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정보] 홍천군 서석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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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군 서석면의 문화재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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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초코님의 댓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의 문화재)

 

1.홍천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25호

지 정 일 1977.11.28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505-11,1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웠던 전적지이다.

 

고종 31년(1894) 교조신원운동의 실패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가 원인이 되어, 동학접주인 전봉준이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게 하자는 내용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홍천 지방에서도 농민 운동이 크게 일어나 농민군의 일부가 관아를 공격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장야촌까지 진군하였으나, 관군 총사령관 맹영재와 싸워 동학군 30여 명이 전사하였다. 여기에서 패한 동학군은 풍암리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지인 자작고개에서 김숙현을 중심으로 관군과 싸웠으나 끝내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1976년 자작고개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유해 더미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망자를 800여 명으로 추정하지만 부상자를 함께 묻었다고 하니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금도 풍암리 주민들은 전투에 동학교도로서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사람들의 제사를 음력 10월 20일부터 수일간 많은 집이 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동학군전적기념비가 있다.

 

 

2.홍천 동창보수로 및 암각명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65호

지 정 일 1994.04.25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산204-1  시 대 조선시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쌓아 만든 보(洑)로서, 서석면 수하리에서 내촌면 물걸리까지 약 1㎞ 정도의 물길이다. 물길을 끼고 있는 산의 낭떠러지 바위면에는 ‘보주 김군보’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김군보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직접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여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이 보는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지역 일대의 개척과 관련된 농경유적으로, 조선 후기의 수리 및 관개 시설의 형태를 비교적 잘 보여준다.

 

 

3.홍천 풍암리 고택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9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장막길 29-8 (풍암리 717)  시 대 일제강점기

안채와 사랑채, 광으로 이루어진 ㅁ자형 주택으로 1903년 서석의 부호이던 엄근호가 지어 45년간 살던 집이다.

안채의 평면은 부엌을 중심으로 앞면에는 부엌광을 배치하고, 뒷면에 툇마루가 있는 안방을 두었다. 그 옆에는 대청과 건넌방을 들였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출입 대문을 분리하였고 그 사이 좁은 안마당에도 담장을 설치하여 남녀가 쓰는 공간을 따로 나누어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는 초가집이었던 것을 1970년대에 슬레이트와 함석으로 교체하였다. 여유있게 꾸민 집으로 영서·중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옥 형태를 갖추고 있다.

 

4.정규시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시 대  조선시대

옛날 아주 가난했던 시절 정씨의 부친이 병환이 났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 정씨는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화고 아버지의 병을 고쳐드리기 위해 낮에는 산에 가서 약초를 캐고 밤에는 그것을 손질하여 다려서 드리기를 수년을 그리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정씨는 최후의 수단으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했는데도 여전히 병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한다.근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부친의 병은 잉어를 드시게 해야 고쳐진다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때는 엄동설한의 동지섣달이었다. 정씨는 잉어라는 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랐다. 그러나 부친이 살수 있다는 일념으로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갔다. 그리고는 맨주먹으로 얼음을 꽝꽝 치기 시작했다. 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드디어 얼음이 녹으면서 깨지더니 고기 한 마리가 펄쩍 뛰어 올라 얼음 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정씨는 그 고기를 고아서 부친께 드렸더니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이 한양 대궐까지 들어가 임금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이는 모든 백성에게 귀감이 되는 효심이니 효자라 칭하고 효자각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 후로 정씨네의 가세도 차츰 나아져 행복하게 살랐다고 전해 내려온다.

 

 

5.전의 이씨 제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시 대  현대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 도이며, 그 후손 문의공 언충과 효정공 정간, 문장공 혼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중 혼은 시조 도의 8세손으로 고려 충선왕 때 첨의정승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익이 예안으로 분적하여 예안이씨로 불렸으나 근래에 다시 전의이씨와 통합하였다. 언충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 천의 손자로서 충렬·충선·충숙·충혜왕의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고 한다.

정간은 천의 현손이며 언충의 재종손으로 조선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 및 궤장을 하사받았다. 또, 죽음에 임박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거동(임금의 행차)해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의 어필을 내렸고, 이후 전의이씨는 모두 이 여덟 자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

전의이씨는 조선에서만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 1071가구에 13만 32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선조들의 선양를 위하여 후손들은 서석면 풍암리 서석고등학교 뒤편 국도옆 언덕에 제각을 세우고 서석에서 매년 음력 10월 6일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희덕씨가 서석에 제각을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중이며 전의 이씨 37대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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