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시/정보] 동해시 천곡동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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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숙제를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동해시 천곡동의 문화재의 그림과 내용을 적어 프린터로 뽑아가는 건데요...

좋은 자료가 없어서요...!

최소한 빠른 시간내로 부탁드려요~

오늘 안에는 해 주셔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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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님의 댓글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해시의 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

(강원도 동해시의 문화재)

1.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277호  

지 정 일 1998.04.06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 (삼화동 산172)

시 대 통일신라

 

삼화사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 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2.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1292호

지 정 일 1998.12.18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 (삼화동 산176)

시 대 통일신라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3.동해 향운암 소장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

종 목  보물 제1948호

지 정 일  2017. 12. 26.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발한천로 43-68 (발한동 496-4) 향운암

시 대  조선시대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는 수륙무차평등재의 기원과 의식, 절차 등에 관한 것을 모은 불교의 의례서로, 권말에 있는 김수온의 발문을 바탕으로 세조비 정희왕후(1418-1483)가 세조·예종·덕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70년(성종 1) 왕실 주도로 간행한 판본이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전적 중 성종연간(1479-1494)에 왕실과 사찰 등에서 간행된 것은 총22건이며, 이 중 향운암 소장 수재의궤의 간행연도인 1470년에 간행된 불서는 3종이다. 향운암 소장본은 왕실이 주관하여 간행한 수륙재의 기본서이자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 및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의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4.북평 해암정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지 정 일 1979.05.30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촛대바위길 19 (추암동 474-5)

시 대 고려시대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제자를 가르치며 생활할 때 지은 정자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 짓고,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언광이 다시 지었다.

 

심동로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는데, 고려말의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다가 권력을 잡고있던 간신배들이 마음에 들지않아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왕은 그를 말렸으나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의 ‘동로’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결국 허락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을 제외한 3면은 모두 4척 정도의 높이까지 벽을 만들고 모두 개방하였다.

 

이곳에는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들러 남긴 ‘초합운심경전사’라는 글이 남아 있다.

5.용산서원 학규현판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8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효자로 583 (쇄운동 200-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31년(1705) 이세필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삼척의 학문을 일으키기 위해 용산서원을 창건하고 학규 21조를 제정하여 이것을 손수 써서 판각한 것으로, 오늘날의 교칙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학규현판은 피나무판으로 가로 156㎝, 세로 48㎝의 크기이다.

 

용산서원은 그후 고종 5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가 1966년 이곳의 사림들이 유서가 깊은 서원이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건물로 새로 지어놓았다.

 

이 현판의 글씨는 글자 모양이 가장 반듯한 해자로 썼고 이것을 음각하여 교생들이 지키도록 문에 걸어 놓았으며, 표제를 ‘학규’라 하였다.

 

이것은 관학인 향교의 일정한 규범과는 다른 사학인 서원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어 서원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6.동해 심의관 고택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 동해시 단실가원1길 24 (단봉동 687)

시 대 조선시대

 

뒷쪽의 나지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집은 약 25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곳간에 의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안뜰이 있다.

 

안채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一자형 겹집이다. 오른쪽에 부엌을 두고 4개의 방이 있으며, 안뜰 쪽으로 2칸의 방앞에 툇마루를 놓아 연결통로로 활용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부엌에 연결된 곳간과 마굿간이 사랑채 쪽으로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대문이 있다. 사랑채는 ㄴ자형으로 5칸 규모이며, 왼쪽으로는 안채와의 사이에 대문칸과 행랑방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높게 배치하고 사랑채와 부속건물들은 낮게 배치하여, 통풍과 채광에 무리가 없도록 하였다. 본채에서 오른쪽으로 15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집에는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가마·병풍·함지 등의 민속생활용구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7.동해 김진사 고택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3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지가길 110 (이원동 138)

시 대 조선시대

 

오래된 소나무 숲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김형기씨의 11대조부터 살기 시작한 곳으로 조선 영조 2년(1726)에 지었으며, 그 후 많은 수리를 거쳤고 1922년에도 보수를 하였다. 행랑과 대문으로 구성된 별채는 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는 ㅁ자형의 배치를 하고 있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안채는 겹집의 형태이다. 가운데에 있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2개씩 방이 있으며, 대청 뒤쪽으로 1칸씩을 나누어 제실과 마루방을 두었다. 대청의 중앙 앞면 기둥만 원기둥으로 처리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대청의 천장은 목재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인데 우람한 대들보가 주목되며, 천장의 부재를 이어만든 간이 수납공간이 지혜롭다.

