헌

시 대  조선시대

영월 객사와 관풍헌 및 자규루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이곳에 유배되어 노산군으로 강봉된 채 17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해진다.

세조 3년(1457)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게 되자 당시 영월부 객사의 동익헌이었던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루(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이 배어 있는 시를 지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1457년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등이 단종복위를 시도하다 발각되자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사약을 내려 10월 24일 단종은 관풍헌에서 돌아가셨고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 기슭(현 장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숙종 24년(1698) 단종은 복위되어 군왕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장릉을 조성하였으며, 정조 15년(1791)에는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사육신 등 여러 신하들의 사판을 배향한 배식단을 설치하였다. 영월부 관아의 객사는 태조 5년(1396년)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정조 15년(1791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월부 관아의 객사인 관풍헌(동익헌)은 정면 5칸이며, 객사의 서익헌은 정면 4칸, 중앙 정청은 정면 3칸, 자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누각 건물이다.

2013년·2015년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건물지, 박석시설, 내삼문지를 비롯하여 객사 건물로부터 내삼문지에 이르는 보도시설과 월중도(보물 제1536호)에 표현된 관풍헌으로부터 자규루로 연결된 보도시설이 확인됨에 따라, 영월부 관아는 조선후기 중수된 이후 현재까지 그 터와 건축물을 유지하고 있으며 기록에 의해 단종의 역사를 품고 있는 사적(史的)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영월 어라연 일원

종 목  명승  제14호  면 적 1,677,824㎡(지정구역) 지 정 일 2004.12.07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거운리 산40 등 

동강의 일부인 영월 어라연 지역은 하천지형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천혜의 보고로서 한반도의 구조운동(융기)의 증거인 감입곡류하천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며 하식애(어라연 일대의 수직절벽), 협곡(어라연 계곡), 구하도(상·중·하선암), 소, 여울, 급류 등의 지형·하천 경관 및 하천, 암반, 산림지대 등으로 형성되어 있는 식생경관과 정선아리랑 등 문화적 요소가 어우러져 천혜의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식생경관은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강바닥 식생으로는 달뿌리풀이 우점종이며 그 외 엉겅퀴, 갈대, 패랭이, 쇠별꽃 등이 분포하고 하반림으로서 강가 경계부에는 원추리, 홑왕원추리, 덩굴딸기가 대군락을 이루고 목본으로서 갯버들, 키버들, 왕버들, 시무나무와 비술나무가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산림식생으로서는 소나무군락이 높은 분포율을 나타내고 있으며 학술적 가치가 있는 식물군으로서 회양목 군락지 및 비술나무, 시무나무 등이 있고 암벽식생으로서 돌단풍, 부처손 등이 있다. 또한 어름치, 수달, 황조롱이, 원앙 등 천연기념물과 비오리 등 야생동물의 집단서식지로서 파악되고 있어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5.영월 선돌

종 목  명승  제76호  면 적 222,774㎡ 지 정 일 2011.06.10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로 64 (하송리 242) 

  선돌은 영월 방절리 서강가의 절벽에 위치하며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갠 듯한 형상을 이룬 곳으로 높이 약 70m 정도의 입석으로 신선암이라고도 불리며, 푸른 강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명승 제50호)로 가는 길에 선돌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어 가며,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하여 ‘선돌’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 등이 담겨있는 명승지이다.

 

 

6.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종 목  천연기념물  제76호  면 적 1,596㎡(보호구역) 지 정 일 1962.12.03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190-4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1,000∼1,2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29m, 둘레 14.8m이다. 처음에는 대정사라는 절 앞에 서 있었으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지금의 줄기는 새싹이 돋아 자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마을의 정자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나무 속에 신통한 뱀이 살고 있기 때문에 동물이나 곤충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정성을 들여 빌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종교적·문화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7.자규루 및 관풍헌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중앙로 61 (영흥리 984-3및 984-1) 시 대  조선시대

관풍헌은 조선시대 지방의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규루라는 누각이 있다.

