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정보] 영월군 주천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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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에도 주천면이 있습니다.

 

 영월군 주천면일대의 문화재정보를 아주 잘아시는 분께서 답변해 주세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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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띵님의 댓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의 문화재)

 

1.주천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8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1125-4  시 대  고려말~조선초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흥령사라는 절을 처음 지을 때 이 절을 안내하기 위해 세운 3기의 탑 중 하나로 전하고 있다.

 

기단은 일부 떨어져 나갔으며,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떠 새겨 놓았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알구멍같은 구멍이 3군데 있고, 윗면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다. 2층 지붕돌은 끝부분이 깨져 있는데, 그 탓에 3층 지붕돌이 더 커보여 마치 다른 탑의 것을 끼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흥령사 창건 당시에 만든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각 부분의 비례가 잘 맞지 않고, 2·3층 몸돌에 기둥을 새기지 않은 점 등으로 보아 고려말·조선초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는 강기슭에 있었던 것을, 둑을 쌓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는데, 이 때 탑 안에서 금동불상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2.김종길 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1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고가옥길 27 (주천리 1196)  시 대  조선시대

평지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하고 一자형 사랑채가 있어 전체 평면은 ㄷ자형을 이루고 있는 집이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건넌방과 부엌을 두고 왼쪽에는 웃방·안방·부엌·사랑방을 두었는데 사랑방은 원래 부엌의 광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웃방과 안방 밖으로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건넌방 앞에서 시작된 ㄱ자형 툇마루는 안방 앞까지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나중에 새로 지은 것인데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헛간, 오른쪽은 넓은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이 집은 조선 순조 27년(1827)에 세웠으며 전체 구성 형식은 영서지방 민가 형식을 따르고 있다.

 

 

3.채빈하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1210 시 대  조선시대    

채빈하 효자각은 신일 3리 공순원마을의 사슴농장(농장주:채수면) 뒷편 언덕 위에 있다. 채빈하 효자각 안에는 채빈하·채석영 2개의 정문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1974년 한차례 보수하여 현재 후손 채수면이 관리하고 있다.

채빈하는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다방면으로 약을 구하여 드렸으나 별 효과가 없이 11세 때에 그만 부친상을 당하였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다는 내용만 기록 되어 있다. 이 정문은 고종26년(1889)에 내려졌다고 한다. 채석영은 효성이 지극한 효자로 모친이 병환 중에 있을 때 갖은 정성을 다하여 병간호를 하였지만 그의 나이 7세 때 모친이 타계하였다. 13세 때에는 부친마저 돌아가시자 보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산소의 봉분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소나기가 쏟아져 모두들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상주인 채석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다시 산소로 가보니 홀로 묘 앞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그는 비 한 방울도 맞지 않은 상태였다. 그 후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목욕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고 한다. 시묘하는 동안 곁에 항상 대호가 있어 그를 보호하여 주었다고 한다. 인조 27년(1649) 11월에 정문이 내려졌다.

 

4.금마리 사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산224  일대  웃기마동 시 대  고려시대

사지는 금마초등학교 뒤쪽의 배재마을 북서쪽 웃기마동마을을 지나 농로를 따라 진행하여 정숙희씨 집 일대에 해당한다. 정숙희씨 집은 조사 당시 집을 신축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기초공사를 하면서 이미 절터는 파괴된 상태이며 그 주변에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로 보이는기와편과 토기편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출토유물 중에는 명문기와편도 수습하였는데 작은 조각이라 판독할 수는 없다.

 

5.도천리 탑거리 사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도천리 182-2 일대 시 대  통일신라

탑거리사지는 도천1리 벌말마을에서 도천2리 본부락마을로 가는 2차선 도로 좌측 탑거리마을에 위치한다. 마을이름의 유래 또한 절과 관련이 있어 예전에 절이 있었고, 그 절 안에 탑이 있었다고 하여 탑거리로 부른다고 한다.

