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정보] 홍천군 동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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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군 동면의 문화재)

 

1.사인비구 제작 동종 - 홍천 수타사 동종

종 목  보물  제11-3호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월인석보 권17~18

종 목  보물  제745-5호   지 정 일 1983.05.07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세조 때 처음 간행된 초간본으로, 2권 1책이다. 본래 강원도 홍천의 수타사 인왕문에 있는 사천왕상의 배부분에서 발견되었다. 권 17은 전부가 완전하며, 권 18은 제87장 하부가 없어졌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내용은 권 17은 『월인천강지곡』제311장에서 제317장까지이며 권 18은 제318장에서 제324장까지 해당되는 내용이다.

  

 

3.수타사 대적광전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통일신라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세워 일월사로 불렸다고 전한다. 조선 선조 2년(1569) 공잠대사가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수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절은 고종 15년(1878) 크게 고친 것으로, 대부분의 건물을 이때 고쳐지었고 이름도 수타사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대적광전은 수타사의 중심 법당으로, 앞면과 옆면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수타사 대적광전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는 조선 후기 불전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4.홍천 수타사 소조사천왕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수타사의 봉황문 좌우에 모셔져 있는 4구의 사천왕상이다.

 

절에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현종 15년(1674)에 법륜이 봉황문을 세우고, 2년 후인 숙종 2년(1676)에 여담이 사천왕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분노하는 듯한 얼굴과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모두 악귀를 거느리고 있다. 사천왕상의 배치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것에서 차이가 있지만 기본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각각 긴 칼, 깃대, 용과 여의주, 비파 등을 가지고 있다.

 

사천왕상의 높이는 3.2m이고 머리 높이는 1.12m, 어깨 너비 0.73m, 무릎 너비는 1.52m이다. 팔과 광배, 악귀 등이 전체적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색칠 또한 많이 벗겨져 있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주로 나무로 만든 사천왕상이 많은데, 수타사의 것은 18세의 작품이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만들었다. 나무로 기본형태를 잡은 후 새끼줄을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빚었다. 머리 뒤쪽의 불꽃무늬와 사천왕상이 가지고 있는 물건 등에는 부분적으로 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5.홍천 수타사 영산회상도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 걸어두는 불화의 한 종류로, 보통 사찰의 전각 안에 모셔둔 본존상 뒤에 걸어두는 후불화를 이른다. 이 영산회상도는 수타사 대적광전 내에 있는 비로자나불의 후불탱화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세로 278㎝, 가로 263㎝의 크기이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중앙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열보살과 사천왕 등을 배치하였다. 중앙의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을 걸치고 있으며,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붉은색을 칠한 옷은 각종 무늬를 두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머리 꼭대기에 있는 육계는 높고 뾰족하며, 머리카락은 조그만 소라 모양처럼 구불구불하게 표현하였다. 몸 뒤의 광배는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크게 나타냈으며, 대좌는 두 겹의 흰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석가불의 좌우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배치되어 각각 흰 연꽃과 여의를 들고 서 있고, 그 윗쪽으로는 둥근 두광을 지닌 8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아래에 있는 2구씩의 사천왕상은 갑옷의 금색부분이 입체감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사각에 가까운 얼굴, 작은 코와 입, 콧수염과 턱수염의 표현 등에서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석가불의 어깨 좌우에는 늙은 비구 모습의 가섭과 청년 모습의 아난이 서 있다.

 

아랫부분에 새긴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38년(1762) 금어 진찰 등이 이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6.홍천 수타사 지장시왕도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3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수타사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지장보살과 시왕을 그린 불화이다.

 

크기는 세로 186㎝, 가로 205㎝로, 사자머리가 장식된 높은 대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70구에 달하는 각종 상들을 정연하게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의 시왕도 중에 유난히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정연한 배치를 위해 그림 중간에 붉은색 구름을 그려넣어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었다.

 

중앙에 있는 지장보살은 깎은 머리에 투명한 두건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기다란 지팡이와 보주를 들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몸에는 귀걸이와 팔찌 등을 장식하였다. 녹색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여 표현하였다. 지장보살의 주위에는 5구씩의 시왕과 십대보살을 두었으며, 좌우 2구씩의 사천왕을 세워 놓았다. 구름의 하단에는 상단보다 작게 그린 무리들이 있는데 우선 가장 앞쪽에 옥졸을 두고 판관, 사자, 동자 등을 점차 나열하였다.

 

구름에 둘러싸인 앞쪽의 인물은 작게, 윗쪽에 있는 10대 보살이나 사천왕 등은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하고 있어 위로 갈수록 인물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지장보살에게 모아지도록 하였다.

