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정보] 춘천시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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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의 문화재의 대해 알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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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냥님의 댓글

(춘천시의 문화재)

1.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종 목  국보  제124호  지 정 일 1967.06.21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 손가락을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 손가락을 편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어서 같은 곳에서 발견된 한송사지 석불상(보물 제81호)과 반대이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2.춘천 근화동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7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당간지주길 61 (근화동 793-1)

시 대 고려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 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의 양 쪽에 서서 이를 버티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춘천시내에서 의암호를 따라 춘천역으로 돌아가는 도로 옆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꾸밈새가 없는 간결한 형태이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는 2단으로 이루어진 당간의 받침돌이 놓여져 있는데, 아랫단은 둥근조각이 있고, 윗단은 16잎의 연꽃조각이 돌려져 있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형을 이루고 있고,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켰던 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을 다듬은 기법이나 연꽃잎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3.춘천 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7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강원도 춘천시 서부대성로 9-19 (소양로2가 162-2)

시 대 고려시대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후부터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4.춘천 청평사 회전문

종 목 보물 제16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길 779 (청평리 669)

시 대 조선시대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 승현선사가 세워 백암선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몇 번에 걸쳐 고치고 절을 넓혔는데 청평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명종 5년(1550) 보우선사가 이곳에 와 다시 고쳐 세운 뒤부터이다.

청평사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짜여 있는데,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이 절의 서쪽 언덕에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극락전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5.허목 초상

종 목  보물  제1509호  지 정 일 2007.02.27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미수 허목(1595-1682)의 초상으로 오사모에 담홍색의 시복을 입고 서대를 착용한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다. 화폭 상부의 제발문에 따르면 1794년(정조18) 정조가 허목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그 칠분소진을 얻고자 채제공으로 하여금 사람들과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은거당(1678년 숙종이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진을 모셔다가 이명기가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정의 오른 쪽에는 채제공이 당시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이 은 생시진상은 아니지만 현재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 실정에서 17세기 대표적인 사대부초상화의 형식을 보여줌과 아울러, 노학자의 문기어린 풍모를 잘 전달해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이명기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ㅇ 규격(세로x가로) : 72.1 x 56.8 cm(그림), 28.6 x 65.8 cm(발문)

6.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1873호

지 정 일  2015.04.22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까지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읍옥평) 들판에 방치되어 있던 다섯 구의 철불 가운데 하나로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불상은 전체높이 110cm로 등신대에 가깝고, 어깨는 둥글게 처진 모습이며, 신체 비례가 살아있는 사람과 흡사하다. 조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나말여초기의 불상으로 철불의 제작기법 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약사여래의 도상을 알려주며 원주지역에서 유행했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므로 한국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7.춘천 신매리 유적

종 목  사적  제489호   지 정 일 2007.11.14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신매리 302번지 등  시 대 신석기~삼국시대

춘천 신매리유적은 북한강 옆의 충적대지에 형성된 취락유적으로 198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처음 발굴조사 한 이후 한림대학교박물관,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지속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무덤이 밀집 분포된 복합유적으로 확인된다.

특히 지난 1996년 신매대교 접속도로 개설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이른 시기에 속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기를 달리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출토되어 우리나라 동북지역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춘천신매리유적을 후세에 길이 보존 전승을 위하여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 하고자 한다.

8.청풍부원군 상여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2.08.07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우석로 70 (석사동 95-3) 국립춘천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초상때 나라에서 하사하여 사용하였던 상여이다. 청풍부원군은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둘째 아들로서 본관이 청풍이며 현종의 장인이다.

상여는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기구이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밝은 천을 넓게 펼친 모습이다. 몸체에는 봉황머리와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고, 검은 천 위에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려는 의미로 보여진다.

요여는 혼백과 죽은 이의 이름을 적은 위패를 모셔 나르는 작은 가마이다. 긴 멜대 위에 사각형의 방처럼 생긴 몸체를 얹고 맨 위에 네 개의 지붕선이 표시된 반구형의 지붕을 올렸다.

명정대는 붉은 천에 청풍부원군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깃발로서 상여의 오른쪽에 세워두었다가 시신을 운반할 때 영구 앞에 서서 행차를 표시하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만장대는 망자를 애도한 글을 적은 깃발로 명정의 뒤쪽으로 배치된다.