 

자규루는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르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원래는 세종 10년(1428) 군수 신권근에 의해 지어져 ‘매죽루’라 불리웠으나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8.창절사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60 (영흥리 1063-1)  시 대 조선시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재위 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육신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와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숙종 11년(1685)에 홍만종의 건의로 지어졌으며, 사육신 외에도 엄흥도, 박심문 그리고 생육신 중 김시습과 남효온 등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경내에 있는 문루인 배학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앞면 3칸에 모두 문을 설치하였고, 2층은 누각으로 되어있다. 강원도에 있는 사당이나 서원 중 대문이 문루인 곳은 이곳 뿐이다.

 

창절사는 현재 남아있는 강원도 내의 사당이나 서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9.영모전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지 정 일 1977.11.28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모전길 148 (영흥리 1028)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재위 1452∼1455)의 영정(초상화)을 모신 곳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자 이 지역 백성들이 모두 사모하여 오다가 사약을 받고 죽자 모두가 애도하며, 정성어린 마음으로 중종 12년(1517)에 사당을 짓고 항상 단종이 있는 것처럼 공경하였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가운데 칸의 뒷부분에 초상을 모셔둔 방을 두고 그 양 측면과 뒷면은 벽을 설치하였으며, 앞면은 장지문을 달아 밝게 처리하였다. 그 외의 부분에는 마루를 놓았는데 앞면 3칸은 모두 문 없이 개방되어 있고, 뒷면과 옆면은 벽에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을 설치하였다. 내부 중앙에 모셔져 있는 영정에는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께 산포도를 드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매년 음력 10월 24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10.영월향교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월향교길 64 (영흥리 892)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영월에 향교가 지어진 것은 태조 7년(1398)으로 전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대성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으며, 1973년에 대성전을 고쳤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과 정문인 풍화루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서적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새로운 학문으로 인해 교육적 기능을 잃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11.영월 정조대왕 태실 및 태실비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지 정 일 1995.09.18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  시 대  조선시대

태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으로, 이것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태를 모셨던 곳이며, 그 앞에는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는 비가 놓여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맏아들이다. 정조 대에는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당론의 조화를 이루었고,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을 활발히 하였으며,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태실은 현재 2기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받침돌 위에 둥근 몸돌을 올리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며 그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다른 하나는 원통형 돌함 위에 반원형의 뚜껑돌을 얹은 모습이다.

태실비는 거북받침 위에 한돌로 된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의 등에는 5각형 무늬를 조각하였고 머릿돌에는 두 마리 용을 양옆에 새기고 그 사이에 구름무늬를 채웠다. 비몸은 앞면에 비의 명칭을, 뒷면에는 만든 날짜를 새겼다.

 

정조가 태어난 다음해인 영조 29년(1753)에 태실을 만들고, 순조 즉위년(1800)에 비를 세웠다. 1929년 조선 총독부에서 전국에 있는 태실을 창경원으로 옮길 때 이 태실의 태항아리도 꺼내 갔다. 태실과 비는 광산개발로 흩어졌던 것을, 1967년 KBS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세워놓았다.

 

 

12.영월 연하동굴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31호  지 정 일 1980.02.26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월로 2375-61 (연하리 산267)  시 대  미상

영월 연하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동굴이다. 총 길이는 약 300m로 동굴 입구에서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낭떠러지처럼 떨어지는 수직굴로 이루어져 있다.

동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하얀 종유석과 찰흙 성분의 종유석, 그리고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흩어져 있다.

영월 연하동굴 안에는 아름답고 섬세한 종유석 등 많은 생성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어 학술적 연구가치가 높다.

 

 

13.보덕사 극락보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34 (영흥리 1110) 시 대  조선시대

보덕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 의상조사가 지덕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감봉되며 유배당할 때 절 이름을 ‘노릉사’로 고쳤다가, 단종의 능인 장릉(사적 제196호)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영조 2년(1726)에 보덕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극락보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은 고려 의종 15년(1161) 운허선사와 원경국사가 늘려 지었다고 전한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칸은 5개의 빗살문, 양 옆칸에는 각각 3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며 현판은 김규진이 썼다.

