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기타] 영월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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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영월행 일기에 대해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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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우주님의 댓글

제7회 울산연극제 극단광대 " 영월행 일기"

단종애사를 소재로 한「영월행 일기」는 역사의 구조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단종시대와 현실을 오버랩 시키고 있으며 뛰어난 상상력으로 현실과 과거를 교차시키면서 정신적 풍요의 가치를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월가는 옛 길을 보여주고, 여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영월로 가는 길은 영월행 일기라    는 고서점에서 산 아주 오래된 책에 나와있는 길이지요. 고서적 [영월행 일기]를 구입하는 고서점이라는 것은 새로 나온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오래 된 책을 파는 곳입니다. 길로 치면, 신작로도 아니고 아스팔트 길도 아니고, 기차길도 아닌 옛 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이지요. 고서점이란 바로 옛 길을 만나는 곳, 옛 길을 찾는 곳이지요. 거칠게 말하면 고서점이란 바로 옛 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옛 길이란 무엇일까요. 옛 길이란 이제는 사람들이 오고가지 않는 길, 길 아닌 길을 뜻한다. 옛 길은 예전에 다니던 사람들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아울러 그 때 그 사람들의 삶도 찾아 볼 수 없는 길을 뜻합니다.

 또한 영월로 가는 옛 길은 강과 산을 마주하는 길이며 동시에 과거로 가는 먼 길이다. 과거    로 가는 길은 숫자로 목적지만을 표시하는 지도에 나있는 요즘의 길과 같지 않습니다. 굽이치는 강물과, 풍경과 함께 하는 길을 뜻합니다. 이제는 오고가는 이들을 볼 수 없는 그 길을 애써 작가는, 등장인물을 내세워 나귀를 타고 찾아 따라 간다. 그 길을 다니던 사람이 없는 옛 길에서 독자 들은, 관객들은 그 당시 실재했던 역사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역사, 역사의 부재와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전부 관객들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강백은 영월로 가는 옛 길에서 "과거를 생생하게 맛볼 수"가 있고, "과거와 현재가 겹쳐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옛 길은 이 희곡과 공연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옛 길은 고서점에 이어 고서로 채워진 서재로부터 시작합니다.

   [영월행 일기]는 고서적 연구 동우회 회원들이 모여 옛 책을 읽는 조당전의 서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주요 등장인물들은 고서적 동우회 회원들과 영월행 일기를 구입한 조당전과 이 책을 팔아버린 김시향, 그들이 역을 맡아 한 하인과 여종입니다. 책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신숙주와 한명회의 하인과 여종은 영월 청령포로 귀양가 있는 단종(폐외된 다른 이름은 노산군)의 동태를 살펴보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가지요. 이 작품은 이들의 영월을 세 번 찾아가는 여행기입니다. 연극은 이 세 번 가는 과정이 주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세 번의 여행길은 억압에서 자유를 찾는 힘든 여정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앞 부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영월행에서 행(行)은 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여행을 뜻합니다. 옛 길로 따라 과거의 영월로 가는 것이지요. 예컨대 한 시인도 여행을 떠나면서 "모든 장래여 엿먹어라!"라고, 혹은 "물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망설이고 있다. 봄 쪽으로 갈까, 가을 쪽으로 갈까"라고 하면서, 여행길에 나선 나비처럼 가볍고 기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가벼운 마음을 토로하는 부분입니다. 

   [영월행 일기]의 작가 이강백도 여행의 출발, 영월로 가면서 "저 두갈래 길에서 당나귀가 동쪽 길로 가면 우리도 그쪽 길로 가고, 당나귀가 남쪽 길로 가면 우리도 그쪽 길로 가요"라고 한다. 모든 장래를 벗어 던진 그곳에서 갈 곳은 어디라도 좋다는 거죠. 아무튼 관객인 우리들도 갈데까지 따라 가보지요. 책을 통해, 공연을 따라.

