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정보]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비지정문화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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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문화재들 중에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가 있나요.
있으면 알려주시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도 해주세요.
사진도 있으면 올려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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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
둥둥둥소리님의 댓글
고성군 비지정 문화재입니다.
http://tour.gwgs.go.kr/site/tour/page/03/sub_03_03_01.jsp
노상언 효자각
소재공 12대손 노상언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행실이 바르고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여 의로운 이을 행하여 부모에 극진한 효도는 물론 웃어른들을 공경하는 등 선비다운 행실과 선행을 다 하였다고 하여 효자칙지를 받은 후 140년전 노씨 문중에서 이 문을 건립하였으나 전쟁으로 여기 저기 옮겨 지었다가 현재 용촌2리에 재건하였다. 착지등은 분실되었으나 효행에 대한 것은 동국 명현록에 기록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자각은 1892년 세워졌으며 현판에는 "효자학생 노상언지문"이라 쓰여 있다. 100여년전 포의한사로 한 평생을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 간 노선비의 넋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송호정
☞ 송지호의 청명함과 망망대해 동해를 한눈에… 고성군(高城郡) 죽왕면(竹旺面) 오봉리(五峰里) 산(山) 167번지 용소두봉(?小斗峰)에 위치하고 있는 송호정(松湖亭)은 1959년 10월3일 당시의 최창길(崔昌吉) 면장이 하 이원섭(?元燮)창건 기성회장 지방독지가들의 성금에 의해 건립되었다. 송호정은 그 주변이 울창한 송림과 송지호의 청명한 호수 와 함께 어우러져 동해의 푸른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물빛이 청명한 호수에는 많은 어족과 갯조개가 서식하 고 있어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겨울철새인 천연기념물 201호 고니와 청동오리등 이름 모를 철새의 도래지로서 장관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그 규모와 건축양식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의 정자로서 초석은 네모난 화강석의 상부(H:18㎝)4각형으로 그냥 두었다. 초석의 상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정자 바닥을 완성하였고 마루의 중앙부분 아래에 같은 모양의 초석을 두어 마루를 받치게 했다. 마루에서 24㎝ 높이에 15×8㎝의 각재를 사방으로 둘러난간 구실을 하고 있으며 천정의 상부는 우물정자 천정+ 빗천정으로 되어 있고 판자로 내부천정을 마감하였다. 네 귀에는 주두를 얹어 귀포를 두었고 각 중간기둥과의 사이는 들보에 의해 연결되어 천정 아래에서“+”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간과 간 사이에는 화반소로가 도리위에 얹혀 있는 형식으로 축조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일부가 노후되어 지난 94년도 군(郡)에서 문화재 정비사업의 하나로 노후된 정자를 해체 복원하여 지역 주민들은 물론, 이곳을 오가는 여행객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천혜의 경관과 자태를 뽐냈으나 96년도 4월 23~24일 이틀간 토성, 죽왕면 일대의 산불의 대화란으로 불길을 막지못하고 안타깝게도 이곳의 천년 송림과 더불어 송호정이 잿더미로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다. 그후 97년도 5월 군비를 들여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연안김씨 열녀각
설악봉이 마주 바라 보이는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국사봉이 솟아있고 바로 그 아래로는 요지호가 동해로 흘러가며 용촌천을 만들어 농토에 젖줄 같은 역활을 하고 있었다. 앞면에는 깊고 푸른 동해바다가 있어 수십년 전에는 이 마을을 용포동이라 이름하였고 뒤편으로는 잔잔한 언덕 같은 성황산이 성곽처럼 마을을 둘러싸 평화를 지켜주는 듯 하였다. 조선조 고종 때 노병곤이라는 분이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나이 어린 아내를 맞아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뜻밖에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니 집안은 온통 날마다 먹구름이 덮힌 듯 근심과 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다. 아내 연안김씨는 가문 높은 양가집 딸로서 나이는 어렸지만 남편의 병간호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백방으로 쫓아 다니면서 좋다는 약을 다 구하여 남편을 보살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부인은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가면서 회생되기를 바랐지만 그 정성도 아랑곳없이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그 때 남편의 나이 18세요. 부인 연안김씨의 나이는 겨우 13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 후 가신 남편의 혼을 모시고 수절하여 살아 오다가 바로 아래 동생인 노병서의 장남 재용을 양자로 삼아 부군의 대를 잇게 하였다. 