 

지금 있는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건축물이다.

 

14.금강정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136 (영흥리 78) 시 대  조선시대

금강정은 조선 세종 10년(1428) 김복항이 세웠다고 전해오나, 영월제영에 따르면 이자삼이 영월군수로 있을 당시 금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숙종 10년(1684)에 송시열이 이곳에 올라 금강정기를 썼다고 한다.

 

금강정의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15.금몽암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5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112 (영흥리 1117)  시 대 조선시대

금몽암 보덕사의 부속 암자로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에 의상조사가 ‘지덕암’이라 이름지어 세운 것이다. 그 뒤 이곳 암자를 단종이 꿈에서 보았다 하여 금몽암이라 고쳐 불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새로 세웠다. 숙종 24년(1698) 단종이 복위되고 보덕사가 원찰이 되자 이 암자는 자연히 폐쇄되었고, 영조 21년(1745) 당시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관리하던 나삼이 다시 옛터에 암자를 지어 ‘금몽암’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금몽암은 ㄱ자형 집으로 총 16칸이며, 안쪽에 석조여래입상을 모시고 있다. 

 

 

16.민충사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136 (영흥리 77)  시 대  조선시대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돌아가시자, 단종을 모시던 시녀 6인이 다음날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민충사는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영조 18년(1742)에 세운 사당이다.

 

영조 34년(1758) 손질하였으며 정조 15년(1791)에 새로 고쳐 지었다. 해마다 그들이 순절한 음력 10월24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17.영월 보덕사 해우소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2호

지 정 일 2003.01.18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34 (영흥리 1110)  시 대 조선시대

해우소는 ‘근심을 해결하는 장소’ 라는 뜻의 사찰에서 화장실을 이르는 말이다.

 

전통적 형식을 지닌 보덕사 해우소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2층 누각식 건물이다. 앞뒤 2열로 나누어 각각 6칸씩의 대변소를 배치하여 남녀의 사용을 구분하면서 12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상량문을 통해 조선 고종 19년(1882)에 세운 건물임을 알 수 있는 이 해우소는 세워진 지 오래 되었음에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사찰 해우소 건물로는 강원도내에서는 희소가치를 지니고 있다.

 

 

18.배견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87-16 (영흥리 1090-4) 시 대  조선시대    

배견정은 사육신 박팽년의 혈손 박기정이 1792년에 창건하였고, 1990년에 건립된 박충원 정여각 동편 약 3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단종이 죽자 동강에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들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이곳에 찾아와 단종을 배알하던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9.배식단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산133-1) 시 대  조선시대     

배식단사는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98인, 환자군노 28인, 여인위 6인등 모두 264인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장릉 홍살문 밖 동쪽 약 1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 15년(1791) 2월 정조의 특별교지에 의하여 당시 영월부사 박기정이 창건하였다.

 

매년 한식때 제향을 올리는데, 배식단사에 봉안한 위패를 배식단에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

 

20.엄흥도 정려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1089) 시 대   조선시대       

엄흥도 정려각은 단종 시신을 암장한 영월 호장 엄흥도에게 영조 2년(1726)에 어명으로 정려하고 정조 16년(1792)에 비각을 세운 곳으로, 장릉 경내 재실 좌측 약 10m지점에 있다.

엄흥도는 단종이 승하한 후 군수에게 성장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여 성사치 못하고, 통곡하며 동강과 서강이 합류하는 금강에서 옥체를 건져내어 관곽과 의식을 준비하여 리민을 거느리고 영월 서북방 지역인 그의 선산 동지을산 자락에 밀장하였다.

이는 영조 18년(1742) 공조참의에 가증되고, 영조 34년(1758)에 다시 공조참판로 가증되었다. 그 후 정조 12년(1788) 8월 16일에 장릉 동구에 있는 육신사가 퇴락하여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것을 도에서 수리하도록 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엄흥도의 집에도 치제케하였다. 정조 15년(1791)에는 어명으로 엄흥도를 장릉 충신단에 올리고, 그 이듬해 정려비를 세워 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순조 33년(1833)에 엄흥도는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란 시호를 받았다.