영월가는 길에 대하여 이렇게 해서 조당전과 김시향은 나귀를 타고 하인과 여종으로 영월로 가게됩니다. 여행의 목적지인 영월은 "멀고도 먼, 가는 데만 칠백리, 오는데도 칠백리 합    쳐서 천사 백리 길"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길이며, 그 길은 "천사백리 길이 모두 볼    거리"이며, "어는 품보다 더 두터운" 자연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예컨대 등장인물들은 나무    와 하늘과 구름과 노랑나비 떼들과 함께 간다. 가벼워지는 영월행은 "따뜻한 봄, 아이(들처럼), 풀과 나무마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예쁜 꽃들이 피었(고), 추운 겨울 집안에만 웅크리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보게되는 그 환한 광경, 마치 봉사가 눈을 뜬 순간처럼 신기하고 놀라운"순간의 연속이다. 신이 난 당나귀도 "연신 코를 벌름거리면서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충분하다. "(두손으로 눈을 가리며) 노랑나비에요, 흰나비에요? 그렇다면 가만히 눈을 떠봐. (가렸던 눈을 떼고 허공을 바라본다) 어머나, 노랑나비네, 한 두 마리가 아니예요. 여기도 노랑나비, 저기도 노랑나비, 온통 노랑나비떼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요." 나비떼는 그들의 몸을 막아준다. 그래서) 시간은 이렇게 멈추어 있기도 하고, 흐트러지지 않다가도, "해가 뜨고, 해가 졌다. 달이 뜨고, 달이 졌다. 하루가 지났다. 해가 뜨고, 해가 졌다. 달이 뜨고, 달이 졌다. 이틀이 지났다...해가 뜨고, 해가 졌다. 달이 뜨고, 달이 졌다. 사흘이 지났다. 사흘 곱하기 다섯은 보름, 벌써 보름이 지났다."처럼 시간은 흥겨운 장단을 타고 흐른다. 궁극적으로는  "색깔도 곱"고 "향기도 좋"은 자유의 길이다.

그 때, 길의 끝 영월에서 "영월은 물이 좋아 술이 좋은"것처럼 "자유"와 "외로움, 슬픔의 맛"을 함께 맛본다. 마치 시인이 여행하면서 "내 숨겨논 꿈, 너무 달아 내쉬다 도로들 이켠 한 모금 공기"와 같은 것이고, 바로 그 순간은, "흐르는 시간 슬쩍 흐름 늦추"고마는 황홀과    정지의 순간이지요. 작가, 등장인물들이 왜 영월로 가고 싶었는지? 그것은 미래를 엿먹이고 나서 자연으로 안기는 편안하고 너그러운 순간을 체험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의 끝이 외로움과 슬픔일지라도 행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작가와 배우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희곡을 읽으면 읽을수록 영월로 가는 옛 길을 따라 가고 싶어지게 됩니다. 기차가 아니라 당나귀 그러니까 연극을 타고. 한번 가면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가기만 할 뿐 되돌아 올 수 없는 연극에 몸을 실어 그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등장인물들은 영월에서 돌아오고 있지 않다. 그냥 그곳에 가고 있을 뿐입니다. 

길 떠나는 태도에 대하여

첫번째 영월행에서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어"라고, 희곡의 맨 앞에서 이강백은 영월행이 사전 계획에 없던 일이므로 떠나는 불안함과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다.

세번째 영월행에서는, 영월로 가서 자유와 해방을 맛보기위해서는 조당전이 "내 몸이 무거운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벼워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길 떠나려는 이의 "머리 속의 생각이 무거워서 그"런 것이다. 그것을 벗어던져 가벼워야만 떠나는 것은 가능해진다는 깨달은 것입니다. 여행은 가벼움을 전제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월가는 길은 새 길이 아니라 옛 길이다. 작가는 새로난 신작로가 아닌 단종이 살아있었던 1456-1457년 때 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가고, 관객들을 이끌고 갑니다. 이렇게 떠나기 전, 떠날 때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교차합니다.) 점차 무거움을 버리고 가벼워 지게 됩니다.

