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정보]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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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북단에 있는 군으로 인구3만의 농어촌고장인 고성군에 있는 토성군애는

현재 어떤 문화재들이 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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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공하자님의 댓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의 문화재)

1.설악산 울산바위

종 목  명승 제100호

면 적  631,090㎡

지 정 일  2013.03.11

소 재 지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및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산 40-0, 산1-2

병풍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화강암체로서 모두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부에는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 5개가 있어 근경이 훌륭하며, 시각적 풍경뿐만 아니라 예부터 ‘큰 바람 소리가 울린다’는 의미에서 ‘천후산’이라 불리고 있어 청각적 감상도 기대할 수 있는 곳이다. 울산바위는 그 자체로도 명승적 가치를 지니지만 원경도 빼어나 특히 미시령 옛길 방면에서 보이는 경치가 웅장하고 탁월한 느낌을 준다. 울산바위에 대해서는 주세붕, 최연, 허적 등 조선시대의 수많은 문인들이 그 웅장함과 훌륭한 경치를 노래하였다. 울산바위 아래에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유서 깊은 계조암과 신흥사가 있어 문화적 의미가 더하며, 수많은 고시문이 전하며, 김홍도가 그린 실경산수화도 여려 편이 남아있어 미술사적 명승의 가치가 있다. 화강암의 독특한 풍화양상으로 만들어진 기암절벽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이로운 자연경관의 하나이며, 속초를 중심으로 동해안에서 바라보는 울산바위는 그 특유의 기복이 심한 산형이 주변의 다른 산체들과 비교되어 더욱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울산바위는 그 자체가 가지는 명승적 가치와 더불어 빼어난 조망점의 가치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설악산은 한반도 남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화강암 지형 중 가장 높은 고도를 보이는 곳으로, 특히 울산바위는 절리를 따른 풍화와 잔류 암체의 지형을 잘 보여준다. 울산바위 아래의 계조암과 흔들바위 등지에서는 미립적인 풍화에 의한 타포니와 토르 같은 아름다운 미지형들도 나타난다.

2.설악산 천연보호구역

종 목  천연기념물 제171호

지 정 일  1965.11.05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산 1-2

시 대  미상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강원도의 고성군, 인제군, 양양군, 속초시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다. ‘설악’이란 이름은 주봉인 대청봉(1,708m)이 1년중 5∼6개월 동안 눈에 덮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평균 기온이 10℃를 넘지 않는 저온지대에 속하며, 연 강우량은 내설악이 1,000㎜ 정도, 외설악이 1,300㎜ 정도이다. 설악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대규모의 화강암 관입과 더불어 암질과 절리의 차이에 따른 차별침식의 결과로 보고 있다. 천연보호구역 내의 식물은 약 1,013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신갈나무, 당단풍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등의 활엽수림과 소나무, 잣나무, 분비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섞여 숲을 이룬다. 그 밖에 금강배나무, 금강봄맞이, 금강소나무, 등대시호, 만리화, 눈설악주목, 설악아구장나무, 설악금강초롱, 솜다리 등 특산물 65종, 눈측백 노랑만병초, 난쟁이붓꽃, 난사초, 한계령풀 등 희귀식물 56종이 보고되고 있다. 천연보호구역 내의 동물은 1,562종이 보고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산양, 수달, 하늘다람쥐, 황조롱이, 붉은배새매, 열목어, 어름치 등은 별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특별히 보존해야 할 지질·지형 및 동·식물 자원이 풍부하며,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전통 사찰 등 많은 문화유산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 중의 하나이므로 설악산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3.청간정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동해대로 5110 (청간리 98)

시 대  조선시대

청간천 하구 언덕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중종 15년(1520)에 군수 최청이 고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28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누각형식 정자이다. 추녀 밑에 걸린 ‘청간정’ 현판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다.

4.고성 화암사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4호

지 정 일  1990.09.07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화암사길 100 (신평리 산136-11)

시 대  신라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화암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조선 인조 1년(1623)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3년(1625)에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고종 1년(1864)에는 지금 있는 자리인 수바위 밑에 옮겨 짓고 이름도 수암사라 하였다가 1912년에 다시 화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불에 타 훗날 법당만 다시 지었다.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준비를 위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일주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승탑군과 일부 계단석이 남아 있다.

5.고성 노상언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

시 대  조선시대

소재공 12대손 노상언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행실이 바르고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여 의로운 이을 행하여 부모에 극진한 효도는 물론 웃어른들을 공경하는 등 선비다운 행실과 선행을 다 하였다고 하여 효자칙지를 받은 후 140년전 노씨 문중에서 이 문을 건립하였으나 전쟁으로 여기 저기 옮겨 지었다가 현재 용촌2리에 재건하였다. 착지등은 분실되었으나 효행에 대한 것은 동국 명현록에 기록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자각은 1892년 세워졌으며 현판에는 "효자학생 노상언지문"이라 쓰여 있다. 100여년전 포의한사로 한 평생을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 간 노선비의 넋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6.고성 연안김씨 열녀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

시대  현대

설악봉이 마주 바라 보이는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국사봉이 솟아있고 바로 그 아래로는 요지호가 동해로 흘러가며 용촌천을 만들어 농토에 젖줄 같은 역활을 하고 있었다.

앞면에는 깊고 푸른 동해바다가 있어 수십년 전에는 이 마을을 용포동이라 이름하였고 뒤편으로는 잔잔한 언덕 같은 성황산이 성곽처럼 마을을 둘러싸 평화를 지켜주는 듯 하였다. 조선조 고종 때 노병곤이라는 분이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나이 어린 아내를 맞아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뜻밖에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니 집안은 온통 날마다 먹구름이 덮힌 듯 근심과 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다. 아내 연안김씨는 가문 높은 양가집 딸로서 나이는 어렸지만 남편의 병간호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백방으로 쫓아 다니면서 좋다는 약을 다 구하여 남편을 보살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부인은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가면서 회생되기를 바랐지만 그 정성도 아랑곳없이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그 때 남편의 나이 18세요. 부인 연안김씨의 나이는 겨우 13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 후 가신 남편의 혼을 모시고 수절하여 살아 오다가 바로 아래 동생인 노병서의 장남 재용을 양자로 삼아 부군의 대를 잇게 하였다. 부인은 양자인 재용을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시키고 동경까지 유학을 보내 조도전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맹렬여성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시부모에게는 효부였고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죽은 남편을 사모하는 열녀였다. 이런 연유로 예조 학사원에서 내리는 효부 표창을 받았고 양자인 재용에게는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현모이기도 하였다.

13세의 어린나이로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어 죽은 남편의 혼을 모시고 평생을 일편단심 사모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오다 1952년 그 생을 마쳤다.

광주 노씨 문중에서는 연안김씨의 열녀됨을 기리기 위하여 1952년 10월 10일 마을 어구에 연안김씨 열녀비각을 건립하고 그의 생존 때 업적을 새겨 영구보존케 하여 그들 후대에게 전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시대는 신분이 높을 수록 10세 내외의 조혼으로 꽃다운 젊은 시절부터 엄격한 법도에 눌려 평생을 집 문앞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여기에 으레 따르는 시집살이의 정신적, 육체적 고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내외 법이 엄격했던 그 시절의 폐쇄사회에서 얼마나 기막힌 이성으로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살아 왔을까.

오직 인종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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