조선 숙종대에 만들어진 이 상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양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궁중에서 쓰던 상여인 ‘대여’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9.위봉문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중앙로5 (중앙로1가 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24년(1646)에 춘천 부사로 있던 엄황이 관청 옆에 문소각이라는 건물을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고종 27년(1890)에 민두호가 왕의 명령으로 문소각을 넓히고 고쳐서 이궁(임금이 여행하는 중에 머무는 궁전)으로 삼았는데, 위봉문은 이궁의 내삼문이었다. 1916년에 문소각 건물은 불에 타 없어지고 누각인 조양루와 위봉문만 남게 되었다. 그 뒤 1955년에는 위봉문을 도청 뒤편으로 옮겼고, 1972년에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강원도 영서지방에 남아 있는 내삼문(솟을대문) 중 온전하게 양식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10.조양루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중앙로1 (우두동 산5)

시 대 조선시대

 

이 누각은 조선 인조 24년(1646) 때의 춘천부사 엄황이 문소각을 세울 때 위봉문과 함께 지은 문루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종 융희 2년(1908)에 현 위치인 우두산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긴 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매우 높게 꾸몄으며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11.서상리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리 247

시 대 통일신라

 

양화사터에 남아 있는 3층 석탑이다. 주변에 절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탑만이 홀로 남아 옛 터를 지키고 있다.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려진 모습이다. 현재 기단은 아랫부분이 땅속에 묻혀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려우나, 2층 기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윗부분만 드러나 있는 아래층 기단 위에 위층 기단이 놓여 있는데 네 모서리에 새긴 기둥표현과 맨윗돌의 비스듬한 경사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탑신은 1층에서 높다가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이 너무 급하게 줄어들어 다소 균형을 잃은 듯도 하지만 각 부의 구성이 간결하여 단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12.춘천향교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8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삭주로 21 (교동 27-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전하지 않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27년(1594)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으며, 한국전쟁으로 불탄 것을 1960년에 복원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장수루·동재·서재·동무·서무·내삼문 등이다.

대성전은 사당으로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하였다.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수춘향약』·『향중좌목』·『향안』 등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

13.춘천 장절공 신숭겸 신도비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지 정 일 2009.05.22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신숭겸로 272-71 (방동리 821-1)  시 대 조선시대

1805년(순조 5) 건립한 신숭겸 신도비는 비각을 건립하여 보관하고 있다. 비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형태인 팔각지붕형 갓석과 비신, 비대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김조순이 썼으며, 글씨는 신위가 썼고, 전자는 서매수가 썼다. 신위는 조선시대 4대 명필가였으며, 서매수는 당시 좌의정이었다.

비의 규모는 비신의 높이 228cm, 폭 106cm, 두께 39cm이다.

춘천시 서면 방동리 821-1번지내에 위치하고 있는 신숭겸 신도비는「신장절공 묘역」(강원도 기념물 제21호, 1967.6.17 지정)과 인접하여 있으며 주변의 금산리에는「춘천 한백록 묘역 및 정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1호, 2000.11.18 지정)이 위치하고 있다. 

 

14.춘천 혈거유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한림대학길 1 (후평동 671)  시 대 석기시대

신석기시대 말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동굴 주거지이다. 1962년 성심여자대학교(현재의 한림대학교)의 신축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봉의산 중턱 동쪽 기슭의 경사면을 이용해 동굴처럼 파서 만든 것으로, 내부바닥은 직경 4m의 원형이고, 천장의 최고 높이는 2.1m이다. 또한 천장에 연기로 그을린 흔적이 있어 당시 불을 사용하던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이후에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나 무덤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3인의 사람뼈가 발견되었고, 돌도끼, 돌화살촉, 돌끌, 돌방망이, 빗살무늬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약 5000년전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15.천전리 지석묘군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4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685-7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원도 춘천 천전리에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발굴조사 때 10기가 무리지어 있었으나 현재는 5기가 남아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2.6∼2.2m 정도이고, 받침돌의 높이는 1.12m이며 돌화살촉 3개, 대롱구슬, 민무늬토기 조각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춘천 천전리 지역에서 고인돌이 무리지어 발견된다는 점은 이미 춘천분지에서 부족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면서 소양강변에서 농경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 우리나라 선사시대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16.춘천 중도 적석총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19호

지 정 일 1976.06.17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중도동 595-1  시 대 철기시대

강원도 춘천시 의암호 가운데에 있는 섬인 중도에 있는 원삼국시대 무덤이다.