  첫 번째 영월행에서는 주인공들은 길 떠나기 전의 육신의 무거움과 동시에 길 위에서의 정신의 가벼움을 체험한다. 육신의 무거움을 상징하는 것은 "백년 이상은 되어 골동품적 가치가 있는" 몸이고, 그 몸과 같은 "[영월행 일기]를 아픈 상처처럼 어루만지"다 다친 왼손 손가락의 핏방울이고, 고서적의 매매에 관한 "법"이고, 어겼을 때의 "감옥"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대사로도 드러난다. 첫 번째 영월의 청령포(단종이 귀양살이 하는 곳)에 들어가기 위하여 다리를 건너면서) "멈춰요,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어요, 어지러워 혼났어요, 무서워서   다리를 뭇 건너간다구요, 중간에서 균형을 잃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김시향, 이 부분   은 단종인 노산군의 무표정, 단종 즉 노산군의 슬픈 표정, 얼굴은 핼쓱하고, 몸 전체가 아픈거예요?"라는 대사와 일치하고, 최종적으로 육신의 가벼움을 상징하는 "노랑나비"와 "허수아비", "빈 몸"등과 같은 이미지로 가벼움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월행이 반복되면서 세 번째 영월행 그러니까 마지막 영월행에서는 가벼워집니다. 영월로 가면서 등장인물들의 정신과 육신은 모두 가벼워진다. 가벼워져서 "머리 속이 텅"비고, "창자가 쑥 빠"지고, "윗도리 아랫도리 홀랑벗"어 던지고, "드넓은 벌판에 (모인) 온갖 허수아비들" 같고, 그 가벼워진 몸들은 들판에 세워져 있는 허수아비들을 향해 "이 몸 보아라, 저 몸 보아라"라고 하면서, 텅 빈 들판과 속이 빈 허수아비와 가벼워진 몸이 서로 일치하는 놀라운 풍경을 말한다.

  이렇게 마지막, 세번째 영월행에서는, "머릿 속도 편하고, 뱃속도 편"해진다. 그 때 영월로   가는 등장인물들은 "속이 텅 빈 껍데기"같은 허수아비, 빈몸이 되고, 그 빈 몸을 타고 웃   음은 밖으로 터져 나온다. 웃음은 가벼운 몸을 타고 나오는 자유의 환호성이다. 밖으로 멀리 멀리 퍼지는 울림이다. 이것이야말로 가벼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인과 여종은 영월에 가서 단종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쫓겨난 왕의 표정을 보게 됩니다.  왕의 표정,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 [영월행 일기]행에서 본 단종의 모습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는 무표정을 말하고, 두 번째 여행에서는 슬퍼하고 있다는 표정을 말하고, 세 번째 여행에서는 웃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는 단종의 무표정과 슬픈 표정은 허락하지만 웃는 표정을 허락하지 않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도다. 만약 노산군이 기쁜 표정을 그대로 두면, 온갖 시정잡배마저 제왕과 다름없다 뽐낼 터인즉, 대체 짐이 무엇으로 그들을 다스리겠느냐?"라고 하면서, 영월로 사약을 보내, 노산군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하늘에는 오직 한 태양만이 있고, 땅에는 오직 자신만이 웃는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웃음과 권력에 대하여