 

하단 중앙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이 작품은 영조 52년(1776)에 비구 설훈 등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7.홍천 수타사 흥회루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지 정 일  2015.08.07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1658년(효종 9)에 건축된 홍천 수타사 흥회루는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보기 드문 누강당 형식의 건물로, 창건된 이후 근대에 들어와 일부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적인 평면과 구조, 공포와 가구, 세부 형식 등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두 상부 주심선상에 재주두와 같이 주심소로를 사용한 사례 등은 조선후기 건축물의 양식적 특징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흥회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이다. 자연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놓았는데 건물 규모에 비해 기단이 낮아 배수에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초석도 자연석을 썼는데 형태가 아주 자유롭다. 기둥은 평주 12개, 좌우 측면 고주 4개, 건물 중앙에 세운 심고주 4개를 세워 가구를 결구하였다. 모두 원형기둥이며 정연한 계획 하에 치밀하게 가공된 모습이다. 대개 사찰의 누각은 기둥재를 자연 상태의 원목을 껍질만 벗겨내고 거칠게 마감하는 사례가 많은 데 비해 흥회루처럼 치밀하게 가공한 기둥은 흥회루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구구조는 1고주 5량가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일반적인 고주가 아니라 평면 중앙에 심고주를 세운 독특한 방식을 따랐다. 이로 인해 대들보 대신에 심고주를 중심으로 맞보를 결구하고 맞보 상부에는 종보를 걸구하였다. 건물 좌우 측벽은 2고주 5량가로 가구를 구성하였다. 보는 총 8개의 맞보와 6개의 종보를 썼는데 좌측면에 쓰인 맞보 하나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보가 거의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만큼 형태와 크기 면에서 균일한 특징을 보인다.

곡선이 지거나 휘어져 있는 보를 찾기 어려워 목재 수급에서부터 치목에 이르기까지 매우 공을 들여 건립한 건물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동자주는 주두를 더한 듯이 가공되어 있고, 반자 내부에 가려진 대공은 단청까지 칠해져 있어 원래 노출된 부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공은 고식에 속하는 형태로서 매우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평주에 결구된 창방 단면은 양볼을 깎아내어 기둥 모습을 도드라지게 처리하였는데 이런 방법은 기둥 모양에 맞춰 결구하는 방식에 비해 고식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공포는 주심포식 공포를 결구하고 있으며 출목은 외1출목이다. 출목거리는 전후 모두 320㎜이다. 정면과 배면 공포는 부재 형태가 유사한 듯하면서도 세부 구성은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살미는 유사하지만 첨차는 전혀 다른 형태여서 건립초기부터 의도한 것인지 후대의 교체인지는 알 수 없다. 흥회루에 사용된 소로 중에서 주두 상부 주심선상에 재주두와 같이 주심소로를 사용한 점은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런 모습은 조선초에 만들어진 주심포 건축에서 확인 할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건축물들 가운데 이 지점에 주심소로를 사용한 사례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매우 작은 처리방식이지만 흥회루의 건축적 가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가구구조 가운데 도드라진 점은 측면 중앙에 심고주열을 세워 구조를 짠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건물 중앙에 심고주열을 세운 사찰 누각은 고운사 가운루, 선운사 만세루 등을 들 수 있으나 대부분 사찰 누각에서는 중앙에 고주를 세우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심고주를 세울 경우 내부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8.홍천 수타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6호

지 정 일  2016.11.04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이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1758년(건륭23) 5월에 강원도 홍천 공작산 수타사 옥수암에서 화승 순경, 덕순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확인된다. 불상을 조성한 화승 순경과 덕순은 1739년에 수화승 초흠과 서울 학림사 괘불도를 조성한 화승들이다. 불교조각사에서 18세기 중반은 불상의 조성과 개금에 불화승들이 점차 참여하게 된다.

순경이 제작한 목조보살좌상은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목조보살좌상(1655년, 조각승 혜희), 공주 마곡사 청련암 목조보살좌상(1701년, 조각승 마일)과 비교해보면 신체비율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커지고 대의자락이 도식적으로 변하였으며, 얼굴 이목구비는 타원형에서 방형으로 변하게 된다. 이와 같이 18세기 중반 불화승들이 제작한 불상은 앞선 시기 조각승들이 제작한 불상보다 인상이나 대의처리 등이 단순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발원문을 통해 조성연대와 작가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년명 불상이며, 다라니ㆍ후령통 등의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는 등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우수하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9.수타사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고려시대

수타사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고, 2·3층 몸돌이 없어진 탑신은 남아 있는 1층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얕게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뾰족하게 치켜 올려갔고, 밑면에 1 ·2층은 3단, 3층은 2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동그란 돌 하나가 남아 있다.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각 층의 지붕돌 너비가 거의 줄지 않고 있어 원래는 높고 날렵한 큰 규모의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0.수타사 홍우당 부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로 473 (덕치리 9) 수타사   시 대 조선시대