부인은 양자인 재용을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시키고 동경까지 유학을 보내 조도전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맹렬여성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시부모에게는 효부였고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죽은 남편을 사모하는 열녀였다. 이런 연유로 예조 학사원에서 내리는 효부 표창을 받았고 양자인 재용에게는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현모이기도 하였다. 13세의 어린나이로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어 죽은 남편의 혼을 모시고 평생을 일편단심 사모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오다 1952년 그 생을 마쳤다. 광주 노씨 문중에서는 연안김씨의 열녀됨을 기리기 위하여 1952년 10월 10일 마을 어구에 연안김씨 열녀비각을 건립하고 그의 생존 때 업적을 새겨 영구보존케 하여 그들 후대에게 전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시대는 신분이 높을 수록 10세 내외의 조혼으로 꽃다운 젊은 시절부터 엄격한 법도에 눌려 평생을 집 문앞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여기에 으레 따르는 시집살이의 정신적, 육체적 고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내외 법이 엄격했던 그 시절의 폐쇄사회에서 얼마나 기막힌 이성으로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살아 왔을까. 오직 인종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전봉상 효자각
바로 이곳에 자손 대대로 정선 씨 가문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입구에 조선조 선조때(1567 ~ 1608)사람으로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하던 전씨 문중의 46대 조상인 봉상 51대 조상인 공순 54대 조상인 재후 세 분의 효자비가 모셔진 8각 지붕의 효자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400여년전 조선조 선조시대 간성 교동리에는 할아버지는 심도부위요 아버지는 참봉벼슬을 한 순신(당시 참봉 1540 ~1586, 중종~선조)이라는 분이 아들 형제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형은 봉걸이요동생은 봉상이라 이름하였다. 그 형제 중에서도 동생인 봉상은 아주 영명하여 등화가친하여 독서삼매경에 묻힐 정도로 공부만 하는 소년으로 항상 웃어른들에게는 공손하며 부모에게는 효행이 극진한 아이로 어릴때부터 어진 천성을 지닌 소년으로 소문 나 있었다. 봉상이 일곱 살 되던 어린 소년에게는 몹시도 춥게 느껴지는 겨울철이였었다. 아버님 순신이 여러 날 동안 다리가 몹시 쑤시고 아파 누워만 계셨기에 그 때만 하여도 별로 신통한 치료 약이나 의원이 있는 시절도 아니라 다만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비는 수 밖 에 없는 어느 날 어른들 말씀에 잉어를 고아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워낙 가세가 빈곤하여 쇠고기 한번 잡수어 본 일이 없는 아버님께서 잉어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는 일곱살 밖에 되지 않는 소년 봉상은 온통 산과 들이 눈으로 뒤덮힌 하얀 길을 헤치며 잉어를 구해 보려고 찾아 나선 것이다.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눈 아래 사방을 굽어 보았으나 어디가서 잉어를 잡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고 눈앞이 캄캄하였으나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잉어에 대한 생각만 머리속에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한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호리 호수가 얼른 떠올랐다. 새벽 찬바람에 동호리까지 깊은 눈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정말 어린 소년에게는 힘겨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효성이 극진한 봉산에게는 곰곰히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버님의 병환을 염려하여 정월 추위에 얼어죽지 않은 것만 감지덕지 천행으로 여기고 무작정 걸어만 갔다. 그리하여 동호리 호수가에 거의 가까이 왔을 무렵 홀연히 겨울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뇌성벽력으로 온통 천지를 뒤덮어 놓을 듯이 바람이 세차게 불고 난데없이 팔뚝만한 잉어 두마리가 봉산의 눈앞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효자는 하늘이 알아준다 하더니 착한 어린 아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복함인지 봉상 소년의 반가움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있겠읍니까? 눈 덮힌 겨울철에 얻은 귀한 잉어를 아버님께 봉양할 수 있는 봉상의 기쁜 마음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그의 어질고 착한 성품이 훗날에도 그 아버님 순신이 위독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7일 동안이나 곤히 잠들다 다시 깨어나 병세를 회복하여 3년이나 더 사시게 하였다. 이는 그의 효심이 얼마나 깊고 깊었나 하는 것은 오늘에 사는 후손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가 없다. 그 후 후대 자손들이 이 거룩한 조상의 뜻을 받들어 1610년에 정축 1칸에 8각 지붕의 효자각을 짖고 봉산, 공순, 재후, 세분의 효자석비를 세웠는데 그 후대에도 많은 효자가 배출되었다 한다.