   이 작품에서 빈 몸과 웃음은 커다란 상징이다. 단종의 웃는 표정은 "내 마음이 진정 기쁨을 누리거늘, 어찌 구차한 왕관을 쓰기 바라고, 구태여 곤룡포 입기를 바라겠는뇨? 나는 나를 왕좌에 복위시키려는 그 어떤 짓도 관심이 없고, 그 어떤 사람과도 관련이 없"다는 단종의 초월을 의미하고, 진정으로 "살아움직이는 것"(43)에 대한 자유의 상징이 된다. 그 웃음은 물결처럼 퍼질대로 퍼져 자유를 얻게 된 하인과 여종에게로 가닿는다. 희곡의 끝에 신숙주의 하인은 마침내 자유를 얻어 "당나귀에 올라타고 상전 집 대문을 나서는데, 환히 웃는 내 얼굴이 태양만큼이나 밝았고, 기쁜 내 마음은 제왕이 부럽지 않았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처럼 웃음은 옛 길의 끝자리에서 노예의 억압이 자연의 치유력으로 인간의 자유로 회복되는 상징이다. 연극을 떠나, 아니 연극과 함께, 당나귀를 타고 영월로 가는 길, 그곳에서는 죽음도, 삶도 모두 싱싱해진다. 세 번의 영월행을 통하여 주인공들이 얻는 것은 자유입니다. 영월행은 가벼움으로 가는 길이다. 가벼움의 극치는 첫 번째 영월행에서도 언급이 됩니다.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한가지, 자유야", "종살이에서 풀려나는 것,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없어"라는 대사에서 볼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영월로 가는 길, 자유는 아무런 부피도, 무게도 가지지 않은 상태, 가벼워져 텅 빈 상태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반복되지만) 그들의 세번째 영월행을 통하여 "속이 빈 껍데기와 같은 빈몸"을 체험한다. 빈 몸이란 대립이 없는, 가벼움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머릿 속도 편하고, 뱃 속도 편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도, 쾌감도 가벼움의 극치이다. 죽음이 세상을 뜨는 것처럼, 쾌감이 하늘 위로 몸이 나는 것처럼. 희곡에 나오는 "봄날 포근푸근한 땅을 밟는 감촉", 찬 기운이 감도는 가을에는 "걷는 상쾌한 기분"이란 작가 이강백이 말하고자 하는 자유와 그 가벼움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권력과 억압에 대하여

   영월로 가는 옛 길에서, 작가는 세조와 단종, 신숙주와 한명회, 하인과 여종, 그들의 세계를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작가는 권력에 대하여 절대적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과 그 세계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상대적으로 등장시켜놓고 있다. 그리고 영월로 가는 옛 길을 수많은 기호들이 단풍의 빛깔처럼 드러납니다. 절대권력, 세조라는 형이상학적 기호는 그 빛깔들의 하나일 뿐이다. 영월로 가는 옛 길을 따라가면서, 등장인물들은 절대진리에 대한 맹신보다 인간 존재의 애매성, 기호의 이중성, 현실적 구체적 삶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깨닫는다. 이른바 이러한 (인식론적) 기호읽기의 과정이 희곡이, 이강백이 펼쳐보이는 길이다.    억압당하고 사는 이들은 "하지만 내 기쁜 표정을 본 동행자는 기겁을 하며....기쁜 표정을 짓지 마세요. 그런 얼굴은 반드시 죽임을 당해요. 상전들은 우리의 무표정은 살리고, 슬픈 표정은 살려두어도 우리의 기쁜 표정은 살려두지 않아요"라는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름 붙여지지 않은 확대될 미래형으로. 처음에 떠나면서 엿먹인 미래가 때로는 더 무섭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기 전 시인은 "모든 미래여 엿 먹어라"라고 했지요. 작가 이강백은 텅 빈 여백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허수아비 같은 빈 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텅 빈 몸으로 과거로 향한다. 빈 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웃음을 짓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등장인물들은 가긴 가되, 그대로 가지 않고 주저하고("왜 이렇게 늦는거지, 들어오기가 싫다니요", 망설이며 들어오지 않는다.)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한 영월행은 "멀고 멀어, 가는데만 칠백리, 오는데도 칠백리 합쳐서 천사백리 길"만큼 힘든 길이 됩니다.     

   그 길을 조당전과 김시향은 단박에 가지않고, 우회하고, 에둘러 가고, 강을 건너고, 당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남쪽으로("저 두갈래 길에서 당나귀기 동쪽 길로 가면 우리도 그 쪽 길로 가고, 당나귀가 남쪽 길로 가면 우리도 그 쪽 길로 가요"), 또 다리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면서 간다. 그래서 그 길은 "이미 수천번 수만번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무슨 착각인가, 환상인가, 정신을 차려야겠다 하면서도 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 갔다는 돌아오고...돌아왔다간 또 가는 것 같"게 된다. 

