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군/정보] 양양군 강현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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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 강현면의 문화재로 현존하는 것은 무엇무엇 있습니까??? 

강현면의 문화재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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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 강현면의 문화재)

 

1.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22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  시 대 통일신라

진전사의 옛터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하는데, 터 주변에서 ‘진전’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탑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날아갈 듯한 옷을 입은 천인상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신중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2.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 탑

종 목  보물  제439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1  시 대 통일신라

멀리 동해바다가 내다보이는 진전사터 안의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탑으로,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된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선종을 이어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부도는 일반적인 다른 부도와는 달리 8각형의 탑신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는데,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 

 

3.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499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낙산사  시 대 조선시대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가늘고 긴 쇠막대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다. 근처의 명주군에 위치한 정동진리오층석탑의 연꽃무늬 기단장식과,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월정사팔각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4.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1362호 

지 정 일 2003.02.03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낙산사  시 대 조선시대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5.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 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종 목  보물  제1723호  지 정 일 2011.11.01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시 대 조선시대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예술적인 측면으로만 보자면 일급의 석조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첫째, 건립의 절대연대가 1692년으로 밝혀져 비슷한 시기의 승탑을 비롯한 관련 석조물의 편년에 소중한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둘째, 매우 드물게 현존하는 이른바 승탑형 불사리탑의 새로운 예가 추가되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셋째, 양식적으로나 세부에 있어서나 조선시대 왕릉의 장명등과 유사성이 다분하여 양자 사이의 교류 관계, 나아가 절집 석조물과 그 밖의 석조물의 양식적인 영향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비는 그 자체만으로는 조선후기 석비의 일반적인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와 아울러 생각한다면 이 비의 가치는 배가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불사리를 모시려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일관 유물일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문의 내용이 사리장엄구의 일부를 이루는 문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공중사리탑, 공중사리비, 사리장엄구가 이런 관계 속에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공중사리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 일괄은 인위적인 손상 없이 처음 매납된 상태 그대로 수습되어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접어들 무렵까지도 사리병―금합―은합―동합의 순으로 매납용 사리기를 제작하여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는 전통적인 사리 장엄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로써 주목에 값한다. 또한 사리장엄구의 일부로 수습된 비단 보자기 11점은 그 양호한 상태, 색채의 선명성, 무늬의 다양성 등을 통해 우리나라 직물사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가지 유물, 즉 공중사리탑과 공중사리비와 사리장엄구 일괄은 관련 유물 가운데 어느 하나 결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렇게 관련 유물이 갖추어진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은 낱낱의 유물이 지니는 가치도 적지 않지만 함께 보존되고 관리될 때 그 의미가 한층 강화될 것이다.  

 

6.양양 낙산사 일원

종 목  사적  제495호  지 정 일 2008.12.18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일원  시 대  선사시대

 

양양낙산사는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이 전해지고 있다. 

 

 

7.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종 목  명승  제27호   지 정 일 2007.12.07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산5-2) 등  시 대  신라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송강 정철(1536~1593)의 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67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낙산사”와 낙산사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의상대”,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한 “홍련암” 등 낙산사의 곳곳에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의상대와 홍련암은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낙산사 주요 경관 요소이던 낙락장송이 2005년 강원지역의 큰 산불로 소실되어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으나, 의상대 및 홍련암 주변 해안에는 시스택(sea stack)이 발달하여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낙산사는 에 옛 모습이 잘 남아있고, , ,등의 고문헌에 많은 시인묵객 등의 낙산사 창건 및 중수 기록과 유람기, 경관을 노래한 시문이 다수 전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8.낙산사 홍예문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산5-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9.낙산사 담장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시 대 조선시대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연결·보수하였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이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층의 길게 다듬은 돌기단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긴 받침돌을 놓았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10.의상대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지 정 일 1974.09.09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산5-2)  시 대 일제강점기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의상이 낙산사를 지을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하였던 곳으로 옛부터 의상대라 불렸다고 한다.

 

6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난간을 비스듬하게 세운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11.양양 진전사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52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37번지외3필지  시 대 통일신라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나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에는 절이 없어질 때 스님들이 절터 위에 있는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하고 떠났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2.낙산사 홍연암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98-19 (전진리 57-2)  시 대 통일신라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연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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