천학정
노송과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에 자리잡고 있어 풍취가 뛰어나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177번지에 위치한 천학정은 서기 1931년에 한치응(韓致鷹)의 발기로 최순문, 김성운과 함께 건립한 것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 구조로 지어졌다. 토성면과 죽왕면을 경계로 흐르는 문암천을 지나 1Km를 가면 교암리 마을 앞에 소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산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 천학정이 있다. 동해바다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위에 건립되어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며 남쪽으로 청간정과 백도를 마주 바라보고 북으로는 능파대(凌波臺)가 가까이 있어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데 상하천광(上下天光) 거울 속에 정자가 있다하여 천학정(天鶴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넘실거리는 푸른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일시에 사라지고 드넓은 동해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이 고장사람들의 편안한 쉼터이기도 한다. 특히, 천학정의 일출은 가히 선경이라 할만하다. 지금도 봄, 여름, 가을에 동해바다를 찾는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돌아간다.
함희석 함씨
희석의 아버지인 덕인은(조선 순조 28년 무자 3년 서기 1828년 5월10일생~경신년 서기 1860년3월1일 졸수는 33세)3형제를 두었으며 희석은 그의 장남이였다. 어렸을때부터 천성이 온후하여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였으며 가세가 빈곤하여 하고 싶었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집안 일을 도맡아 하여 왔으며 항상 부친이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10여세의 어린 소년이지만 혹시 부친에게 실수나 유고가 있을까봐 늘 걱정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니며 효행 봉양하였다. 무오년 겨울 부친이 병환으로 앓아 눕게되자 엄동설한에 얼음은 깨고 잉어를 잡아다가 약으로 봉양하여 다시 소생케 하였으며 경신년 서기 1860년 2월 천화가 나서 영동 구읍이 일시에 화란이 일어나던 때 부친이 술에 취하여 귀가 도중 길가에서 잠들었다가 큰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그때 당시 희석의 나이는 16세였었다. 동년 경신년 3월 1일 서기 1860년 부친의 상을 입고 3년간이나 묘앞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 밤에는 범의 호위 아래 시묘하였다.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으로부터 정여를 하사받았다. 『효자전통대부돈영부도정』 희석은 조선조 헌종 12년 10월7일에 출생하였으며 서기 1918년 10월 14일 졸하였다. 자는 사언이요 호는 오헌 이요 묘는 공현진 선유담에 있다. 슬하에는 영두, 영준, 영우를 두었다.