   동시에 "징그러운 벌레들이 나비 대신 날아다니고, 흉칙한 독버섯들이 꽃 대신에 돋아나 있잖 아!"라고 하는 것처럼, 그 길은 "무서운 꿈을"꾸게 하고, 그 "길의 끝, 막다른 저쪽에는    한 얼굴이 있고, 나는 온 몸에 진땀을 흘리면서 다가가는....얼굴을 바라본 나는 섬뜻 놀라 되돌아"오게 되는 길이다. 동시에 "너무나 무서운 꿈이어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면...또 다른 무서운 꿈"을 꾸게 하는 길이며, "이 길 때문에 미치게 된다." 이처럼 자유를 찾는 길은 자신을 "종처럼 도구처럼 대우하는"것에 대항하는 것이며, "이 무서운 꿈에서 깨어 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 슬픈 곳"인, 억압의 상징인 영월의 끝 청령포에 도달합니다. 그곳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외진 곳, 험준한 절벽이 뒷켠을 가로막고, 평창강이 구비구비 앞켠과 옆켠을 막아 흐르니, 날개 날린 짐승이 아니고서는 감히 빠져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에 갇힌 단종을 만나게 됩니다.

   하인과 여종은 자유를 찾기 위하여 가장 외진, 험준한 곳에 온다. 자유는 청령포에 갇힌 괴롭고  쓸쓸한 단종의 삶과 청령포의 바깥에서 이를 경험하는 하인과 여종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유의 구가는 청령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 안에, 그 밖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여기서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자유를 얻지 못한 여종과 하인의 경계는 없어진다. 복위와 자유는 단종과 하인과 여종에게 절실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등장인물인 조당전과 김시향 그리고 하인과 여종 사이의 시간의 경계가 무화된다. 그리고 단종과 하인과 여종의 사이의 신분의 구분도 사라진다. 시간의 경계가 무화된 곳이 영월이고 신분의 구분이 사라진 곳이 청령포일 것이다.  

   청령포는 갇힌 단종이 세상을 마주했던 공간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청령포를 재현한 공간은 단종이 세상을 마주한 세상을 재현하는 공간이 된다. 권력에 의하여 억압되는 공간의 상징이 된다. 청령포에 갇힌 단종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으로 향한다. 단종은 희곡에 나오는 "밝은 원반형태", "원반의 테두리"인 강의 가장자리로 나와 붉어진 눈시울로 복받치는 서러움을 달랬을 것이다. 단종의 시선은 절벽으로 감싸인 그 위 하늘이 아니라 흐르는 평창강의 물 위로 가닿았을 것이다. 그래서 "조당전과 김시향(은), 말없이 강물을 바라본다."강물로 향하는 그들의 시선은 퍼지지 않고, 물 위에서 다시 자신들에게로 되돌아 온다. 그 모습은 다시 조당전이 "당나귀를 끌고서 강가에 다가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자세일 것이다. 그리하여 "강물에 내 얼굴이 비쳐보이는"것과 "강 건너 그 얼굴"이 일치되어 "우리 얼굴과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하는 것과 같다. 눈의 시선과 원반의 테두리는 눈의 시울과 일치되고, 단종과 하인과 여종이 일치한다.

   [영월행 일기]이란 공연의 형식-허구와 진실

   [영월행 일기]는 역사적 사실과 연극적 상상력을 포개놓은 희곡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은 실제와 많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청령포, 금포비, 단종의 역사 등등) 만약 역사적 사실을 꿰뚫고 있는 독자나 관객이 이 작품을 보게되면 역사적 사실과 연극적 상상력의 차이에 대하여 묻게 될 것이다. 연극적 상상력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오기도 하고 그것과의 차이로 부터 더 부풀려지기도 한다. [영월행 일기]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과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서로 맞물려 있다. 이 점은 작가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할 부분과 상상력에 의해서 변형될 수 있는 부분들을 언급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가는 허구의 안으로 역사적 사실을 끌어들인다. 허구의 공간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의심한다. 즉 사실이 부풀려 진다. 역사적 사실들이 반성을 하게 되는 공간은 그것들의 실체공간을 벗어난 허구의 공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권력처럼 역사적인 사실들 그 자체로서는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허구는 사실을 껴안고, 그것들의 실재에 대하여 회의한다. 그 결과 역사적 사실은 허구 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궁극적 실재를 확인하고 극복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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