중도는 옛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지리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어 선사시대 집자리와 무덤유적이 남아있다. 중도 남쪽 끝에 있는 2기의 돌무지무덤(적석총) 중 1981년 1기에 대해 발굴이 이루어 졌다. 규모는 4변의 길이 15m이고 높이는 4m로 강돌을 이용하여 벽을 만들었다. 내부는 모래와 흙을 얇게 깔고 그 중앙에 강돌로 널방(현실)을 만들었으며, 널방 위와 주변은 다시 돌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 내부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조각과 청동제 귀고리, 작은 쇠칼, 쇠화살촉을 비롯한 철기제품이 출토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편과 주변의 집자리에서 나온 토기편을 비교해 본 결과, 무덤주인은 2∼3세기경 이 지역 지배자로 추정된다.

중도의 돌무지무덤은 춘천지역이 북한강 일대의 중심지역으로 원삼국시대에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였음을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7.김청풍부원군 묘역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20호

지 정 일 1976.06.17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경춘로 667-9 (안보 1리 155-1)  시 대 조선시대

영의정 김육의 아들이며, 조선 현종의 장인인 충익 김우명(1619∼1675)의 묘역이다. 인조 20년(1642)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 참봉, 세마, 영돈녕부사,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우명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부원군의 대접을 하기 위하여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증리에 묘소를 하사하였다 한다. 시신을 배에 싣고 한강을 거슬러 가던 중 현재의 묘소 앞의 강에 이르렀을 때 배가 움직이지 않고 돌풍에 명정(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산으로 날아갔다. 명정이 날아간 곳으로 가보니 그곳이 명당이어서 하사한 땅을 취소하고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강원도 내에 있는 왕릉 이외의 묘지에는 담장이 없는데, 이 묘소는 담장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묘비는 숙종의 친필로 쓰여졌으며,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민서가 짓고 윤심이 글씨를 썼고, 전서는 서포 김만중의 솜씨이다.

18.신장절공 묘역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21호

지 정 일 1976.06.17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방동리 산 816-1  시 대 고려시대

고려의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묘소이다.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적군이 신숭겸을 태조로 오인하고 그의 목을 베어가자 태조는 머리없는 시신에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장례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도굴을 막기 위하여 묘는 하나인데 봉분을 3개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이 묘에는 3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다. 묘역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및 묘비가 서 있다.

 

19.춘천 봉의산성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26호

지 정 일 1979.05.30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소양로 1가 산1-1  시 대 고려시대

강원도 춘천시 강원도청의 뒷산인 봉의산 능선에 쌓은 산성으로,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쌓았다. 원형은 많이 훼손되어 1991년에 105m를 복원하였고, 1993년에 40m를 복원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봉산 산성의 둘레는 2,463척이고 높이는 10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거란족의 침입으로 안찰사 노주한이 이곳에서 전사하였고, 『고려사』에는 몽고족의 4차 침입 때 춘천 주민들이 산성에 들어가 항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강원도 조방장 원호의 활동지역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격전지였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란, 몽고와의 전쟁에서 격전지였던 기록을 감안하면 고려 중엽에 쌓은 성으로 추측된다.

봉의산성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원형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춘천지방 사람들에게 항전의 현장이었음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이 성은 지세가 험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에는 좋았으나, 식수가 부족하고 크기가 작아 장기간 적의 포위에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0.춘천 증리 고분군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45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신동면 증리 산97-1

시 대 삼국시대

 

낮은 산언덕 능선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 삼국시대의 무덤들이다.

오랜 세월로 무덤 위에 올렸던 봉토는 대부분 유실되었고, 당시 사용되었던 돌 재료들이 일부 땅 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1980년에 우연히 이곳에서 파괴된 무덤과 함께 유물이 수습되어 부분적으로 무덤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구조는 시체를 넣는 돌방(석실)을 쌓아올리는 말각조정으로 되어있다.

춘천 증리무덤들은 이 일대의 무덤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곳이다.

22.춘천 신매리 석실고분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46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신매리 177-14  시 대 삼국시대

춘천시 신매리지구 농경지정리 작업 중에 발견된 고구려형식의 무덤이다.

