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정보] 강릉시 교동의 문화재

본문

안녕하세요?

제가 초5인데요

우리고장의 문화재를 수집해보기가 있어요~

 제 고장은 강릉 교동입니다! 많은 답변 부탁드립니다~^^

67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1

나는덕하님의 댓글

(강릉시 교동의 문화재)

 

1.강릉향교 대성전

종 목  보물  제2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명륜로 29 (교동 233)  시 대 조선시대

  강릉향교는 옛 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학문을 갈고 닦는 곳으로,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고려 충선왕 5년(1313) 강릉 존무사였던 김승인이 세웠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불에 타, 2년 뒤 강릉도호부판관 이맹상의 건의로 다시 세웠고 몇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태종 13년(1413)에 지은 것으로 공자를 비롯해 중국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간결하게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은 바닥에 판석을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이 지방의 많은 선비와 학자를 배출한 강릉향교의 제사 공간을 대표하는 전통깊은 건축 문화재이다. 

 

 

2.향현사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6 (교동 238-3)  시 대  조선시대

강릉지방의 인물 가운데 이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분들(향현)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 인조 23년(1645)에 강릉부사 강백년과 김충각·김성원 등이 논의하여 향현들의 행적과 얼을 후세에 전하고자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강릉 대화재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21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최치운·최응현·박수량·박공달·최수성·최운우의 위패를 모셨는데 그 뒤 순조 2년(1802)에 최수, 순조 8년에 이성무·김윤신·박억추·김열·김담을 더하여 모두 12향현을 모시게 되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 이외에 대문과 재실·직사 등이 있다. 

 

 

3.계련당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9호  지 정 일 1973.07.3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2 (교동 238)  시 대 조선시대

이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고장의 발전과 미풍양속을 위해 함께 모여 의논하던 곳이다. 조선초에 지어졌으나 훼손되어 순조 10년(1810) 다시 건립하였다.

생원, 진사에 합격한 사람과 대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계련당에 모여 자신들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주민의 교화와 풍속을 바로 잡는데 힘썼다. 또한 정치활동에 대한 건의와 자문도 하던 원로원 구실을 하였다. 고종 31년(1894) 과거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모임도 함께 없어졌는데, 그 후손들이 모선계를 조직하여 관리해 오고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쪽으로는 툇마루가 있고 왼편에 온돌방, 오른편에 대청마루가 있다.

 

 

4.화부산사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7호  지 정 일 1977.11.28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67 (교동 725-2)  시 대  조선시대

신라 김유신(595∼673)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변방지역에 말갈족이 자꾸 침입하여 괴롭히자, 명주(지금의 강릉)의 화부산 밑에 장군이 머물면서 적을 퇴치하여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 후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조선 고종 21년(1884) 화부산의 밑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장군을 추모하여 오다가, 1936년 강릉역 확장으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경내에는 장군의 생애와 공적이 적힌 ‘순충장열무흥왕화산제기적비’가 있다.

 

 

5.강릉향교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9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명륜로 29 (교동 23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고려 충선왕 5년(1313)에 처음 세운 후 조선 태종 11년(1411)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태종 13년(1413)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으며, 인조(재위 1623∼1649) 때에는 크게 늘려지어 웅장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화부산 아래 경사진 곳에 위치하여 위쪽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보물 제214호)을, 아래쪽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제향공간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이를 연결하는 통로인 회랑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와 자사·증자·맹자를 모시고 있으며, 동·서무에는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2층 누대 형식의 건물로, 아래층은 기둥만 세우고 벽을 쌓지 않아 통로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서재와 부속건물 등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토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하였다.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나, 명륜고등학교를 향교에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소장되었던 책은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공부자성적도』등 70여 권만 남아있다.

 

현재 다른 지역의 향교는 동·서무에 있는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대성전에 함께 모시거나 철거하였는데, 강릉향교에서는 조선시대의 양식 그대로 모시고 있다. 또한 지방향교로는 그 규모가 웅장한 편이고, 한국전쟁 때에도 건물이 불타지 않아 옛 규모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향교이다.