여미님의 댓글
(강원도 고성군의 비지정문화재)
1.고성 노상언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
시 대 조선시대
소재공 12대손 노상언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행실이 바르고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여 의로운 이을 행하여 부모에 극진한 효도는 물론 웃어른들을 공경하는 등 선비다운 행실과 선행을 다 하였다고 하여 효자칙지를 받은 후 140년전 노씨 문중에서 이 문을 건립하였으나 전쟁으로 여기 저기 옮겨 지었다가 현재 용촌2리에 재건하였다. 착지등은 분실되었으나 효행에 대한 것은 동국 명현록에 기록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자각은 1892년 세워졌으며 현판에는 "효자학생 노상언지문"이라 쓰여 있다. 100여년전 포의한사로 한 평생을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 간 노선비의 넋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2.고성 전봉상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시 대 조선시대
바로 이곳에 자손 대대로 정선 씨 가문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입구에 조선조 선조때(1567 ~ 1608)사람으로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하던 전씨 문중의 46대 조상인 봉상 51대 조상인 공순 54대 조상인 재후 세 분의 효자비가 모셔진 8각 지붕의 효자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400여년전 조선조 선조시대 간성 교동리에는 할아버지는 심도부위요 아버지는 참봉벼슬을 한 순신(당시 참봉 1540 ~1586, 중종~선조)이라는 분이 아들 형제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형은 봉걸이요동생은 봉상이라 이름하였다.
그 형제 중에서도 동생인 봉상은 아주 영명하여 등화가친하여 독서삼매경에 묻힐 정도로 공부만 하는 소년으로 항상 웃어른들에게는 공손하며 부모에게는 효행이 극진한 아이로 어릴때부터 어진 천성을 지닌 소년으로 소문 나 있었다. 봉상이 일곱 살 되던 어린 소년에게는 몹시도 춥게 느껴지는 겨울철이였었다.
아버님 순신이 여러 날 동안 다리가 몹시 쑤시고 아파 누워만 계셨기에 그 때만 하여도 별로 신통한 치료 약이나 의원이 있는 시절도 아니라 다만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비는 수 밖 에 없는 어느 날 어른들 말씀에 잉어를 고아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워낙 가세가 빈곤하여 쇠고기 한번 잡수어 본 일이 없는 아버님께서 잉어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는 일곱살 밖에 되지 않는 소년 봉상은 온통 산과 들이 눈으로 뒤덮힌 하얀 길을 헤치며 잉어를 구해 보려고 찾아 나선 것이다.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눈 아래 사방을 굽어 보았으나 어디가서 잉어를 잡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고 눈앞이 캄캄하였으나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잉어에 대한 생각만 머리속에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한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호리 호수가 얼른 떠올랐다. 새벽 찬바람에 동호리까지 깊은 눈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정말 어린 소년에게는 힘겨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효성이 극진한 봉산에게는 곰곰히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버님의 병환을 염려하여 정월 추위에 얼어죽지 않은 것만 감지덕지 천행으로 여기고 무작정 걸어만 갔다.
그리하여 동호리 호수가에 거의 가까이 왔을 무렵 홀연히 겨울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뇌성벽력으로 온통 천지를 뒤덮어 놓을 듯이 바람이 세차게 불고 난데없이 팔뚝만한 잉어 두마리가 봉산의 눈앞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효자는 하늘이 알아준다 하더니 착한 어린 아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복함인지 봉상 소년의 반가움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있겠읍니까? 눈 덮힌 겨울철에 얻은 귀한 잉어를 아버님께 봉양할 수 있는 봉상의 기쁜 마음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그의 어질고 착한 성품이 훗날에도 그 아버님 순신이 위독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7일 동안이나 곤히 잠들다 다시 깨어나 병세를 회복하여 3년이나 더 사시게 하였다. 이는 그의 효심이 얼마나 깊고 깊었나 하는 것은 오늘에 사는 후손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가 없다.
그 후 후대 자손들이 이 거룩한 조상의 뜻을 받들어 1610년에 정축 1칸에 8각 지붕의 효자각을 짖고 봉산, 공순, 재후, 세분의 효자석비를 세웠는데 그 후대에도 많은 효자가 배출되었다 한다.
3.고성 연안김씨 열녀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
시대 현대
설악봉이 마주 바라 보이는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국사봉이 솟아있고 바로 그 아래로는 요지호가 동해로 흘러가며 용촌천을 만들어 농토에 젖줄 같은 역활을 하고 있었다.
