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정보] 강릉시 성산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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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 마이마이 드릴테니까 우리고장 강릉시 성산면의 문화재좀 알려 주세요

내공냠냠 잇으면 신고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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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의 문화재)

 

1.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탑

종 목  보물  제19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보현길 396 (보광리 1171) 보현사  시 대 고려시대

보현사에 자리하고 있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무너져있던 것을 사찰입구에 복원해 두었다가, 1991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산꼭대기 주변으로 옮겼다.

 

탑신을 받치는 기단은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가운데받침돌이 없어져 아래받침돌 위에 바로 윗받침돌이 얹혀있다. 탑신의 몸돌 한쪽 면에는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경사가 급하고,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낭원대사오진탑비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부도도 이 때 같이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2.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탑비

종 목  보물  제19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광리 1171) 보현사  시 대 고려시대

보현사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834∼930)의 탑비로,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왕은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용의 머리를 갖춘 거북받침돌은 등에 6각의 벌집 모양이 채워져 있고, 중앙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비를 꽂아두는 부분)가 마련되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기고 그 위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을 힘차게 조각해 놓았다. 꼭대기에는 석탑에서처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1단의 보륜(바퀴모양의 장식)을 갖추고, 화염에 싸인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고 있어 특이한 모습이다.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이 글씨를 썼다. 

 

 

3.대관령 옛길

종 목  명승  제74호  면 적 519,156㎡ 지 정 일 2010.11.15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삼포암길 133 (어흘리 산2-1), 등

대관령은 삼국시대부터 관련 지명이 사서에 기록된 곳으로, 대관령 옛길은 오래 전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역로이자 교통로로서, 영동지역민들에게는 관문이자 강릉의 진산인 곳이다.

대관령 옛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이래 주요 교통로의 역할뿐 아니라 이 길을 이용한 수많은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며, 또한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길로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대관령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주변 계곡과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4.오봉서원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지 정 일 1973.07.31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서원길 28-7 (오봉리 58-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명종 11년(1556) 강릉부사 함헌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오도자가 그린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와 명종 16년(1561)에 처음 세웠다. 그 후 정조 6년(1782)에는 주자, 순조 6년(1806)에는 송시열을 함께 모시면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서원은 없어지고 영정과 위패는 강릉향교로 옮겨졌다.

 

지금의 서원은 1903년에 새로 지어졌는데 강릉지방의 유림이 사당건물을 지어 집성사라 하고, 사당 옆에는 별묘를 세워 칠봉사라 하였다. 집성사·칠봉사·문·오봉강당·묘정비각·2개의 묘정비 등이 남아 있다.

 

집성사에는 공자·주자·송시열 3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칠봉사에는 함헌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강당은 마루방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각종 행사를 치르기도 하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나 학문을 토론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음력 9월 2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5.임경당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지 정 일 1974.09.09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소목길 18-26 (금산리 445)  시 대  조선시대

임경당 김열의 별당이다.

임경당은 이율곡(1536∼1584)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율곡은 집 주변에 소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청빈하게 살아가던 임경당을 높이 칭송하면서 선물로 호송설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여 2단의 장대석 위에 지어진 집으로, 별당 이름은 김열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임경당의 뒷쪽에 위치한 ㅁ자형 집은 본채로서 임경당과 함께 수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안에는 율곡의 호송설과 김열이 직접 쓴 송어시를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6.상임경당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5호  지 정 일 1976.06.17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갈매간길 8-3 (금산리 620)  시 대 조선시대

임경당 김열의 덕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지은 별당건축으로, 임경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6호)보다는 높은 산세를 배경으로 위치하고 있다.

임경당보다 규모가 조금 작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1칸 규모의 대청과 1칸의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앞면 가운데의 2기둥은 원기둥이고, 양 옆의 기둥은 4각기둥으로 이루어졌다.

건물 안에는 친하게 지내던 율곡 이이가 김열에게 선물로 지어준 ‘호송설’을 새긴 현판과 유당 김노경이 쓴 ‘임경당’현판이 걸려있다. 

 

 

7.강릉 보광리 석조여래좌상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지 정 일 1992.06.10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삼왕길 139-98 (보광리 산400)  시 대 고려시대

현재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에 세워져 있는데,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자리는 아니고 출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와 부처가 앉은 자리인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광배의 윗부분이 깨어졌고, 부분적으로 마모된 곳이 있기는 하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광배와 불상은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들었다.