무덤의 형태를 보면 시체를 두는 널방(현실)의 경우 비교적 큰 자연돌과 강돌을 사용하여 3∼4단의 벽을 쌓아 올리면서 모서리를 죽이고, 위를 하나의 큰 판돌을 올려 마무리한 말각조정 형태의 돌방무덤(석실묘)이다. 그리고 통로에 해당하는 널길(연도)를 갖추고 있다. 조사결과 2사람의 인골이 흩어져 수습되었을 뿐, 다른 유물은 없었다.

춘천 신매리 돌방무덤은 형식적인 면으로 보아 고구려의 전통무덤 축조형식을 따르고 있어 6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3.청평사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55호

지 정 일 1984.12.28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길 779 (청평리 669)외 2필지

시 대 고려시대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에 지어져 ‘백암선원’이라 부르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그후에 보현원, 문수원으로 불려오다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가 크게 고쳐 지으면서 이름을 청평사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랜 세월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문수원기비와 국보였던 극락전 등이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의 극락전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남아 있는 유물로는 회전문(보물 제164호), 삼층석탑, 진락공 부도, 환숙당 부도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관직에 있던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 지내던 문수원과 영지가 남아 있는데, 이곳은 고려시대의 정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24.춘천 의암 유인석 묘역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74호

지 정 일 2000.03.11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91  시 대 조선시대

한말의 위정척사론자이며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1842∼1915)의 묘역이다.

헌종 8년(1842) 춘천시 남면에서 태어나 14세 때에는 친척인 중선에게 입양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그곳에서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오랑캐를 배척하는 존화양이사상을 익혔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을 시작하여 크게 활약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1908년 해외로 망명한 후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을 결성하였고 여기에서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는 현실적인 위정척사론으로 의병운동을 전개시킨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25.소양정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소양정길42번길 24 (소양로1가 산1-1)

시 대 근대

봉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소양정은 삼국시대에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이요루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순종 때 부사 윤왕국이 소양정이라 고쳐 불렀다. 원래는 지금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안에 있었다.

조선 선조 38년(1605) 홍수로 없어진 것을 광해군 2년(1610) 부사 윤희당이 다시 짓고, 인조 25년(1647)에는 부사 엄황이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지금 있는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6년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26.청평사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산189-2  시 대 고려시대

청평사 입구의 환희령이라는 언덕 위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일반적으로 탑은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 앞에 세우는데 이 탑은 사찰 길목의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홀로 서 있다.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들려 있어 날렵한 감을 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아담하면서도 안정감이 드는 탑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청평사가 고려 광종 24년(973)에 창건된 사실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뱀에 몸이 얽혀 갖은 고생을 하던 원나라 순제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린 뒤 뱀을 떨쳐버리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일명 ‘공주탑’이란 애칭으로도 불리운다.

27.월송리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9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월송2리 666-1  시 대 고려시대

조면사터로 전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주변에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절터였음을 알려주나 지금은 석탑만이 민가 골목길에 서 있다.

탑의 기단은 맨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땅 속에 묻혀있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탑신은 1층 몸돌만 한돌로 되어 있고,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 3층 지붕돌과 꼭대기의 네모난 머리장식 받침돌이 합쳐져 각각 한돌을 이룬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새겼다. 둔하고 무거워보이는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거의 없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으며,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8.삼악산 성지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0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덕두원리 47  시 대  고려시대

삼악산성은 삼악산의 능선 계곡 왼쪽 정상을 따라 쌓은 성이다. 삼악산은 춘천-서울간 역로였던 곳으로, 석파령을 내려다보는 곳에 천연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마주보고 있는 두 정상의 능선을 따라 산성을 쌓았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철원에서 왕건에게 패하고 샘밭 삼한골을 거쳐 이곳에 성을 쌓아 피신처로 이용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또 삼국시대 이전에 춘천지역에 있던 부족국가인 맥국 사람들이 쌓은 성이라는 설도 있다.

산성의 길이는 약 5㎞로, 성벽은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자연석을 이용하여 자연 지형에 따라 높이 1∼3m로 쌓았다.

성 주변에서 옛 그릇 조각과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흥국사, 망국대, 대궐터, 기와를 굽던 ‘와대기’등 의미있는 옛 지명들이 전해온다. 