 

안채와 사랑채는 부엌으로 연결되어지며, 사랑채는 마당쪽으로 ㄴ자형의 툇마루를 놓아 출입과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안마당을 향한 부엌벽에는 두등불이 있었던 공간이 있어서, 강원도 산간 지방의 서민적 생활을 위한 설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랫방 앞쪽에 T자형 담이 있어 남·녀의 생활공간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8.동해 삼화사 소장『덕주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6호

지 정 일  2011.06.17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 (삼화동 산172) 삼화사

시 대  조선시대

표제는 ‘중례문’, 내지 첫 면에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로 되어있다. 7행 17자 6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울대규장각본과 체제가 동일하다. 권말에 ‘만력7년기묘중하충청도충주월악산덕주사개판’이란 간기가 판각되어 있어 1579년 월악산 덕주사에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수륙재의 제반 의식에 필요한 절차의 요점만을 뽑아 간결하게 정리하여 설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편찬한 의식집으로, ‘중례문’으로 약칭되기도 한다.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재 설행 시 참고서적으로 활용하였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이다. 수륙재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중국 양무제가 신승에게 감명을 받고 부처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아란의 종교체험에 의한 불설면연아귀신중경 등을 바탕으로 수륙재의 의문을 만들어 천감 4년(505)부터 중국에서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수륙재는 고려 광종 21년(970) 수륙도량을 설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충혜왕 때는 「천지명양수륙재의」등의 우리식 수륙재의문이 편찬되어 있다. 삼화사의 국행수륙대재는 태조 4년(1395)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삼척지역에 유폐되었던 공양왕의 교살에 의한 영혼을 달래고, 이와 관련된 유주무주의 고혼을 천도하여 사회적 안정을 기하려는 목적에서 매년 춘추로 설행하면서 정례화 된 국행수륙대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해 삼화사 소장 덕주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는 1579년 충주 월악산 덕주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으로 간기가 명확하고, 책의 외형[판형], 지질 등이 규장각 소장본과 체제가 동일[7행17자]하며, 희소성, 특히 오랜 동안 삼화사에서 설행한 국행수륙재의의 참고서적으로 이용하는 등 수륙재의와 연관 있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9.동해 어달산 봉수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대진동 산28

시 대 고려시대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동해 어달산 봉수대는 강원도 동해시 대진동 어달산의 정상에 있는 동해 어달산 봉수대에는 지름 9m, 높이 2m의 둥근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 때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때까지 계속하여 사용되었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전쟁을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어달산 봉수는 남쪽으로 삼척의 광진산 봉수에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강릉의 오근산 봉수에 연결되어 상황을 전한다.

10.동해 송정동 철기시대유적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84호

지 정 일 2005.03.19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송정동 산7-1 일원  시 대 철기시대

‘송정동 철기유적‘은 동해안 철기시대 유적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발굴지역에서 나타난 유구의 밀집도를 고려한다면 전체 취락의 규모는 약 1,6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규모는 집단 취락지의 범위를 넘어 과거 사서에 나오는 실직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중요한 마을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크다.

11.동해 이로동 기와가마터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86호

지 정 일  2005.04.22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이로동 700-1 외

시 대  조선시대

이 기와가마터는 남-북 방향으로 흘러내린 구릉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앞으로는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1호 가마와 2호 가마는 나란히 위치하고 있으며, 3호 가마는 1호와 2호 사이에서 깊게 위치하는데, 선대(先代)에 운영된 후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상부에서는 축적된 폐기장 유구가 발견되었다.

 

가마는 모두 황갈색의 생토층을 굴착하여 만든 지하식 굴가마로, 아궁이, 연소실, 소성실, 연도시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축방향은 북서(아궁이)→동남(연도부)이다.