얼굴에는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입의 양끝이 아래로 처져 있다. 양무릎은 평면적으로 조각되었으며, 손은 가늘고 빈약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였고, 왼손은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광배는 2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는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안쪽에는 넝쿨무늬(당초문)을 새겼다. 대좌는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윗단과 아랫단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투박한 얼굴 모습, 신체에 비해 빈약한 팔과 손, 대좌 윗단의 꽃무늬 표현 등의 특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8.강릉 관음리 오층석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지 정 일 1992.06.10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774  시 대  고려시대

2층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의 석탑으로, 주변에 절터로 보이는 건물터와 석불의 대좌로 보이는 석물 등이 남아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글넓적한 안상을 얕게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는데, 1층 몸돌은 큰 편이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낮아졌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고, 네 귀퉁이는 높이 치켜 올라갔는데, 각층이 비슷한 크기로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 받침) 위로 앙화(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돌의 받침수가 3단으로 줄고,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큰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9.명주군왕릉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12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285

시 대 통일신라

 

신라하대의 진골 귀족으로 강릉 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의 묘소이다. 그가 명주군왕으로 봉해졌기에 왕릉이라고 부른다.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5세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의 5세손이라고 하며, 선덕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자 왕가의 혈족인 그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가 경주로 가는 중에 큰 비가 내려 강을 건널 수 없어 회의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 신하들은 하늘이 그를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함이니 다른 사람을 뽑자하여 김경신(후의 원성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주원은 이듬해 선대로부터 인연이 있는 명주(지금의 강릉)로 와서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명주군왕 ’으로 봉해졌으며,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원성왕은 그에게 통천에서 평해까지의 동해안 일대를 식읍(공신에게 주는 땅)으로 주었다.

 

현재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긴 사각형의 둘레돌을 두른 묘 2기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가 있다.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동물석상이 한 쌍씩 세워져 있고, 동네 입구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10.강릉 대공산성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28호

지 정 일 1979.05.30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광리 1171)

시 대 삼국시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대공산 봉우리에 있는 산성으로, 둘레는 약 4㎞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산은 보현산이라 하고 산성은 보현산성으로 불리며, 둘레가 1707척이라고 하였다. 대관령과 연결된 산맥에 자연적인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소금강에 있는 금강산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북쪽의 성벽은 험준한 절벽을 이용해 쌓았는데 거의 붕괴되었고, 지금은 남쪽 방면으로 높이 2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남쪽의 성벽은 다듬지 않은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동·서·북쪽에는 성문터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약 1000여년 전에 쌓았다는 우물터가 아직도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발해의 왕족인 대씨(大氏)가 쌓았다고 한다. 

 

조선 고종 32년(1895) 이른바 을미의병 때에 민용호가 이끄는 의병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11.강릉 보광리 분청자요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69호  지 정 일 1994.09.23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711-2외 5필지  시 대  조선시대

요지는 자기나 기와, 그릇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명주군 왕릉에서 서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지점의 언덕지대로 산 기슭에서 아래쪽 계곡에 닿는 경사지의 중간지점에 있다. 강원도에서 발견된 가마터 중 유일한 분청사기 가마터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자기소는 보현촌의 서쪽부근에 1곳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습된 분청사기와 청자조각들은 대접과 접시종류가 대부분이며, 그릇의 안쪽에 흑상감된 연당초문대접과 분청인화국화문접시, 분청인화연판문대접들과 약간의 백자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수습된 도자기 조각의 문양을 보아 대체로 15세기 전반의 분청사기 가마로 추정된다. 

 

 

12.보현사 대웅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광리 1171)  시 대  조선시대

보현사는 신라 진덕여왕 4년(650)에 자장율사가 세운 절이다. 후에 낭원대사가 고쳐 세웠고 ‘지장선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세운 건물로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흙으로 만든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고, ‘도광 2년(1822)’이라고 쓴 기록이 있는 후불탱화와 ‘가경 4년 기미(1799)’라는 기록이 있는 탱화가 있다.

건물 앞에는 석탑재와 석사자 등 화강암 석재들이 남아 있다. 

 

 

13.강릉 함대식 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92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길 216-3 (위촌리 579)  시 대  조선시대

1910년경 현 소유자의 조부 함영익 씨가 지은 집으로 당두댁으로 불린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에 ㄱ자형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다. 원래 툇마루는 없었으나, 50년 전에 흙마루를 시멘트 마루로 수리하면서 새로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외양간과 곳간은 옆면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다.

담은 돌과 흙을 섞은 토담으로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14.강릉 위촌리 경모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송두길 57-28 (위촌리 551) 시 대  현대

강릉최씨 필달계 최문옥, 최원량, 최안린, 최세번, 최인언 등 다섯 명의 제향을 위해 건립한 재실로 송북재실 또는 송북전사청이라고도 한다.

사우는 정면 4칸, 측면 1칸 목조와가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최문옥은 고려낭장요무장군을 지냈으며 1982년 9월 2일 후손들에 의해 설단이 설치되어 매년 음력 9월 15일에 제사를 봉행한다. 최원량의 호는 동강이며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정선·영월군수를 지냈으며 삼사좌윤도 지냈다. 조선조에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99세의 장수를 누렸다. 1965년 후손들에 의해 설단이 설치된 후 매년 음력 9월 15일에 제사를 행한다.

