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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불이님의 댓글

천재님의 댓글

(강원도 양양군의 문화재)

1.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22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  시 대 통일신라

진전사의 옛터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하는데, 터 주변에서 ‘진전’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탑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날아갈 듯한 옷을 입은 천인상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신중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2.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종 목  보물  제439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1  시 대 통일신라

멀리 동해바다가 내다보이는 진전사터 안의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탑으로,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된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선종을 이어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승탑은 일반적인 다른 승탑과는 달리 8각형의 탑신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는데,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석조승탑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 

3.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444호  지 정 일 1966.09.21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424  시 대 통일신라

1948년에 명문이 있는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되었던 선림원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석등·홍각선사탑비·석조부도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석조유물들은 대부분 쓰러져 있었으나 모두 복원되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여러 장의 돌로 탑의 토대를 만들고,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8부중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체감되고 각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 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머리장식받침)이 있고, 쇠꼬챙이장식을 꽂았던 구멍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모양의 돌이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

외형상 정제된 비례를 보여주지만 8부중상의 조각은 섬약하고 석재의 구성도 규율성을 잃고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나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전 기단부에서 소탑 60여 기와 동탁 1개가 발견된 일이 있다. 탑 앞에는 안상을 새긴 배례석이 남아 있다.

 

4.양양 선림원지 석등

종 목  보물  제445호  지 정 일 1966.09.21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424  시 대 통일신라

선림원터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등이다. 선림원은 신라의 옛 절로, 이 곳에서 출토된 신라범종을 통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했던 순응법사에 의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지금은 이 터가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고 각종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아직까지도 발견되고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데, 귀꽃조각과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지붕돌이 일부 탈락되긴 하였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개선사지석등(보물 제111호)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같은 절터내의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5.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종 목  보물  제446호  지 정 일 1966.09.21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424  시 대 통일신라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선림원터에 있으며,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와 비몸, 비머리돌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비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몸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에 의하면,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인데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6.양양 선림원지 승탑

종 목  보물  제447호  지 정 일 1966.09.21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424  시 대 통일신라

선림원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가 연 절로, 1948년 절터에서 연대가 804년으로 적힌 신라시대 범종이 나오면서 창건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승탑은 일제시대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승탑임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때에 돌로 만든 부도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중간받침돌·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기단의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승탑으로,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승탑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승탑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승탑이 홍각선사의 승탑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

 

7.양양 오색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497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산1-21  시 대 통일신라

강원도 양양의 오색약수터에서 약 2㎞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곳은 성국사터라 전해지는데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3층석탑 외에 또다른 부재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넓지 않은 사찰이었다고 추정된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두고 있는 형태이다.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에는 네 모서리에 빗물이 흐르는 홈을 표시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1층 몸돌에는 사리를 두던 네모진 공간이 있다. 지붕돌은 윗부분에서 경사를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들려 있어 탑 전체에 경쾌한 느낌을 더해준다.

완전히 쓰러져 있던 것을 1971년에 복원한 탑으로, 정연하게 구성된 2단의 기단과 지붕돌의 얇은 낙수면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8.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499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낙산사  시 대 조선시대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년간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가늘고 긴 쇠막대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 되었다. 근처의 명주군에 위치한 정동진리오층석탑의 연꽃무늬 기단장식과,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월정사팔각구층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9.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1362호 

지 정 일 2003.02.03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낙산사  시 대 조선시대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0.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 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종 목  보물 제1723호 

지 정 일  2011.11.01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낙산사  시 대 조선시대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예술적인 측면으로만 보자면 일급의 석조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첫째, 건립의 절대연대가 1692년으로 밝혀져 비슷한 시기의 승탑을 비롯한 관련 석조물의 편년에 소중한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둘째, 매우 드물게 현존하는 이른바 승탑형 불사리탑의 새로운 예가 추가되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셋째, 양식적으로나 세부에 있어서나 조선시대 왕릉의 장명등과 유사성이 다분하여 양자 사이의 교류 관계, 나아가 절집 석조물과 그 밖의 석조물의 양식적인 영향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비는 그 자체만으로는 조선후기 석비의 일반적인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와 아울러 생각한다면 이 비의 가치는 배가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불사리를 모시려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일관 유물일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문의 내용이 사리장엄구의 일부를 이루는 문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공중사리탑, 공중사리비, 사리장엄구가 이런 관계 속에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공중사리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 일괄은 인위적인 손상 없이 처음 매납된 상태 그대로 수습되어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접어들 무렵까지도 사리병―금합―은합―동합의 순으로 매납용 사리기를 제작하여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는 전통적인 사리 장엄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로써 주목에 값한다. 또한 사리장엄구의 일부로 수습된 비단 보자기 11점은 그 양호한 상태, 색채의 선명성, 무늬의 다양성 등을 통해 우리나라 직물사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가지 유물, 즉 공중사리탑과 공중사리비와 사리장엄구 일괄은 관련 유물 가운데 어느 하나 결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렇게 관련 유물이 갖추어진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은 낱낱의 유물이 지니는 가치도 적지 않지만 함께 보존되고 관리될 때 그 의미가 한층 강화될 것이다.

11.양양 오산리 유적

종 목  사적  제394호  지 정 일 1997.04.18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60외  시 대 선사시대

신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유적이다. 동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란 호수를 메우기 위해 토사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토기와 석기가 발견되면서 유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집터 11기, 불을 피웠던 자리 5기, 도구를 만들던 곳으로 보이는 돌무지 유구 2기가 확인되었다. 또한 많은 양의 토기조각과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흑요석제 석기의 성분 분석 결과 흑요석 원석을 백두산 지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선사시대의 백두산 지역과 오산리를 중심으로 한 동해안 지역의 문화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기원과 주변지역 사이에 연결된 문화적 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12.양양 낙산사 일원

종 목  사적  제495호  지 정 일 2008.12.18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일원  시 대  선사시대

양양낙산사는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이 전해지고 있다. 