수타사로 들어가는 길 옆에는 7기의 부도가 서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 두는 곳으로, 이 부도는 ‘홍우당’이라는 호를 가진 승려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땅 위로 드러난 사각 바닥돌 위로,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을 두고, 납작한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닥돌을 제외한 대부분이 6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 중에서 아래받침돌은 옆면마다 선으로 무늬를 새기고, 윗면에는 두 겹의 연꽃잎을 둘러 새겼다. 가운데받침돌은 여섯 모서리에 마디가 있는 작은 기둥을 새겨두고, 면마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무늬를 두었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두툼한 연꽃잎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섯 모서리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모서리에서 미끄러지는 각 귀퉁이가 위로 솟아있다.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돌 위로 공 모양과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차례로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6각으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구성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즈음에 이 부도를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11.오성산성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시 대 미상

산 정상에 약간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주변에 삭토하여 석벽을 만든 흔적이 발견되나 숲이 우거지고 붕괴되어 토벽을 만든 것인지 확실히 구분하기 어렵다.북쪽에 일부 석축이 붕괴된 것으로 보이는 곳이 7m 정도 있고 이외에는 석축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형태상 산정식 산성에 속한다.

 

 

12.대미산성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시 대  미상

형태상 포곡식 산성에 속한다. 정상에서 동·북으로 형성된 능선의 상당부분이 평탄한 지대로 되어 있다. 사방이 경사가 급한 험지로 되어 있으며 특히 북쪽과 동쪽 방향은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곳이 많다. 성 둘레는 실측 결과 1,150m 정도이나 정확하지 않다. 이 산성과 관련된 이 괄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3.허은수 처 전주유씨 열녀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노천리 산 190 시 대  조선시대

김해허씨 은수의 처 전주유씨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허씨 가문으로 출가한 전주유씨는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얼마 후 남편이 불치의 병을 얻어 병석에 눕게 되자, 전주유씨는 심신을 돌보지 않고 남편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로 남편은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전주유씨는 남편의 배설물을 맛보아 병의 원인을 알아내고자 하였으나 허사였다. 아내의 이와 같은 정성과 노력도 보람 없이 남편은 운명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단지하여 붉은 피를 남편의 입안에 넣어 사흘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으나, 남편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전주유씨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비통함을 누르고 오히려 시부모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시부모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슬픈 표정을 짓지 않으며 3년상을 지성으로 치르면서 남편의 혼령을 위로했다.

전주유씨는 1876년(고종 13) 5월 19일 대상 치르고 남편의 묘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매기소’에 이르러 신었던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투신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전주유씨가 자진한 후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덕우천과 노장천이 합수되는 지점에 있던 큰 바위가 보매기소 앞 개천으로 흘러 내려와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전주유씨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동기간의 우애도 깊었으며, 특히 남편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의 굳은 정절이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주유씨를 열녀로 추서하는 교지를 내렸으며, 1886년(고종 23)에는 전주유씨를 기리는 열녀각을 세웠다. 그러나 그후 6ㆍ25동란 등의 수난을 겪으며 퇴락한 것을 1960년 6월 지금의 장소로 옮겨 보존되고 있다.

 

 

14.남궁종ㆍ남궁준 부자 정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월운리 시 대  조선시대

홍천군 동면 월운리에는 남궁종ㆍ남궁준 부자의 효성을 기리는 정문이 세워져 있다. ‘남궁부자정문'이다. 작설ㆍ홍문ㆍ생정문이라고도 부르는 정문은 나라에서 충신ㆍ효자ㆍ열녀를 기리기 위해 그 동네 가운데나 그 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세우는 문으로서, 붉은색으로 단장하며 편액에는 충신과 효자와 열녀의 직함과 성명을 새겨놓았다. 조정에서는 매년 연초에 이와 같은 사람들을 조사하여 임금에게 알리고 정문을 세워주는 한편 쌀과 의복을 하사하였고, 조세와 부역 따위를 면제하는 복호의 특전을 베풀었다.

‘남궁부자정문’ 앞에는 1982년 홍천군수가 이 정문을 소개하는 비를 세워 놓았는데, 비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정문은 남궁종과 남궁준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00년에 건립하였다. 효자 남궁종은 모친이 위독하자 단지하여 회복케 했으며, 매일 아침마다 문안을 드린 후에 일을 시작하였다. 남궁종의 아들 남궁준 또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남궁준은 부모가 병환으로 10여 년을 앓아눕자 정성을 다하여 병간호를 하였다. 10여 년 동안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남궁준은 하늘에 기도한 끝에 한겨울임에도 산에 올라 산삼 세 뿌리를 캐었다. 남궁준의 부모는 이 산삼을 복용한 뒤 회복되어 70세까지 장수했으며, 남궁준은 부모가 세상을 뜬 후에도 부모의 묘 앞에서 평생을 눈물로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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