 

21.단종대왕 신도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산133-1) 시 대  조선시대     

단종대왕 신도비는 장릉 경내에 위치한 수복실에서 북서쪽으로 약 10m 지점에 위치한다.

숙종 24년(1698)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이듬해 능을 수축하였다. 영조 9년(1733)에 단종대왕신도비를 세우고 이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을 건립하였으며. 이때 수복실과 정자각도 같이 세웠다. 정조 15년(1791)에 영월 부사 박기정이 장릉과 청포 등을 대대적으로 개수할 때 이 비각도 수보했다.

 

 

22.방절리 고인돌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250-14

시 대  청동시대      

청령포 나루터에서 서쪽으로 약 200m지점에 위치한 왕방연 시조비 묘역 안의 북쪽 소나무 아래 석회암 재질의 고인돌 덮개돌 상면이 노출되어 있으며, 표면에는 성혈로 보이는 구멍이 2개가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남-북 210cm, 동-서 205cm 잔존 높이 8cm이다. 형태로 보아 고인돌의 개석임은 분명하지만, 주위에 지석이나 벽석으로 볼 수 있는 석재가 전혀 노출되어 있지 않다.

 

23.엄윤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216 시 대  조선시대     

엄윤은 영월엄씨 시조 임의공의 17대손으로 정조 2년 무술년(1778) 6월 28일에 태어났다. 그는 통정대부 별호군 벼슬을 지낸 바 있고, 효행이 지극하여 정문을 하사받았다. 철종 11년 경신년(1860) 6월 15일에 별세하였다. 정각이 몹시 퇴락하여 그의 증손 엄종현이 1926년에 효자비를 건립하였다. 영월 군청 및 학당골 길가에 있다. 시문은 없고 후대에 만든 효자비가 있으며, 그 후면에 후손 엄성하의 기문이 새겨져 있다.

 

 

24.최순준의 처 정씨 효부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월로 2811-9 (연하리 563-1) 시 대  조선시대    

최순준의 처 정씨 효부문은 영월읍 연하리 반송마을 국도변 논 가운데에 있다. 정각 내에는 1894년에 명정을 받은 효부문이 걸려 있고, 「정부인정씨효행실적」을 비롯한 여러개의 현판이 땅바닥에 포개져 놓여 있다. 정문은 손자인 최붕규가 고종 31년(1894)에 건립하여, 현재 후손 최종하가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영월 33호 보호수가 인접해 있다.

연일 정씨는 최순준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면서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갔다. 하루는 시부모가 식사 중에, 자식이 죽어 남편이 부모에게 말하려 하자 정씨가 이를 막고 식사가 끝나서야 조용히 말씀을 드려 침착하게 대처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홀로된 시아버지를 20여년 동안 정성으로 모셨고, 타계한 뒤에는 농사일을 돌보면서도 산소 보살피기를 열심히 하니 호랑이가 멀리서 항상 호위하였다고 한다.

 

25.유용식 효자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점골길 124 (흥월리 753) 시 대  현대    

유용식 효자문은 흥월1리 마을 삼거리에서 한재골을 따라 올라가다 마을길이 끝나는 곳에 강릉유씨 유환로씨댁이 있는데, 이 집 뒤 언덕에 방치된 채로 세워져 있다.

유용식의 부친 유영복은 아호가 학고로 일찍이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학문과 기개가 높은 선비로 주위에서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부친의 영향을 받은 유용식은 조상과 부친의 유풍을 기리기 위하여 유비 등의 위패를 모신 흥현각을 세우고 매년 10월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한편 그는 부친이 출타하면 부친 대신에 제사를 지내고 귀가하면 친구 분들까지 초청하여 부친을 모셨다. 이처럼 생전에 효도하고, 부친이 타개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영월유림에서 성균관에 알려 표창을 받아 1968년에 문중에서 효자비각을 건립하였다.