앞면에는 깊고 푸른 동해바다가 있어 수십년 전에는 이 마을을 용포동이라 이름하였고 뒤편으로는 잔잔한 언덕 같은 성황산이 성곽처럼 마을을 둘러싸 평화를 지켜주는 듯 하였다. 조선조 고종 때 노병곤이라는 분이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나이 어린 아내를 맞아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뜻밖에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니 집안은 온통 날마다 먹구름이 덮힌 듯 근심과 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다. 아내 연안김씨는 가문 높은 양가집 딸로서 나이는 어렸지만 남편의 병간호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백방으로 쫓아 다니면서 좋다는 약을 다 구하여 남편을 보살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부인은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가면서 회생되기를 바랐지만 그 정성도 아랑곳없이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그 때 남편의 나이 18세요. 부인 연안김씨의 나이는 겨우 13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 후 가신 남편의 혼을 모시고 수절하여 살아 오다가 바로 아래 동생인 노병서의 장남 재용을 양자로 삼아 부군의 대를 잇게 하였다. 부인은 양자인 재용을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시키고 동경까지 유학을 보내 조도전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맹렬여성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시부모에게는 효부였고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죽은 남편을 사모하는 열녀였다. 이런 연유로 예조 학사원에서 내리는 효부 표창을 받았고 양자인 재용에게는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현모이기도 하였다.
13세의 어린나이로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어 죽은 남편의 혼을 모시고 평생을 일편단심 사모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오다 1952년 그 생을 마쳤다.
광주 노씨 문중에서는 연안김씨의 열녀됨을 기리기 위하여 1952년 10월 10일 마을 어구에 연안김씨 열녀비각을 건립하고 그의 생존 때 업적을 새겨 영구보존케 하여 그들 후대에게 전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시대는 신분이 높을 수록 10세 내외의 조혼으로 꽃다운 젊은 시절부터 엄격한 법도에 눌려 평생을 집 문앞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여기에 으레 따르는 시집살이의 정신적, 육체적 고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내외 법이 엄격했던 그 시절의 폐쇄사회에서 얼마나 기막힌 이성으로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살아 왔을까.
오직 인종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4.송호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 산22-1
시 대 현대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산 167번지 용소두봉에 위치하고 있는 송호정은 1959년 10월3일 당시의 최창길 면장이 하 이원섭 창건 기성회장 지방독지가들의 성금에 의해 건립되었다. 송호정은 그 주변이 울창한 송림과 송지호의 청명한 호수 와 함께 어우러져 동해의 푸른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물빛이 청명한 호수에는 많은 어족과 갯조개가 서식하 고 있어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겨울철새인 천연기념물 201호 고니와 청동오리등 이름 모를 철새의 도래지로서 장관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그 규모와 건축양식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의 정자로서 초석은 네모난 화강석의 상부(H:18㎝)4각형으로 그냥 두었다. 초석의 상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정자 바닥을 완성하였고 마루의 중앙부분 아래에 같은 모양의 초석을 두어 마루를 받치게 했다.
마루에서 24㎝ 높이에 15×8㎝의 각재를 사방으로 둘러난간 구실을 하고 있으며 천정의 상부는 우물정자 천정+ 빗천정으로 되어 있고 판자로 내부천정을 마감하였다.
네 귀에는 주두를 얹어 귀포를 두었고 각 중간기둥과의 사이는 들보에 의해 연결되어 천정 아래에서“+”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간과 간 사이에는 화반소로가 도리위에 얹혀 있는 형식으로 축조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일부가 노후되어 지난 94년도 군에서 문화재 정비사업의 하나로 노후된 정자를 해체 복원하여 지역 주민들은 물론, 이곳을 오가는 여행객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천혜의 경관과 자태를 뽐냈으나 96년도 4월 23~24일 이틀간 토성, 죽왕면 일대의 산불의 대화란으로 불길을 막지못하고 안타깝게도 이곳의 천년 송림과 더불어 송호정이 잿더미로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다. 그후 97년도 5월 군비를 들여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5.천학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재 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시 대 현대
노송과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에 자리잡고 있어 풍취가 뛰어나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177번지에 위치한 천학정은 서기 1931년에 한치응의 발기로 최순문, 김성운과 함께 건립한 것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 구조로 지어졌다.