 

1호 가마는 도로공사 중 가마의 연소실 쪽 천장부가 노출되면서 발견되어 분구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가마의 현존 길이는 14.4m로, 바닥면은 약 32°로 경사져 올라간다. 특히, 연소실 내의 퇴적상황을 통해 이 가마가 최종 조업시까지 적어도 2회 이상의 조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호 가마는 천장과 북동쪽 벽체도 남아있지 않으나 가마 내부의 와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마의 현존 길이는 8.72m로, 바닥면의 경사도는 38°정도이다. 특히 이 가마는 기와를 채우고 일련의 가마불 작업 후 막음불을 지피기 위해 아궁이 및 분구를 모두 막은 상태 그대로 노출되었다. 소성실은 2단의 구조이며, 상부 경사면으로는 총 7단으로 와적한 후 기와가 흘러내리지 않게 잡석으로 막아두었다.

 

3호 가마는 아궁이와 분구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가마의 현존 길이는 14.4m이며, 바닥면의 경사도는 55°정도이다. 특히 소성실은 3단의 계단식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내벽에는 거친 굴지흔이 그대로 보였다. 아궁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는 고무래가 출토되었다.

 

폐기장은 1호 가마와 2호 가마 사이의 경사면 위에 불규칙하게 퇴적되어 있는데, 단면을 조사한 결과, 총 2번의 폐기행위가 이루어졌으며, 두 시기의 기와의 문양이 대부분 동일하지만 부분적으로 다른 문양도 보이고 있어 시간적 차이를 반영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동 기와가마터는 황갈색의 생토층을 굴착하여 만든 지하식 굴가마로, 아궁이, 연소실, 소성실, 연도시설로 구성된 가마구조가 잘 남아 있을뿐만 아니라 가마의 내벽에는 거친 굴지흔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가마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다. 가마 내부에 채운 기와들의 와적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가마불 작업 후 막음불을 지피기 위해 아궁이 및 분구를 모두 막은 상태가 확인되어 일련의 작업과정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기와가마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기와의 제작과 가마 운영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12.동해 삼화동 고려고분

종 목  깅원도 기념물 제90호

지 정 일  2017.09.22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 (삼화동 산172)

시 대  고려시대

이 고분은 1972년에 진종남, 진규 두 사람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신고하면서 알려진 유적이다. 이 고분에서 수습되어 신고된 유물은 총 41점으로 고려청자 9점, 고려백자 16점, 송백자 9점, 토기 1점, 벼루 1점, 청동기 3점, 철제품 2점 등이다. 또한 2016년 발굴조사로 수정제 구슬 1점이 더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은 일반적인 계층보다 상층계층에서 사용되는 유물들로 피장자의 신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3.부곡지석묘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6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구호동 239 구호공원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인데 받침돌이 없는 형태로 판석을 받침돌 겸 석관의 벽으로 삼아 매장부를 지상에 마련한 형태이다. 석관의 남동벽은 없어졌고, 북벽은 3개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마무리 벽인 서벽은 1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다. 그 위에 올려진 덮개돌은 직사각형으로, 크기는 길이 1.76m, 너비 0.75m이다. 원래 동해교육도서관(구 남호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갈림길에 있었으며, 반달돌칼 1점이 출토되었다. 이 고인돌은 1982년 부곡동에서 동해시청 동해시의회 앞으로 이전되었으며, 2017년 고인돌의 안전한 관리를 위하여 추암동 고분군이 있는 구호공원으로 이전하였다.

14.동해 용산서원 전적류 일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지 정 일  2007.01.19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언당길 19-2 (쇄운동 357) 용산서원

시 대  조선시대

용산서원은 조선 숙종 31년(1705) 삼척 부사 이세필이 창건하여 교학에 힘썼으며, 그 뒤 여러번 중수되어 오다가 고종 5년( 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던것을 1966년 이 고장에서는 유서 깊은 서원이라 하여 이곳 사림들에 의하여 1966년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동해 용산서원 소장 전적류는 동해서원의 운영에 대해 규정한 전적들로, 18세기 삼척지방에서의 생활사와 교육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높다.