 

26.평창이씨 열녀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동강로 636-2 (삼옥리 782) 시 대  조선시대     

열녀각은 영월에서 동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삼옥2리 먹골 마을에 라주정씨 집성촌이 있는데, 이 길 우측 정규강씨댁 동굴민박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정려각은 문중에서 1871년(고종10)에 건립하였고, 현재 정려각 안에는 정문 외에 금홍배가 1957년에 지은 「정각중수기」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평창이씨는 마음씨 곱고 미모인 정선 태생의 처녀로 삼옥리 독도준 마을의 정의영에게 출가하였다. 이씨는 시부모를 잘 공경하였고, 살림꾼으로 집안을 잘 이끌었으며, 그의 남편인 정씨도 착실하게 일하여 큰 농사를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정선강 건너 ‘사지막’마을에 잔치가 있어 정씨가 다녀오다가 그만 얼음 속에 빠져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씨가 달려가 남편이 죽은 얼음 구멍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이 얼음 구멍에서 40m쯤 떨어진 곳에서 얼음을 깨고 시체를 꺼냈는데 부부가 손을 꼭 잡고 죽어 있었다고 한다.

 

27.엄민도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459-5 시 대  조선시대      

청령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약 800m 떨어진 현재 공사중인 방절리 IC 부근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엄민도는 조선 숙종때 인물로 엄문삼절중의 한 사람이다. 4세때에 부친상을 당한 그는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모친이 병환 중일 때에는 항상 옆에서 병간호를 하였으며, 모친이 위독하자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기도하여 세 번이나 회생하게 하였다고 한다. 숙종 34년(1708)에 정문이 내려졌고, 1984년에 보수하였다. 정문판에 표기되어 있는 무자년은 숙종 34년이므로 35년은 오류인 것 같다.

 

 

28.신영숙 효자비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49-1 시 대  조선시대    고려 시대 영월의 인물로 영월 신씨의 시조인 신경의 15대손이다. 조선 태조 때 통훈대부 한성서윤이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벼슬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침식을 잊으며 병간하였다. 얼마 후에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친상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곧이어 부친이 타계하자 모친때와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였으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태조 때에 효자 정문이 내려졌고, 토지 수천평을 사패지로 내려 그의 효성을 기렸다. 그 후 정문이 퇴락하여 영조 21년(1745)에 후손들이 이곳에 효자비를 건립하였다. 효자비각은 창절사에서 장릉쪽으로 약 600m지점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정문은 없으며, 효자비 앞뒤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29.김지룡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216 시 대  일제강점기    

김지룡의 효행록이 한국전쟁때 인멸되어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선릉(성종의 능)의 참봉으로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의 묘소는 수주면 무릉리에 있다.

정자각은 학당골 군청 옆에 있다. 현재의 효자각은 1926년 3월에 건립된 것이며, 1992년도에 단청과 지붕을 보수하였다. 시문이 없는 효자비를 세워 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비가 없다.

 

30.완택산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산274 시 대  고려시대    

완택산성은 연하2리 복덕원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5km 정도 계곡에 난 길을 따라가면 완택산(해발 916.1m) 정상에 위치한다. 완택산은 영월읍 삼옥리의 삼옥 2리와 삼옥 3리의 경계지점에 정상부가 있고, 산의 남쪽으로는 연하리, 북쪽으로는 문산리와 접하고 있다.

산성은 완택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7개 봉우리의 산정을 감싸면서 축조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증보문헌비고’ 등의 기록을 통해 이 산성은 돌로 축조되어 둘레가 약 1.6km에 달하고 고려후기 합단(합단)이 침입할 당시 영월읍민이 입보하여 농성하던 곳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성은 해발 909.7m의 봉우리에서 북으로 906m, 889m의 봉우리까지 서북으로 회절한다.

그리고 866.5m, 839.8m, 855m, 868.2m의 봉우리까지 능선을 따라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다. 총 길이는 약 900m 정도로 능선 정상을 토루와 석축으로 연결한 것인데 거의 붕괴되었다. 석축은 북서쪽 끝에서 현저히 붕괴되었고, 해발 906m의 봉우리 서측에서는 무너지고 남은 석축이 확인된다.