29.춘천 최재근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신동면 솟발길 33-11 (정족1리 907)  시 대 일제강점기

1917년에 세운 집으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ㅁ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웃방·안방·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으로는 건넌방을 꾸몄다. 지금은 생활하기에 편리한 구조로 개조하였는데, 부엌을 입식으로 고치고 안방과 웃방 사이의 벽과 바깥쪽 툇마루를 없애 방을 넓혀 쓰고 있다.

사랑채는 대문 왼쪽에 외양간·광·방을 배치하였고 오른쪽에는 부엌·방·광을 놓았는데, 왼쪽은 삼량구조이나, 이 오른쪽 부분은 평사량구조를 취하고 있다.

30.춘천 민성기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동면 노루목길 21 (장학리 70)  시 대 조선시대

휘문중학교를 세운 민영휘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묘 가까이에 세운 묘막이다.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로 ㄱ자인 안채와 ㄴ자인 사랑채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ㅁ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웃방·안방·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건넌방을 배치하였다. 부엌쪽은 옆면의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지만 건넌방쪽은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사랑채는 광·방 2칸·부엌으로 구성된다. 지붕은 안채와 마찬가지로 한쪽은 맞배지붕,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가옥 전체를 흙담으로 처리하고 기와를 얹었다.

31.춘천 김정은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8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신동면 솟발1길 44 (정족1리 643)  시 대 조선시대

나지막한 산 아래에 세운 집으로 ㄱ자형 안채에 사랑채가 딸려 있어 전체적으로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건넌방을 두고 오른쪽으로는 웃방·안방·부엌을 배치하였는데 부엌 천장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대청 뒤쪽 벽에는 2짝 문을 달고, 웃방과 안방 사이에도 문을 달아 공간을 구분하였다. 안채 대청 앞쪽으로는 햇빛을 막고 비가 들지 않게 높은 기둥을 세워 지붕을 덧댄 차양시설을 두었다.

사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부엌과 사랑방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광과 그 뒤편으로 방을 놓았다.

32.방동리 고구려고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6호

지 정 일 1985.09.13

소 재 지 강원 춘천시 서면 방동리 816

시 대 고구려시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무덤 남쪽에 있는 2기의 무덤이다.

내부는 크고 작은 깬돌을 포개서 만든 돌방무덤(석실묘)이고, 외부의 봉토는 거의 유실되었다. 천장은 3∼4단의 벽을 쌓아 올리면서 모서리를 죽이고 하나의 큰 판돌을 올려 마무리한 모줄임식천장(말각조정천장)이다.

방동리 무덤은 고구려 무덤의 후기 양식이 지방화 된 형태로, 춘천 지방이 신라가 북상하기 이전인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영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33.춘천 김정 묘역 문인석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5호

지 정 일 1998.09.05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산41-12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문신인 김정 선생의 묘역에 있는 1쌍의 문인석이다.

김정은 고려 공민왕 때 양광, 전라도 찰방사, 대호군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후기 신돈의 개혁정치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축출되자 유배되었고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으며, 다만『신증동국여지승람』과『광주목지』에 중대광 광성군에 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문인석 2기는 동일한 수법으로 조각하였는데, 다른 문인석들에 비해 규모가 작다. 머리에는 장식이 없는 낮은 관모를 쓰고, 눈·코·입은 얇은 선으로 표현하였으며 두 손에는 신하들이 임금을 뵐 때 손에 쥐던 홀을 들고 있다.

묘역에는 문인석 이외에도 망주석 1쌍과 선생의 묘비가 마련되어 있는데, 문인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최근에 세운 것이다.

34.춘천 한백록 묘역 및 정문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1호

지 정 일 2000.11.18 소 재 지 강원도 춘천시  서면 금산리 산64, 당산길 20 (방동리 406-2)  시 대 조선시대

충장공 한백록(1555∼1592)의 묘역과 정문이다. 한백록은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과 합포해전 등에서 활약하였으나 미조항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영조 21년(1751)에 그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다.

한백록의 묘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묘의 형태로, 묘 앞에는 최근에 세운 비석과 상석 망주석 등이 있고 묘의 왼쪽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다. 효종 8년(1657)에 세운 이 묘갈은 두동강난 것을 다시 붙여 세운 것이다. 묘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은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1.5㎞ 되는 곳에 사당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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