토성면과 죽왕면을 경계로 흐르는 문암천을 지나 1Km를 가면 교암리 마을 앞에 소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산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 천학정이 있다.
동해바다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위에 건립되어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며 남쪽으로 청간정과 백도를 마주 바라보고 북으로는 능파대가 가까이 있어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데 상하천광 거울 속에 정자가 있다하여 천학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넘실거리는 푸른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일시에 사라지고 드넓은 동해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이 고장사람들의 편안한 쉼터이기도 한다. 특히, 천학정의 일출은 가히 선경이라 할만하다. 지금도 봄, 여름, 가을에 동해바다를 찾는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돌아간다.
6.함희석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하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396
시 대 조선시대
희석의 아버지인 덕인은(조선 순조 28년 무자 3년 서기 1828년 5월10일생~경신년 서기 1860년3월1일 졸수는 33세)3형제를 두었으며 희석은 그의 장남이였다.
어렸을때부터 천성이 온후하여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였으며 가세가 빈곤하여 하고 싶었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집안 일을 도맡아 하여 왔으며 항상 부친이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10여세의 어린 소년이지만 혹시 부친에게 실수나 유고가 있을까봐 늘 걱정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니며 효행 봉양하였다. 무오년 겨울 부친이 병환으로 앓아 눕게되자 엄동설한에 얼음은 깨고 잉어를 잡아다가 약으로 봉양하여 다시 소생케 하였으며 경신년 서기 1860년 2월 천화가 나서 영동 구읍이 일시에 화란이 일어나던 때 부친이 술에 취하여 귀가 도중 길가에서 잠들었다가 큰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그때 당시 희석의 나이는 16세였었다.
동년 경신년 3월 1일 서기 1860년 부친의 상을 입고 3년간이나 묘앞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 밤에는 범의 호위 아래 시묘하였다.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으로부터 정여를 하사받았다. 『효자전통대부돈영부도정』 희석은 조선조 헌종 12년 10월7일에 출생하였으며 서기 1918년 10월 14일 졸하였다. 자는 사언이요 호는 오헌 이요 묘는 공현진 선유담에 있다. 슬하에는 영두, 영준, 영우를 두었다.
7.고성 양근 함씨 4세 효자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374
시 대 조선시대
동몽교관 함성욱은 부친인 함취관이 병환으로 위독하게 되자 단지하여 피를 먹여 7일을 더 연명케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선양하여 조봉 대부의 작위를 내렸다.
그뒤함성욱의아들함인흥과함인홍형제,함인호의아들함덕우,함덕우의아들함희룡에이르기까지4대에걸친5효자가모두단지하여부친의생명을연장하였으며,아울러3년의시묘를함으로서국가에서는보기드문효자가문이라하여작위와벼슬을내렸으며,이를후세에길이전하고자1820년효자비를건립하고"사세오효자가"이라명명하였다.
현재의효자각은1984년에건립되었으며,효자각의양기둥안쪽으로홍살문이별도로설치되어그안쪽으로효자비가배치되었으며,한가운데상돌이놓여있다.5기의효자비는각각그이면에효자의효행과행장을기술하고있다.비각은정면1칸,측면1칸(210cm×210cm)의팔작지붕이다.
비각의 초석은 화강암제로 장란의 한쪽을 절단한 형태이다. 비는 모두 1984년에 오석을 사용하여 다시 새겨 만든 것이다. 주변은 석축을 하고 기와를 없어 보존관리가 양호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