최안린은 동강의 장자로 호는 동헌이고 고려국자생원에 합격하였고 조선 조에 가선대부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최세번은 최안린의 증손으로 1466년(세조 12)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평·함창현감을 지냈고 통훈대부통례원좌통례에 증직되었다. 최인언은 최세번의 손자로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통례원좌통례에 증직되었다.

 

 

15.명주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시 대  통일신라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장안동의 북쪽 구릉에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km이고, 성의 높이는 외측 3~5m, 내측 1~1.5m이다.

 

성벽은 변성암과 세립질 화강암으로 축조되어 성벽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성의 내부에서 몇 개의 건물지와 토기 및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명주성’이라고 새겨진 와당이 발견되었다. 명주성은 신라 하대에 왕위계승에 실패한 김주원이 강릉으로 낙향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16.강릉 산북리 경모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칠봉로 252 (산북리 152) 시 대  조선시대

칠봉 함헌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함헌은 본관은 강릉, 자는 가중, 호는 칠봉으로 예빈시정을 역임하였으며 윤인서, 홍춘년 등과 함께 오봉서원을 건립하였다.

사우는 1700년경에 건립하였으며, 1965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1990년 10월에 중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기와지붕으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강릉부사 조명하가 쓴 경모재사기, 조철영이 쓴 경모재이건기 등이 걸려 있다. 매년 9월 20일에 제향하고 있다.

 

17.자호재영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353-1번지 시 대  조선시대

자호재 이택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택징은 1735년(영조 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 수령으로서 백성들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받았으며, 정조 때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사우는 원래 1865년(고종 2)에 현재 영당의 위치에서 50m 정도 앞쪽에 건립하였으나 192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자호재영당이라는 간판과 영정이 걸려 있는데, 영정은 한국전쟁 때 원래의 것이 없어지고 새로 그려서 봉안하였다.

 

18.청간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837번지 시 대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김시습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산거백영》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영월의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사우는 1769년(영조 45)에 처음 건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54년에 재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와즙 건물로 내부의 정면 중앙에 김시습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좌측에는 매월당영각중건상량문과 청간공영당중건기가 걸려 있다.

 

 

19.칠봉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서원길 28-7 (오봉리 58-6) 시 대  조선시대

칠봉 함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우이다. 함헌은 본관은 강릉, 자는 가중, 호는 칠봉으로 예빈시정을 역임하였으며 윤인서, 홍춘년 등과 함께 오봉서원을 건립하고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사우는 1675년(숙종 1)에 오봉서원 경내 좌측에 건립하였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중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06년 재건되었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와가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안에는 함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20.오봉서원 묘정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서원길 28-7 (오봉리 58-6) 시 대  조선시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오봉서원의 앞마당에 있다. 비석은 비좌,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좌와 비신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전체 높이는 213cm이고, 비신은 높이 163㎝, 두께 20㎝, 너비 77㎝의 크기이다. 비문은 공조·형조판서를 지낸 조두순이 지었고, 강원도관찰사, 형조·병조·공조·이조판서를 역임한 이종우가 글씨를 썼다.

 

오봉서원은 1561년(명종16)에 건립된 서원으로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묘정비는 원래 건립과 함께 세웠으나, 1856년(철종 7)에 우암 송시열을 배향한 사실을 추가로 기술하여 다시 세웠다.

 

21.효자 이동규 지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1리 마을회관 옆 시 대  조선시대

이동규의 아버지 이선빈은 풍수에 조예가 매우 깊었다. 어느 해 한 상가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그 묘자리가 공교롭게도 그 상가의 종인 개산의 아버지 묘자리와 가까웠다. 그러자 개산은 이선빈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으며 이후 개산은 남몰래 이선빈을 독살하였다. 이동규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슬퍼하면서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필경 개산의 원한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했음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상가에서 식사를 하는 가운데 국그릇에서 굉음이 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그릇은 온전하였다. 이동규는 이를 이상히 여기고서 개산을 관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개산이 완강히 부인하여 7대의 관백이 이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동규는 부친의 원한을 풀기 전에는 상을 벗지 않겠다 하여 상복차림으로 매일 같이 관에 읍소하면서 17년의 세월을 보냈다.

강원감사 유복명은 이동규의 애절한 사연을 접하고 그 처지를 가엾게 여겨 그간의 전후 문서를 살핀 뒤 개산의 죄상을 밝히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개산은 장형으로 처형되었다. 이동규는 개산의 배를 갈라 그 간을 씹었다 하며, 이후 처음으로 상복을 벗었다고 한다.

강릉부사 유의양이 이동규의 효행을 계달하여 정려를 받았으며, 효행비는 1823년(순조 23) 후손 이심간과 이심범에 의해 건립되었다.