15.동해 신재공 심동로 신도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49호

지 정 일  2009.05.22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붉은언덕길 24-1 (발한동 181-1)

시 대  조선시대

이 비는 고려말 문신인 신재공 심한의 신도비이다. 심한이 1361년(공민왕10)에 벼슬을 버리고 삼척으로 낙향하자 공민왕이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동로”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후에 진주군에 봉하여졌다. 비는 동해시 발한동 시가지 도로변에 접하여, 도로를 제외한 주위가 민가에 둘러싼 비각 안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고려예의판서호신재심공신도비명’이라는 전이 있고, 전면에는 신재공의 선조와 공의 내력, 후면에는 기문과 후손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나 측면에는 내용이 없다. 비문은 사헌부대사헌 겸 경연관원자우유선인 이성보가 찬하고, 글씨는 전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지제교인 이석우가 썼으며, 영춘현감인 유한지가 전을 썼다. 비는 장방형의 농대와 가첨석을 갖추고 있는데, 농대와 가첨석은 화강암이며 농대의 하부는 시멘트로 채워진 바닥에 묻혀 있어 현재는 상면만 볼 수 있다. 가첨석은 팔작지붕 형태로 간단하게 모양만을 내고 있다. 크기는 비신이 높이 248cm, 너비 98cm, 두께 15cm이고, 가첨석은 높이 35cm, 최대 너비 125cm이며, 농대는 현재 보이는 높이 19cm, 너비 145cm, 두께 58cm이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형식으로, 4기둥은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놓여 있다. 비각의 전면은 출입용도의 쪽문을 두고 2단으로 살대를 만들었으며, 나머지 3면은 하단은 벽채를 만들고 상단만 살대를 설치하였다.

16.동해 삼화사 소장『갑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지 정 일  2011.06.17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 (삼화동 산172) 삼화사

시 대  조선시대

표제는 ‘중례문’, 내지 첫 면에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로 되어있다. 체제는 덕주사본과 같으나 41장-4행~46장-2행까지 결쇄되어 있다. 권말에 ‘만력35년정미3월충청도공주지계룡산갑사개’ 간기가 판각되어 있어 1607년 공주 계룡사에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말의 시주면 맨 끝에 ‘전오덕사지임 천규화’가 기재되어 있어, 이 책의 간행은 오덕사 주지를 지낸 천규화가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수질 차언수’라는 기록으로 보아 차언수에 의해 판각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수륙재의 제반 의식에 필요한 절차의 요점만을 뽑아 간결하게 정리하여 설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편찬한 의식집으로, ‘중례문’으로 약칭되기도 한다.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재 설행 시 참고서적으로 활용하였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이다. 한국의 수륙재는 고려 광종 21년(970) 수륙도량을 설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충혜왕 때는 「천지명양수륙재의」등의 우리식 수륙재의문이 편찬되어 있다. 삼화사의 국행수륙대재는 태조 4년(1395)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삼척지역에 유폐되었던 공양왕의 교살에 의한 영혼을 달래고, 이와 관련된 유주무주의 고혼을 천도하여 사회적 안정을 기하려는 목적에서 매년 춘추로 설행하면서 정례화 된 국행수륙대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17.동해 향운암 소장 천지명양수륙잡문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지 정 일  2015.11.06

소 재 지  강원도 동해시 발한천로 43-68 (발한동 496-4) 향운암

시 대  조선시대

이 책은 수륙무차평등재 때에 필요한 문, 표장, 방 등의 여러 가지 문식들을 모아 정리한 불교의례서이다. 천지명양수륙잡문의 원본은 중국의 소연이 지은 수륙의문이며, 1303년 원나라 무외가 이를 완보하였다. 수륙의문은 ‘자기’ㆍ‘지반’ㆍ‘중례’ㆍ‘결수’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자기’ㆍ‘지반’ㆍ‘중례’ㆍ‘결수’ 등은 각각 모두 간본이 있었다. 1463년(세조 9)년 중국에서 구하여 1464년 주자로 수십건을 인출하고 어찰에 하사하여 봉행토록 하였다. 성종조에는 금강산 표훈사에 수륙재를 설치하여 낙성한 일도 있었다. 연산조에는 천지명양수륙잡문의 간본이 너무 적어 안타깝게 여기던 중 성종의 계비였던 자순대비 윤씨(1462~1530)가 내탕금을 들여 목활자를 만들고, 200건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로도 수차례 더 간행되었던 듯하다.

향운암 소장 수륙잡문은 내용으로 볼 때 발원자 이의동(?~?)이 통훈대부 이수천(1524~1594) 등 수십인의 시주를 받고, 성일(?~?)선사 등이 서사한 것을 정언(?~?)선사 등이 판각하여 간행한 목판본임을 알 수 있다. 간기가 없어 어느 시기에 어느 사찰에서 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으나, 시주질에 나타나는 이수천과 전유(?~?) 등의 생몰년과 판식 등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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