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기타] [궁·능관리] 태릉과 강릉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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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 태릉과 강릉을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려고 하는데..
간단하게 설명좀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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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님의 댓글

안녕하십니까? 

조선왕릉 태릉과 강릉에 대한 귀하의 관심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 문의하신 태릉과 강릉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능호 : 태릉 위치 :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681 지정번호 : 사적 제201호 조성시기 : 1565년(명종 20) 7월 15일 태릉은 11대 임금 중종의 제 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으로, 능침은 단릉 형식이다. 상설제도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과 창릉(昌陵)의 경우만이 예외를 이룬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을 통틀어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며, 안면 부분을 제외하고는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 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565년(명종 20) 4월 7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자 4월 12일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6월 4일 태릉으로 고쳤다. 7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예장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에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호 : 강릉 위치 :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681 지정번호 : 사적 제201호 조성시기 : 1567년(선조 1) 9월 22일 능의구성 강릉은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하여 쌍릉으로 조영하였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만석에 다시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진입공간에 금천교가 남아 있으며 정자각 왼편 계류에는 보면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왕래할 때 마실 물을 마시거나 제례시를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 등지에서도 이를 볼 수 있으나 강릉의 것이 원형에 가깝다. 강릉의 문석인은 신체 대비 머리의 비례가 크고, 목이 짧게 조각되었다. 복두를 쓰고 관복을 걸친 관료의 차림을 하고 있다. 무석인은 왼편과 오른편의 조각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오른쪽은 투구가 작고 가슴 전면에 파도문양이 조각된 반면, 왼쪽 무석인은 팔꿈치에 구름문양, 등 위와 무릎부분에 비늘 문양을 새기고 있다.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를 이른 나이에 잃고, 2년 후에는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여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워낙 병약했던 명종은 세자와 모후를 잃은 허탈감에 마음의 병까지 더하여 34세의 나이로 1567년(선조 즉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를 명종, 능호를 강릉으로 정한 후 같은 해 9월 22일 태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 후인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를 맞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였다. 선조는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그 해 4월 28일 명종 왕릉인 강릉에 쌍릉으로 왕비릉을 조성하였다.

그 밖에 궁금하신 사항이 있을 경우 조선왕릉 중부지구관리소 태릉(02-972-0370)으로 연락주시면 성심껏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련법령 : 문화재보호법제49조(관람료의 징수) 작성부서 :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중부지구관리소, 02-948-5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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