효자각 주위는 철제 담이 둘러져 있으며, 효자각은 단층 와가 맞배지붕으로 용문과 연화문양으로 단청되어 있다. 효자각 안에는 효자비가 있다. 효자비는 화강암 재질의 방형비좌 위에 오석 비신이 있고 그 위에 화강석 재질의 옥개석이 있다. 비각 안에는 ‘효자이공동규정려비각기’라는 현판이 있다.  

 

22.효자 최기원 지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2리 시 대  조선시대

최기원은 금란반월회 사석이었으며 강릉 향현사에 배향된 수헌 최응현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스럽게 섬겼다. 최기원이 8살 때 부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소생케 하고, 이러한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1608년(선조 41)에 효자정려를 받았다. 효자비는 1798년(인종 3)에 최기원의 5세손 최덕민과 최동맹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와가 목조 비각은 맞배지붕이고 비각의 외부는 연화문으로 단청하였다. 내부 전면의 평방에는 호상, 좌우 측면에는 청룡상과 황룡상이 채색되어 있다. 비각의 4면은 회벽이고 철제문을 단 시멘트 담으로 둘려져 있다. 비석은 방형 좌대위 오석 비신과 옥개석 형태의 비두로 만들어 졌다.

 

23.강릉 보현사 승탑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광리 산 544)  보현사 입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한 줄에 10기씩 두 줄로 20기의 석종형부도가 세워져 있다. 이 중 15기는 ‘화곡당대사탑’, ‘월암당대사사리탑’ 등 주인의 이름을 부도 탑신에 새겨 놓았다.

 

부도는 대부분 보주와 탑신 사이에 연주문을 갖춘 돌대문을 조식하고 있다. 이 중 몇 기는 약식화하여 돌대문만 표현하였다. 크기는 평균 110cm 정도이고, 가장 큰 것은 153cm이다.

 

24.강릉 보광리 승탑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926번지  청간사  담장 옆 시 대  조선시대

원래는 이 지역에 사찰이 있었으나 1828년(순조 28)에 청간사가 건립되고, 조선 명종 이후 김주원 묘역이 확장되면서 사찰이 훼손되고 부도만이 남았다.

 

부도는 상륜부에는 보주를 놓고 탑신과 상륜 중간에 1개의 돌대문을 돌렸다. 전체 높이는 133cm이고, 보주는 13cm, 돌대문은 3cm의 높이이다. 지대석의 높이는 14cm, 탑신의 높이는 117cm이다. 둘레는 탑신 하부가 144㎝, 중간은 220㎝, 돌대문은 84㎝, 보주는 58㎝이다.

 

25.강릉 김경휘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시 대  조선시대

  김경휘(1553~1613)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김경휘는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아버지가 위독하시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아버지를 7일 더 살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같은 효행이 조정에 알려저 선조 때 효자 정려를 받았으며, 1806년(순조 6)에 후손 김한벽과 김병행이 김경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에 효자각을 세웠다. 정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단층 와가건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내부에는 후손 김연집이 지은 중수기와 김윤경이 지은 효자각중수상량문이 걸려 있다.

 

26.강릉 김원기 가옥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436번지 시 대  조선시대

‘ㅁ’자 형 배치가옥으로서 안채, 안마당, 사랑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도리 구조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부엌의 종도리를 크게 하고 원호 모양으로 다듬었다. 우물마루와 방 사이에는 네 짝 세살문을 달았고, 방의 측면에 작은 마루를 깔았다. 방과 방 사이는 외짝 미닫이문을 달아 서로 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규모로 화강암을 초석으로 그 위에 각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겹도리에 팔작기와지붕을 올렸다. 사랑방에는 두 짝 세살문을 달았으며, 각 방과 마루 사이는 네 짝 미세기문을 달아 손님이 많을 때 큰 방으로 사용하였다. 사랑방의 앞면에는 머름대와 머름판을 둘렀으며,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사당은 정면 2칸, 곳간은 정면 1칸의 규모이고, 각각 맞배지붕을 올렸다.

 

27.명의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길 320-20 (관음리 980) 시 대  현대

통덕랑을 역임한 김니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사우는 정만 3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 건물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상당 부분이 파손된 상태이다. 외부는 슬레이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김연종이 예서체로 쓴 ‘명의재’ 현판이 걸려 있다. 현재 사우의 오른쪽 산에 있는 묘소에서 매년 음력 3월 20일에 제향하고 있으며, 사우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소실된 재실을 한국전쟁 직후 몇 년 지나서 재건립하였으나 우중을 제외하고는 재실 오른쪽 옆 산에 있는 묘소에서 제사(음력 3월 20일)을 지낸 까닭에 재실은 무명무실 한 채 오늘날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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