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정보] 춘천시 남산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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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남산면의 문화재에 대해서 알려주세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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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댁님의 댓글

춘천시 남산면에는 문화재가 없습니다. 춘천시의 문화재 중에서 국가 지정 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

(춘천시의 문화재)

1.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종 목  국보  제124호  지 정 일 1967.06.21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 손가락을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 손가락을 편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어서 같은 곳에서 발견된 한송사지 석불상(보물 제81호)과 반대이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2.춘천 근화동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7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당간지주길 61 (근화동 793-1)

시 대 고려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 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의 양 쪽에 서서 이를 버티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춘천시내에서 의암호를 따라 춘천역으로 돌아가는 도로 옆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꾸밈새가 없는 간결한 형태이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는 2단으로 이루어진 당간의 받침돌이 놓여져 있는데, 아랫단은 둥근조각이 있고, 윗단은 16잎의 연꽃조각이 돌려져 있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형을 이루고 있고,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켰던 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을 다듬은 기법이나 연꽃잎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3.춘천 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7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강원도 춘천시 서부대성로 9-19 (소양로2가 162-2)

시 대 고려시대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후부터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4.춘천 청평사 회전문

종 목 보물 제16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길 779 (청평리 669)

시 대 조선시대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 승현선사가 세워 백암선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몇 번에 걸쳐 고치고 절을 넓혔는데 청평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명종 5년(1550) 보우선사가 이곳에 와 다시 고쳐 세운 뒤부터이다.

청평사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짜여 있는데,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이 절의 서쪽 언덕에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극락전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5.허목 초상

종 목  보물  제1509호  지 정 일 2007.02.27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미수 허목(1595-1682)의 초상으로 오사모에 담홍색의 시복을 입고 서대를 착용한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다. 화폭 상부의 제발문에 따르면 1794년(정조18) 정조가 허목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그 칠분소진을 얻고자 채제공으로 하여금 사람들과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은거당(1678년 숙종이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진을 모셔다가 이명기가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정의 오른 쪽에는 채제공이 당시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이 은 생시진상은 아니지만 현재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 실정에서 17세기 대표적인 사대부초상화의 형식을 보여줌과 아울러, 노학자의 문기어린 풍모를 잘 전달해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이명기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ㅇ 규격(세로x가로) : 72.1 x 56.8 cm(그림), 28.6 x 65.8 cm(발문)

6.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1873호

지 정 일  2015.04.22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까지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읍옥평) 들판에 방치되어 있던 다섯 구의 철불 가운데 하나로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불상은 전체높이 110cm로 등신대에 가깝고, 어깨는 둥글게 처진 모습이며, 신체 비례가 살아있는 사람과 흡사하다. 조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나말여초기의 불상으로 철불의 제작기법 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약사여래의 도상을 알려주며 원주지역에서 유행했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므로 한국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7.춘천 신매리 유적

종 목  사적  제489호   지 정 일 2007.11.14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신매리 302번지 등  시 대 신석기~삼국시대

춘천 신매리유적은 북한강 옆의 충적대지에 형성된 취락유적으로 198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처음 발굴조사 한 이후 한림대학교박물관,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지속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무덤이 밀집 분포된 복합유적으로 확인된다.

특히 지난 1996년 신매대교 접속도로 개설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이른 시기에 속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기를 달리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출토되어 우리나라 동북지역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춘천신매리유적을 후세에 길이 보존 전승을 위하여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 하고자 한다.

8.청풍부원군 상여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2.08.07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초상때 나라에서 하사하여 사용하였던 상여이다. 청풍부원군은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둘째 아들로서 본관이 청풍이며 현종의 장인이다.

상여는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기구이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밝은 천을 넓게 펼친 모습이다. 몸체에는 봉황머리와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고, 검은 천 위에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려는 의미로 보여진다.

요여는 혼백과 죽은 이의 이름을 적은 위패를 모셔 나르는 작은 가마이다. 긴 멜대 위에 사각형의 방처럼 생긴 몸체를 얹고 맨 위에 네 개의 지붕선이 표시된 반구형의 지붕을 올렸다.

명정대는 붉은 천에 청풍부원군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깃발로서 상여의 오른쪽에 세워두었다가 시신을 운반할 때 영구 앞에 서서 행차를 표시하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만장대는 망자를 애도한 글을 적은 깃발로 명정의 뒤쪽으로 배치된다.

조선 숙종대에 만들어진 이 상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양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궁중에서 쓰던 상여인 ‘대여’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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