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정보] 강릉시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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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리고장의 문화재를 수집해보기가 있어요~

 제 고장은 강릉 입니다! 많은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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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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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문화재에 대하여는 아래의 사이트 클릭하시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https://www.gn.go.kr/www/selectBbsNttList.do?key=1722&bbsNo=85&integrDeptCode=&searchCnd=all&searchKrwd=

 

드림님의 댓글

강릉에는 문화재가 많이 있습니다. 국가 지정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

(강원도 강릉시의 문화재)

 

1.강릉 임영관 삼문

 

종 목 국보 제5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58-1)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8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강릉시립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강릉에 있던 한송사가 폐사된 후 명주군 구정면 어단리에 있던 것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머리와 오른팔이 없어진 불완전한 보살상이지만, 입체감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희귀한 작품이다. 왼팔은 안으로 꺾어 왼다리에 얹었으며, 오른팔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져서 알 수 없다. 앉은 자세는 왼다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오른다리를 밖으로 내어 발을 그냥 바닥에 놓고 있다. 이런 자세는 보살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아마 어느 본존불을 모시던 협시보살이었을것으로 여겨진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천의(天衣)는 아주 가벼운 느낌을 주며, 목걸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아름답다.

 

이 보살상은 특이한 자세와 더불어 사실적이며 활달한 조각수법으로 특이할 만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조각수법이 흡사한 고려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

 

3.강릉 대창리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8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옥가로50번길 7 (옥천동 333)  시 대 통일신라

강릉 시내의 도로변 논 속에 남아 있으며 주변에서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이 주변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록은 없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지금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이며, 현재 1m 간격을 두고 두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 서 있다. 지주 사이의 깃대를 받치던 받침이나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는 없다. 바닥부분에 직사각형의 돌을 놓은 것으로 보아 기단부도 직사각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꼭대기 부분은 안에서 바깥쪽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안쪽 윗부분 중앙에는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진 구멍이 하나 있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조각한 흔적이 없는 소박하고 간결한 모습이다.

 

4.강릉 수문리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8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수문길33번길 6 (옥천동 43-9)  시 대 통일신라

현재 마을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대가 절터로 추정되나 지금은 주거지로 변했기 때문에 절터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당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달아두는 깃발을 말하며 이를 달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는데, 당간지주는 당간을 양 옆에서 고정시켜주는 장치를 이르는 말이다.

 

원래의 위치에 있던 그대로이며, 두 지주가 1m 간격을 두고 동 ·서로 마주 서 있다. 밑부분이 상당히 매몰되어 있어 깃대 받침이나 기단이 있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흔적은 안쪽 윗부분에만 있는 직사각형의 구멍으로 알 수 있다. 두 지주의 최상단은 안쪽 꼭대기부터 바깥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동쪽 지주의 남쪽 면에는 조선 순조 17년(1817)에 복원되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각 면이 거칠고 폭도 고르지 않으며 조각이 없어, 당간지주로서 발달되지 않은 형식이지만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충실하다.

 

5.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8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범일로664번길 36 (내곡동 406)  시 대 고려시대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범일국사가 처음 세웠다.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한데다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복스럽게 보인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져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묘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둔중한 조각수법을 보인다. 이러한 자세나 조각 솜씨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앞의 공양보살상과 유사한 것으로 같은 지방 계열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보살이 앉아있는 대좌는 윗면을 둥글게 하여 보살이 들어앉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에는 큼직큼직하게 2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규칙적인 간격의 옷주름과 단순해진 장신구, 대좌의 조각수법 등에서 화려한 신라적 요소가 사라지고 고려 초기의 둔화된 표현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6.강릉 굴산사지 승탑

종 목  보물  제8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731  시 대 고려시대

이 승탑은 굴산사를 세운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굴산사터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변형된 수법을 보인다.

 

사리를 모시는 몸돌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받침부분이 놓이고, 위로는 지붕돌과 꼭대기장식이 놓였다. 꼭대기장식으로는 상륜받침과 보개, 연꽃봉오리 모양의 구슬장식이 놓여 있다. 한 돌로 된 바닥돌은 8각의 평면이며, 위에는 접시 모양의 받침돌이 있다. 2단으로 된 8각의 괴임돌이 있는 아래받침돌은, 평면이 원형이며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천상의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구(또는 장고)·훈·동발·비파·소(피리)·생황·공후(하프)·적(대금) 순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맨 윗받침돌은 위를 향해 활짝 핀 연꽃모양을 새겼다. 몸체는 8각의 낮은 몸돌과 지붕의 경사가 급한 지붕돌로 이루어지는데, 지붕돌 처마끝의 치켜올림이 없어 밋밋하다.

 

전체적으로 위축된 느낌을 주는 이 승탑은 몸돌이 낮고 작은 데 비하여 지붕돌이 다소 커져 균형을 잃은 듯하다.