 

 

31.태화산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 산1-2 시 대  삼국시대       

태화산(해발 1027.4m)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부분인 해발 900여m의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서남북의 길이와 너비가 약 400m, 둘레는 1,200m 쯤되는 포곡식산성이다. 평면모습은 5각형에 가까운 부정타원형이다. 성벽의 축성은 토축 부분과 석축 부분으로 구분되어진다. 토루는 폭 2∼4.7m로 높이는 2m 내외로 내환도를 이루고 있다. 석축은 세 지점이 확인되는데, 잔존상태가 양호한 북동쪽은 둘레길이 약 100여m, 폭 3m 정도로 높이는 1.7∼2.5m 높이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여장의 흔적이 확인되고 용도와 망대를 만든 부분도 확인된다. 성안에는 10×30m 정도의 넓은 평탄지가 성벽을 따라 확인되는데 이는 건물지 및 내환도로 추정된다. 우물지는 태화산성에서 각동리 방향인 서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100m 가량 떨어진 잣나무숲에 위치한다. 우물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데 돌무지로 우물천장을 덮어 보수하였고 확인되는 규모는 깊이 6m, 너비 4.2m이다.  

 

 

32.배식단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산133-1) 시 대  조선시대

배식단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배식단사 맞은편 약 1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 15년(1791) 2월에 정조의 특별교지에 의하여 당시 영월부사 박기정이 창건하였다.

 

 

33.보덕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34 (영흥리 1110) 일대 시 대  조선시대

보덕사는 영월의 주산인 발산(발산)의 서쪽 기슭에 입지하여 서향하고 있는 옛 절로, 신라 문무왕 8년(668)에 의상조사가 지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뒤, 고려 의종 15년(1161)에 운허선사와 원경국사가 극락보전, 사성전, 염불당, 고법당, 침운루 등을 증축하였다.

그 후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사찰명을 노릉사로 개칭하였다가, 숙중 31년(1705) 한의선사와 천밀선사가 대김당을 이루고, 영조 2년(1726) 6월에 태백산 보덕사로 개명한 장릉의 능사이다.

이는 장릉의 조포사찰(릉이나 원에 딸려서 제향에 쓰는 두부를 맡아서 만드는 절. 조포소라고도 한다.)로 예조에서 온 문관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극락보전, 사성전, 나한전, 칠성각, 산신각 등 여러 개의 전각과 5층석탑 1기가 있다.

 

 

34.송산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재길 12-92 (영흥리 593)  속골 시 대  조선시대

송산사는 속골의 봉래산 북서쪽에 위치한 서남향의 건물로 1691년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옛 건물터는 현 요사채로 인하여 없어져 축대만 남아 있고, 현재의 법당은 요사채 뒤편에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양호하지 않으나 부분적으로 축대가 남아있다. 법당 남동쪽에는 정면 2간, 측면 1간의 산신각이 있다. 요사채의 북서쪽에 위치한 부도에서 동쪽으로 7m정도 떨어진 곳에 수령 500년 정도의 은행나무가 있다.

 

35.보덕사 오층석탑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34 (영흥리 1110) 일대 시 대  현대

보덕사 5층석탑은 조선시대 탑 양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총 높이는 3m이다. 보탑연대가 불기 2534년(1969)으로 각자되어 있는데, 이는 1991년경 원래 있던 탑이 도난되어, 이후에 다른 사찰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탑은 지대석 위에 별석의 기단을 놓고 그 위로 옥개석 형식의 갑석을 올렸으며, 기단면석은 각 우주를 모각하고, 상대갑석에는 각면에 2개씩 복련을 조각하였다.

 

초층탑신은 우주가 별석으로 되어 있는데, 3층 탑신은 다른 탑신보다 우주의 모각이 깊어 다른 탑신과는 차별화된 느낌을 주며, 각 탑신과 옥개는 각각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에는 내림마루가 뚜렷하여 3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그 위로 노반과 복발, 보주가 올려졌는데 이중 노반은 옆으로 비틀어져 있다.