  

 

6.강릉 안동김씨 삼세삼효이열지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교2동 시 대  일제강점기

안동김씨 김몽상, 김석진, 김구와 김몽상의 부인 강릉김씨, 김석진의 부인 강릉최씨 등 5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김몽상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몽상의 아들 김석진은 부모님이 위독하시자 변의 맛을 보면서 간호하였으며, 20여 년간 병든 어머니를 보살폈다. 김몽상의 아들 김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만을 먹으면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몽상의 부인 강릉김씨는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남편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낫게 하였다.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석진의 부인 강릉최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남편이 병으로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고 하늘에 낫기를 빌었다.

1807년(순조 7)년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1941년에 중수되었다. 정려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정면은 홍살문이고 나머지 3면은 판자로 둘러져 있으며, 지붕은 팔각기와지붕이다. 정면에는 '안동김씨삼세삼효이열지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효자김몽상지려', '열녀학생김몽상처유인강릉김씨지려', '효자학생김석진지려', '열녀학생김석진처유인강릉최씨지려', '효자학생김구지려'라고 새겨진 5개의 효열비가 서 있고, 안동김씨효열각중수기가 걸려 있다.

 

 

7.강릉 열녀 최종집 처 삼척김씨 지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교동 시 대  조선시대

최종집의 부인 삼척김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삼척김씨 부인은 최종집과 결혼한 뒤 두 달 만에 전염병으로 시부모님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마저 모두 죽고 말자 저승에 가서라도 시부모님과 남편을 모시겠다는 결심을 하고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정려비의 전면에는 ‘사인최종집처삼척김씨열녀비’라고 새겨져 있다.

 

8.강릉 영해이씨 이세육효지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교동 군정교 옆 시 대  일제강점기

영해이씨 이성무 · 이선무 · 이춘무 · 이양무 · 이당 · 이민 등 6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성무, 이선무, 이춘무, 이양무는 4형제로서 우애가 돈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4형제는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잉어를 먹고 싶어 하자 얼어붙은 개울가에서 하늘에 간절히 하소연하여 잉어를 구하고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 1413년(세종 13)에 4형제가 함께 포상을 받았다.

이당은 어머니가 위독하시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어머니를 열흘간 더 살게 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따라 죽었다. 조선 숙종 때 효자정려를 받았다.

이민은 이당의 형제로 아버지가 위독하시자 얼어붙은 강물을 깨고 목욕재계한 뒤 7일 동안 밤낮으로 울면서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따라 죽었다. 조선 숙종 때 효자정려를 받았다.

정려각은 6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영해이씨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단층와가 맞배지붕 건물로 주변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내부에는 6개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사효행적’, ‘이효행적’, ‘사효행적중수기’가 걸려 있다.

 

9.강릉 교동 고인돌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교1동 시 대  청동시대

강원도 강릉시 교1동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다. 1991년 지표조사 때 청동기시대 고인돌 2기가 발견되었고, 2006년 예맥문화재연구원의 지표조사에 의해 1기가 더 발견되어 총 3기가 발견되었다.

교동 1호 고인돌은 강릉시 교동 율곡중학교 남쪽 구릉 정상부에 있다. 받침돌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길이 190㎝, 폭 150㎝, 두께 30㎝의 덮개돌이 밑 부분이 흙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다.

교동 2로 고인돌은 강릉시 교동 강일여자고등학교 뒤편 능선 정상부에 있다. 덮개돌의 장축은 동-서 방향으로 크기는 길이 195㎝, 폭 170㎝, 두께 47㎝이다. 덮개돌의 동·서쪽에는 성혈(性穴) 2곳이 나 있으며, 남·북쪽에는 받침돌이 남아 있다.

교동 3호 고인돌은 2호 고인돌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능선 정상부에서 발견되었다. 받침돌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길이 160㎝, 폭 145㎝, 두께 50㎝의 덮개돌이 밑 부분이 흙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다.

전체 274 건 - 18 페이지
댓글 제목
댓글+1
댓글+1
댓글0
댓글+1
댓글+1
댓글+8
댓글+1
댓글+6
댓글+2
댓글+1
댓글+1
댓글+2
댓글+2
댓글+1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