 

 

7.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8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1181  시 대 통일신라

신라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사찰 앞에 세워지며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가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뾰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8.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8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403-2  시 대 고려시대

신복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이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 절로,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즉 신라의 한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셨는데 곧 아이를 배어 낳게 되었다. 집안 사람들이 아이를 내다버렸으나, 아이의 주위로 빛이 맴돌아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길렀는데, 그 이름을 범(梵)이라 하였다. 범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고향에 돌아와 신복사와 굴산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탑은 2층의 기단을 쌓고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하여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을 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끝은 치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3단이다.

 

꼭대기에는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의 앞쪽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는 보살석상(보물 제84호)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강원도 내의 월정사팔각9층석탑(국보 제48호)과 비슷하여 이 지방의 특색이 아닐까 짐작된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돌로 괴임을 넣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모습 중 하나이다. 또한 아래층 기단에 안상이 새겨진 것이나,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3단으로 되어있는 점도 고려 전기의 석탑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9.강릉 오죽헌

 

종 목 보물 제16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201)

시 대 조선시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10.강릉 해운정

 

종 목 보물 제18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125 (운정동 256)

시 대 조선시대

 

해운정은 조선 상류주택의 별당 건물로 경포호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으며, 조선 중종 25년(1530)에 어촌 심언광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전한다.

 

심언광 선생은 조선 중종 2년(1507) 진사가 된 뒤,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분으로 문장에도 뛰어났다.

 

이 건물은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남향으로 지었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안쪽의 오른쪽 2칸은 대청이며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대청 앞면에는 문을 달아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주위에는 툇마루를 돌려 놓았다.

 

건물 앞에 걸린 ‘해운정’이라는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이며, 안에는 권진응, 율곡 이이 등 유명한 사람들의 글이 걸려 있다.

 

겉은 소박하고 안쪽은 세련된 조각으로 장식한 별당 건물로, 강릉 지방에서는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이다.

 

11.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종 목  보물  제19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광리 1171) 보현사  시 대 고려시대

보현사에 자리하고 있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무너져있던 것을 사찰입구에 복원해 두었다가, 1991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산꼭대기 주변으로 옮겼다. 탑신을 받치는 기단은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가운데받침돌이 없어져 아래받침돌 위에 바로 윗받침돌이 얹혀있다. 탑신의 몸돌 한쪽 면에는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경사가 급하고,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낭원대사탑비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탑도 이 때 같이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12.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종 목  보물  제19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광리 1171) 보현사  시 대 고려시대

보현사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834∼930)의 탑비로,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왕은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용의 머리를 갖춘 거북받침돌은 등에 6각의 벌집 모양이 채워져 있고, 중앙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비를 꽂아두는 부분)가 마련되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기고 그 위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을 힘차게 조각해 놓았다. 꼭대기에는 석탑에서처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1단의 보륜(바퀴모양의 장식)을 갖추고, 화염에 싸인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고 있어 특이한 모습이다.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이 글씨를 썼다. 

 

강릉향교 대성전

종 목  보물 제2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명륜로 29 (교동 233)

시 대  조선시대

강릉향교는 옛 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학문을 갈고 닦는 곳으로,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고려 충선왕 5년(1313) 강릉 존무사였던 김승인이 세웠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불에 타, 2년 뒤 강릉도호부판관 이맹상의 건의로 다시 세웠고 몇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태종 13년(1413)에 지은 것으로 공자를 비롯해 중국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간결하게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은 바닥에 판석을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이 지방의 많은 선비와 학자를 배출한 강릉향교의 제사 공간을 대표하는 전통깊은 건축 문화재이다.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

종 목  보물 제602호

지 정 일  1976.04.2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은 율곡 이이(1536∼1584)선생이 42세 때인 선조 10년(1577) 관직을 떠나 해주에 있을 때 처음 글을 배우는 아동의 입문교재로 쓰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23세 때 별시에서 장원을 한 후 벼슬길에 올랐고, 호조좌랑, 예조좌랑, 우부승지를 거쳐 47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이의 성리학 사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이외에도 를 세우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그가 죽은 후 전국 20여개 서원에 위패가 모셔졌으며, 시호는 문성이다. 저서로는 『격몽요결』 외에 『성학집요』, 『기자실기』, 『만언봉사』 등이 있다. 이 책은 율곡이 직접 쓴 친필 원본으로 한지에 행서체로 단아하게 썼으며, 내용은 제1장 에서부터 의 항목으로 나누어 제10장으로 구성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이 책머리에는, 정조 12년(1788)에 이 책을 친히 열람하고 제목에 글을 지어 문신 이병모(1742∼1806)에게 명해 이를 책머리에 붙이게 하였다. 『격몽요결』은 조선 중기이후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어『동몽선습』과 함께 초학자의 입문서로 근세에까지 많이 읽혀져 왔다. 더욱이 이『격몽요결』은 여러차례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출간되어 왔으나, 유일한 친필본은 율곡의 이모가 시집간 권씨집안에 율곡의 유품과 함께 대대로 소장되어 왔으며, 이것은 율곡이 친히 쓴 친필원본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문무잡과방목

