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군/정보] 화천 파로호 명칭에 변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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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파로호 명칭에 변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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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미스님의 댓글

파로호의 역사적 유래는 1944년 일제 강점기 때 이 지역에 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인공호수로 당시 ‘대붕호’라고 명명했으며 광복이후에는 화천저수지로 불리다 6·25전쟁 때 국군과 UN연합군이 중공군에 대승한 것을 기념해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파로호(오랑케를 격파한 호수)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가온마미님의 댓글

[ 파로호 ]

파로호는 일제 강점기에 전력 생산을 위해 건설된 화천댐으로 형성된 호수이다. 화천댐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6월 조선전업주식회사에 의해 설계되어, 1944년 완공되었는데 높이 81.5m, 길이 435m, 총저수량 10억 1,842만 6,000t이다. 해방 후 1966년까지 연차적으로 발전시설이 보강되었다.

화천 댐이 건설되기 전 이 지역에는 수백 가구로 형성된 수하리와 수상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큰 봉황을 뜻하는 대붕(大鵬)을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는데, 봉황이 날개를 펴면 구만리를 날았다고 하여 인근 마을 이름은 구만리였다. 일제가 이 마을에 댐을 건설하고 마을이 수몰 위기에 이르자, 마을 주민들은 댐 이름에 '대붕'이라는 이름을 넣어달라고 요청, 일제는 이를 수락했으나, 후일 건설된 후 일제는 대붕제(大鵬堤)와 비슷한 한자인 대명제(大䳟堤)라고 명명하고 주민들을 속였다. 이 사실은 일제가 만든 '대명제(大䳟堤)'라는 표지석이 뒤늦게 1986년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일제가 자신들을 속인 것을 알지 못했던 당시 주민들은 해방 후에도 이 호수를 대붕호(大鵬湖)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호수의 명칭이 변경된 것은 6·25전쟁 때 이 부근에서 당시 중국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에서 비롯된다. 후일 '지암리 파로호 전투'라고 명명된 이 전투는 국제연합군의 제3차 반격작전 중 경기 가평, 강원 춘천과 화천 등 중동부 전선에서 미군 제9군단, 한국군 2사단, 6사단, 미군 제7사단으로 병진 공격을 실시, 춘계공세로 한반도에 진출한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1951년 5월 24일부터 30일까지, 대붕호 근처 지역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중국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 끝에 2만 4,141명을 사살하고 7,905명을 포로로 잡았다.

5월 25일 후퇴하는 중공군이 화천 일대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한 미군 제9군단은 지암리와 대붕호 일대에 중국군을 고립시킨 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국제연합군은 북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 사살된 많은 중국군들이 대붕호에 빠져 숨졌거나, 전사한 후 대붕호에 수장되면서 대붕호는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전투 결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고 깨뜨릴 파(破), 오랑캐 로(虜), 호수 호(湖)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고 명명했다. 이후 이 호수는 '파로호'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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