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정보] 영월군의 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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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저는 초등학교5학년인데 쌤님이 영월군의 무형문화재를 조사해오라고 하셨는데 잘모르겠어서요
구체적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체계적으로 영월군의 무형문화재를 써주세요
내공200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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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리님의 댓글

(강원도 영월군의 무형문화재)

1.영월 단종제례

종 목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22호  지 정 일 2011.04.22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34번길 11-4 (영흥리 1017-21) 기능보유자  영월단종제례보존위원회 

조선 중종 11년(1516)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우승지 신상을 보내 치제한 것으로 시작되어 숙종 24년(1698) 확립된 영월 단종제례는 장릉에서 올리는 유교식 제례의식으로 체계적 보존⋅전승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1791년(정조 15)에 시작된 배식단의 충신제향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크다.  

2.영월 칡줄다리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월 칡줄다리기는 단종이 복위된 조선 숙종 때인 1700년부터 300여 년간 이어져 온 전통 민속놀이 이다. 원래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영월사람들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단종을 모시는 당집에서 고사를 지낸 다음 준비한 칡줄을 가지고 동강 변으로 나와 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 양편으로 강변에 나눠 서서 줄다리기를 하였다.

줄다리기가 끝난 후 부녀자들은 아들을 낳는다는 비방으로 쓰기위해 칡줄을 잘라 품에 감추고 가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 중단되었던 칡줄다리기는 1967년 단종문화제 때 다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칡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의 제작기간만 한 달 남짓 소요되며 행사전날 100여명의 줄꾼이 칡줄을 메고 운반하는 시가행진도 장관이다. 33m의 길이와 6톤에 달하는 칡줄을 줄꾼이 동강을 중심으로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암수 줄을 결합시킨 후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새를 지낸 다음 편장들의 지휘아래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줄다리기가 끝난 후 부녀자들이 아들을 낳는다는 비방으로 쓰기위해 칡줄(수줄)을 잘라가는 풍습이 남아있다.   

3.띠놀이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 영월군 영월읍

열두 띠의 동물의 속성에 빗대어 단종의 애사를 풍자한 민속놀이로 강원도 영월에서 전승된다. 이 놀이의 배경과 내용은 단종의 불운한 일생과 관련되어 있다. 단종은 태어나서 이틀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또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실권을 빼앗겼고, 다시 2년만에 왕위마저 내놓아야 했다.

그 뒤 2년만에 영월로 귀양갔으며, 또 그 뒤 2년만에 세상을 떠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왕이다. 그 시절 백성들은 그를 기리고 동정하며 안타깝게 여겼다. 한가한 농촌 사랑방에 모여 앉은 촌로들은 단종의 일생을 술자리에서 늘 화제로 삼았고, 그의 띠를 따져보는 데서 이 놀이는 비롯되었다고 한다.

놀이의 내용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단종은 신유생이니 닭띠였다. 닭띠인 한 사람이 말하기를 “닭띠의 운명이 그렇게 기구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고 하면서 계유오덕을 설파하고 닭띠자랑을 늘어놓는다.

“정기의관예지덕야(正其衣冠禮之德也 : 의관을 단정히 하는 것은 예의 덕이요), 무위시보신지덕야(無違時報信之德也 : 어김 없이 때를 알리는 것은 믿음의 덕이요), 상호취식인지덕야(相呼取食仁之德也 : 음식을 서로 나누어먹는 것은 어진 덕이요), 상계방위지지덕야(相戒防衛智之德也 : 함께 경계하고 방위함은 지혜의 덕이요), 임전불퇴의지덕야(臨戰不退義之德也 :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음은 의의 덕이다).”라고 하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긍정하며 단종의 운명을 동정한다.

그러자 그는 신이 나서 닭띠자랑을 계속한다. 그 말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듣기에 역겨웠던지 소띠인 사람이 “띠는 소띠가 제일이지. 우리는 먹어야 살고, 먹자니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를 짓자니 소의 노력 없이는 할 수 없지. 그뿐인가 소는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하니 그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는가.” 한다.

이 때 개띠인 사람이 분연히 말을 받는다. “개는 집을 지켜주는 것은 물론이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는 개를 따를 동물이 없다. 만약 개의 충성심을 본받는다면 단종도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마땅히 개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말띠인 자도 그냥 있지 않는다. “주인 알아보기야 말이 제일이지. 말은 어떠한 경우도 사람을 밟지 않는 의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나라를 지키는 데 말의 공을 생각하면 어찌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다.

그러자 범띠인 사람이 우습다는 듯이 말참견한다. “그야 동물의 왕자는 호랑이지, 쥐·닭·소·말 따위가 큰소리를 할 수 있느냐.”고 큰소리를 한다.

이 때 용띠인 자가 점잖게 말한다. “하늘에 있어서 우매하고 의리 없는 인간들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며, 비를 내려주고 바람을 일으키는 풍운조화를 이루는 용이 제일이 아니냐?” 이렇게 하여 좌중은 주기가 돌고 흥겨운 분위기가 고조되어간다.

이처럼 농촌에서는 술자리에서 띠 놀이를 자주 하게 되었는데, 동물의 전설이나 시구에 조나 노래곡조를 붙여 부르며 동물 탈을 만들어 쓰게 되었고, 마침내 농악에 맞추어 흥겹게 노는 마당놀이로 발전하여 전승되었다.

이 놀이는 말과 개와 용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민중의 울분을 우화적으로 엮어나간 자연발생적인 민중극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82년 제16회 단종제(端宗祭) 때부터 띠놀이가 재현되고 있다.  

4.능말 도깨비놀이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영월 능말 도깨비놀이는 오래된 영월의 전통 놀이로 “옛날 장릉 근처 마을에 살던 한 노인이 꿈속에서 땔감을 하러 산에 올랐다 도끼로 소나무를 찍었는데 갑자기 도깨비들이 나타나 귀하신 어른이 잠든 곳의 나무를 건드리면 용서치 않겠다고 호통을 치자 달아나다 뒤를 돌아보니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상대방의 혹 떼기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만들어졌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지금도 장릉 마을 사람들은 농한기가 되면 도깨비 탈을 만들어 쓰고 혹 떼기 놀이를 즐기면서 장릉을 수호하는 도깨비들의 노고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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