종 목  보물 제603호

지 정 일  1976.04.2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문무잡과방목은 중종 8년(1513)에 실시한 문무잡과 시험에 합격한 합격자의 명단이다. 소장자의 선조인 심언광에게 내려져 전해져온 것으로, 같은 해에 실시된 사마시험의 대과합격자 명단인 「정덕계유사마방목」은 월성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문무잡과방목보다 앞서 보물 제52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매수 37매로 가로 17.5㎝, 세로 30㎝이다. 조선 후기의 방목은 많이 있으나 이것은 조선 전기의 방목으로서 희귀한 것이며, 더우기 문무잡과방목은 세 개 과의 합동방목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시대 주요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것을 인쇄한 활자는 세종 갑인년에 주조한 갑인자로 인쇄문화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안공주 관련 유물

종 목  보물 제1220호

지 정 일  1995.06.2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1664∼1687)와 그가 거처하던 명안궁과 관련된 전적류, 고문서류, 유물 등이다. 명안공주의 본명은 온희로, 숙종 5년(1679) 오태주와 결혼하였다. 전적류는 현종과 명성황후, 숙종의 한글 편지 등이 수록된 어필첩과 각종 판본, 오태주 일가의 글씨를 모은 유묵첩, 영조의 환갑을 맞이하여 왕세손과 신하들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모음집 등이 있다. 고문서류로는 각종 물품단자와 진정서이고, 유물들은 궁중에서 명안공주에게 보낸 생활용품들이다. 특히, 명안공주 작명단자는 왕실의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관련된 유물들은 그 종류가 다양해 당시 공주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며, 서예연구는 물론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당시의 궁중생활사 및 사회·경제사연구의 사료로서 소중한 자료들이다.

황기로 초서-이군옥시

종 목  보물 제1625-1호

지 정 일  2010.01.04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 177-4) 오죽헌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황기로 초서-이군옥시」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고산 황기로(1525~1575?)가 당나라 이군옥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그는 낙동강 지류 천보탄 가에 매학정을 짓고 살았던 처사로서 회소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 장필(1425~1487)을 따랐다.

이 초서는 회소와 장필을 배워 활달하고 운동세가 많은 획법과 변화로운 짜임을 잘 구사한 예이다. 이 필적은 황기로의 사위 덕수이씨 옥산 이우(1542~1609)의 후손인 이장희(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의 묵적 가운데 대폭이며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13.강릉대도호부 관아

 

종 목 사적 제388호

지 정 일 1994.07.1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58-1)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보물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4.강릉 굴산사지

종 목  사적  제448호  지 정 일 2003.06.02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597외  시 대 통일신라

굴산사지는 강릉시 구정면 학산2리 윗골마을의 마을회관 일대에 있는 절터이다.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13년(851)에 범일국사(810∼889)가 창건한 사찰로, 우리나라 9산선문 중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중심 사찰이었다. 굴산사는 고려시대에는 지방호족들의 지원하에 번성한 후 조선초 이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 이후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굴산사지당간지주(보물 제86호),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굴산사지부도(보물 제85호), 강릉굴산사지석불좌상(강원도문화재자료 제38호) 등이 남아 있어 굴산사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굴산사지 일대는 현재 주변이 농경지로 변하여 사역의 정확한 범위를 알 수 없었으나,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사역의 크기는 동-서 140m, 남-북 250m의 크기로 확인되었다. 또한 토층은 3개층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1·2문화층은 유실되었으나 3문화층은 아직 남아있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법당지·승방지·회랑지·탑지 등도 확인되었다.

 

강릉 굴산사지는 우리나라 9산선문의 중심사찰로서,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긴급발굴조사를 통해 법당지·승방지·회랑지 등의 유구가 확인된 역사상·학술상 귀중한 유적이다.

 

 

15.강릉 초당동 유적

종 목  사적  제490호  지 정 일 2007.12.0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84-2 등  시 대 신석기~삼국시대

강릉 초당동 일대는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1993년 이후 강릉대학교 박물관,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약 27차례에 걸쳐 발굴 및 시굴조사)를 통하여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고분유적이 함께 분포하는 복합유적으로 확인되었으며, 특히 2005년 5월∼6월에 강원도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초당동 84-2번지 주택신축부지에서 확인된 신라시대 수혈식 석곽묘는 주·부곽이 달린 독특한 장법의 대형분으로 금동제 호접형 관모장식, 은제 허리띠 장식, 마구류, 철검, 철촉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는 삼국시대 당시 강릉지역의 토착세력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삼국시대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등 강릉지역의 지정학적 위상과 관련하여 학술적·문화재적 연구에 가치가 있다.

 

16.강릉 선교장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67.04.18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운정동 43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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