절터는 탑거리마을 입구의 첫번째 민가 주변의 밭에 해당하는데, 한림대학교박물관의 조사를 통해 토기와 기와편, 암막새편이 보고된 바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인화문토기편이 출토되어 적어도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 절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규모는 대략 500여 평으로 추산된다.

 

 

6.용석리 사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용석리 890 도장개-대촌 시 대  미상

유적의 위치는 용석2리 경로당을 지나 대촌마을에 ‘자비사’라는 신흥사찰이 있는데, 이 절 주변의 동쪽 산경사면에 해당한다. 주변에서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현재 절터에 위치하는 사찰은 30여년 전에 개창된 용화사(용화사)라는 작은 암자가 올해 초 ‘자비사’로 개칭한 것으로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를 갖추고 있다.

 

 

7.용석리 삼층석탑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용길 393 (용석리 1085-1)  금릉국교(폐) 뒤 시 대  고려시대

용석리 삼층석탑은 용석2리 용석교회 앞 영월자연학교 본관 뒤편 옛 학교 놀이동산에 있던 석탑으로, 1998년경 기단석으로 쓰이던 2중의 시멘트 부분만 남고, 탑신부 부터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석탑의 원위치는 현위치에서약 1km 떨어진 한밭이라는 마을(주촌면 용석5리)의 밭이었다고 하며, 여기에 길이 140cm, 높이 90cm의 자연석암반이 있는데 이것이 탑의 기단석 이라고 한다. 이 주변에서 기와편들이 일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추정 철종왕세자 태실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송학주천로 1504 (주천리 산18) 시 대  조선시대

추정 태실지는 주천3리 오목동마을 북쪽 야산(해발 345.5m)으로, 이 곳은 지형적으로 태봉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 가까운 곳에 금표비(1859)가 있는 것으로 보아 철종의 왕세자 태실지로 추정된다.

경기도 고양시에 이장된 태실 중에 주천면 신일리에서 이장한 태실이 있으며, 이 태실의 주인공을 철종의 왕세자로 기록하고 있는 비문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이 지역이 철종 왕세자의 태실이 있었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 추정 태봉산 정상에는 태실과 관련된 태비와 석함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9.금표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로 19-6 (신일리 산356) 시 대 조선시대(1859)

금표비는 주천면에서 주천교를 지나자마자 도로 우측변에 있는 망산 등산로 좌측에 위치한다. 비의 전면은 ‘금표’라 표기하고 후면은 ‘함풍구년이월일’라 표기되어 있어 철종왕세자의 태실과 관련된 금표비로 추정된다.

 

 

10.의호총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148 시 대  조선시대

원주에서 주천방향 402번 지방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주천면 신일교를 건너면 바로 도로 우측에 이정표가 나온다. 이 곳에서 소로를 따라 약 100m 진입하면 금산아래 경사면에 잘 정비된 금효자 부부무덤과 의호총이 위치한다. 의호총 앞 비에는 전면 ‘의호총’ 후면 ‘계해칠월일인순영분부입/고금호사사강희/경자붕유호종상삼일이사’라고 쓰여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금산 밑에 살던 금사하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한 후 어머니마저 병이 나서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봉양하여 왔는데, 갑자기 위중하므로 급히 약을 지어 와야 했다. 약방은 강 건너 주천에 있어서 배를 타고 건너야만 했다. 마침 장마가 져서 배를 붙이지 못하자 금효자는 초조하고 황급하여 어쩔줄을 몰라 울면서 강가를 오르내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는 동안 해는 져서 어두운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금효자를 업고 강을 건너가 약을 사와 모친의 병이 나았다. 그 후 금효자는 부친 묘소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이 때 호랑이가 동무가 되어 주었다. 시묘살이가 끝날 무렵, 국상이 있게 되어 금효자는 3년간 궁 방향을 바라보며 상을 치렀다. 상을 치르고 난 3일에 호랑이가 죽자 금효자는 죽은 호랑이를 부친의 묘소 옆에 묻어 주었다.

 

강원도 순영 중군이 이곳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호랑이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라고 하여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는 96cm, 너비 35cm, 폭 11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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