 

 

36.보덕사 석종형부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34 (영흥리 1110) 일대 시 대  조선시대

석종형부도는 높이 88cm 원통형탑신으로, 위에는 너비21cm, 깊이 11cm의 사각형의 사리공이 있고 밑면은 탑신에 맞도록 둥글게 홈을 파 놓았다.

 

37.보덕사 방형승탑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34 (영흥리 1110) 일대 시 대  조선시대(1820)

방형승탑은 평면 정방형으로 너비 42cm, 높이 57cm이다. 석재로 윗면에는 깊이 8cm, 직경 13cm의 사리공이 있다. 그리고 앞면에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화엄대강사」, ‘대’자 밑으로는「설허당대선사탑」이, 뒷면에는「가경이십오년경진사월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38.송산사 승탑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재길 12-92 (영흥리 593)  속골 시 대  근대

승탑은 100년 정도 된 것으로 박춘삼 스님 다비 후 이 승탑에 모셨다고 한다. 형태는 장타원 모양에 아래 위가 짧은 원통형으로 대받침과 옥개받침을 만들었다. 아래 지대석에는 시멘트를 발랐고, 옥개석은 네각으로 내림마루를 각출하고 끝은 2단으로 마감하였다. 크기는 전체높이 115cm로 기단부 25cm, 탑신높이 60cm, 옥개에서 보주 높이 30cm, 옥개석은 50×50cm으로 탑신 앞면에는 ‘주지박영택’, 뒷면에는 ‘박춘삼’이라고 종으로 새겨져 있다.

 

39.연하리 두평 성황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월로 2564-1 (연하리 233-1)  두평마을 시 대  미상

성황당은 두평마을 앞에 있었으나 38번 국도가 나면서 마을 뒷산 쪽으로 옮겨 1간 정도의 제당을 다시 건립하였다. 당집 내에는 전면에는 ‘성황지신위’, 좌측에는 ‘수비위’라고 쓰인 위패가 봉안 되어있다. 매년 정월 초에 택일하여 제를 올린다.

 

 

40.방절리 서강 성황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579-2 시 대  미상

방절2리 구판장 노인회관 앞에 슬레이트 지붕에 벽돌로 지은 성황당이 있고, 이 주변에 2그루의 느티나무가 서 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때 미신타파라는 명분으로 성황당이 불태워졌다. 그 후 마을에 안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나자 주민들의 협의로 다시 건립하였다. 당집 안에는 제단 위에 ‘성황지신위’라고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41.삼옥리 사지막 성황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97  사지막 시 대  미상

성황당은 삼옥1리 웃말마을에서 사지막 고개를 넘어 1.5km 소로길을 따라가면 사지막마을이 위치하는데, 이 마을 중앙에 위치한다. 느티나무와 매차나무가 당산숲을 이루고 당집은 판자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한 1칸의 목조건물이다. 내부에는 고사를 올리는 제단이 모셔져 있고 위패는 없다. 제일은 매년 음력 초 4일이다.

 

 

42.삼옥리 먹골 성황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동강로 648 (삼옥리 792-3) 먹골 시 대  미상

성황당은 삼옥2리 먹골마을에서 섭사마을로 가는 도로 우측에 평창이씨 열녀각을 조금 지나 위치한다. 당집의 규모는 1칸 크기로 당집 내부에는 ‘상성황지신위’, ‘중성황지신위’, ‘하성황지신위’ 라는 위패 3개가 봉안되었다. 제일은 매년 정월 초에 택일하여 고사를 지낸다.

 

 

43.영흥리 선정비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금강공원길 136 (영흥리 산38) 시 대  조선시대

영흥리 선정비군은 영월 KBS 방송국 입구의 화단에 총 10기의 선정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본래 비석거리와 서원 앞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다.

좌측부터「군수심연청덕비」,「군수윤순거청덕선정비」,「부사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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