13.낙산사 홍예문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4.낙산사 담장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지 정 일 1971.12.16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5) 낙산사 시 대 조선시대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처음 이 담장을 지었는데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연결·보수하였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이 담벽은 높이 3.7m·길이 220m이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위·아래로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층의 길게 다듬은 돌기단을 깔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긴 받침돌을 놓았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싸 신성한 지역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15.의상대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지 정 일 1974.09.09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산5-2)  시 대 일제강점기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의상이 낙산사를 지을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하였던 곳으로 옛부터 의상대라 불렸다고 한다.

6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난간을 비스듬하게 세운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16.양양 명주사 동종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4호

지 정 일 1980.02.26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길 93-229 (어성전리 산59)  시 대 고려시대

조선 숙종 30년(1704)에 만들어진 높이 83㎝의 전형적인 조선 후기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가 종의 몸체에 비하여 가냘프며, 2마리의 용이 다소 형식화 된 느낌을 준다. 종 윗쪽의 4곳에 일반적인 종과 같이 정사각형의 유곽이 있고, 유곽 안에는 돌출된 9개의 유두가 있다. 유곽 사이의 빈 공간에는 윗부분에 범자를 돌려가며 4곳에 양각하고, 아래로 머리광배을 갖춘 보살상을 그렸다. 종의 입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덩굴무늬 띠가 있으며, 아랫부분에 글씨가 양각되어 있다.

몸체의 공간 구조나 종 아랫부분이 돋을새김으로 처리된 문양에서, 기하학적으로 변한 18세기 범종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17.양양 김택준가옥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창리길 4 (시변리 66)  시 대 조선시대

야산을 뒤로하고 있는 이 집은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며, 현재 경주 김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전체적으로 H자 모양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겹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부속건물로 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고, 부속채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안채는 6개의 방이 겹쳐서 배치되었고, 그 오른쪽으로 샛방을 만들어 사랑채와 연결하고 있다. 사랑채 2칸은 외부에 툇마루를 놓아 연결통로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의 왼쪽에는 부엌이 있고, 그 앞쪽으로 곳간과 외양간을 덧붙였다. 부엌과 덧붙어 있는 방은 사당으로,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마당의 왼쪽에는 옛날에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있고, 뒷쪽에는 야산을 파고 돌로 벽을 만든 약0.5평 정도의 냉장굴이 있다. 마당에는 두 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남녀가 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18.양양 이두형가옥

종 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1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들돌길 284-1 (서선리 46-1)  시 대 조선시대

소나무 숲이 울창한 야산을 뒤로 하고 있는 이 집은 경주 이씨의 종가로 약 20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의 전형적인 온돌 중심의 겹집에 마루가 도입된 민가이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본채를 기본으로, 왼쪽 앞으로 외양간을 1칸·뒷쪽으로 방과 창고를 1칸씩 덧붙여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본채는 지붕 옆 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으로, 오른쪽 3칸은 방을 겹쳐서 배치하였고 왼쪽 1칸은 부엌을 두었다. 부엌과 연결된 외양간의 윗부분을 수납공간으로 활용하며, 부엌과 연결된 방으로의 출입은 밖에서만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본채에 덧붙여 지은 집은 지붕 옆 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옆 마당에는 2칸의 부속건물이 있으며, 여자들이 주로 출입하는 작은 문이 옆쪽에 있다. 남쪽의 앞마당에 심으면 좋다는 대추나무가 2그루 있어 풍수지리에 대한 고려가 엿보인다.

 

19.양양 진전사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52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37번지외3필지  시 대 통일신라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나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에는 절이 없어질 때 스님들이 절터 위에 있는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하고 떠났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양양 선림원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53호

지 정 일 1982.11.03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 424  시 대 통일신라

선림원은 9세기경에 홍각선사가 지었다는 큰 절로 승려들 수도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언제 불에 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1948년에는 신라 동종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종은 상원사 범종, 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다. 월정사에 옮겨 보관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남아있는 문화재로는 삼층석탑(보물 제444호)과 승탑(보물 제447호), 석등(보물 제445호), 승탑비(보물 제446호)들이 남아있다. 

 

 

21.양양 동해신묘지

종 목  강원도 기념물  제73호

지 정 일 2000.01.22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동해신묘길 8-18 (조산리 335)외 1필  시 대 조선시대

강원도 양양군에 위치한 동해신묘는 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천과 바다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였다.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고려사』를 통해 고려시대에 이미 나타나 조선 초기에 국가 제사 장소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서쪽으로 대나무와 솔밭이 있고, 서쪽은 민가와 접해있다. 남쪽과 동쪽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새로 지은 정전이 1동 있는데 일제시대에 철폐되었다가 199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정전의 서북쪽으로 정조 24년(1800)에 관찰사 남공철이 글을 지은 양양동해신묘중수기사비가 있다.

동해신묘는 조선 초기 나라에서 제사를 정비하여 서해·남해와 함께 주관한 곳으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22.낙산사 홍연암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지 정 일 1984.06.02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전진리 57-2)  시 대 통일신라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연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23.양양 김성래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북분안길 106-9 (북분리 391) 시 대 조선시대

김해 김씨 17대 손이 살고 있는 가옥으로 현 소유자의 14대 조부가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본래 초가였던 것을 60년전 기와로 바꿨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어 있는데 안채는 양양지방에 남아있는 북방계통의 집이다. 왼쪽으로 넓은 부엌을 배치하고 오른쪽으로 가운데를 갈라 나눈 뒤, 다시 구획하여 6개의 작은 방을 만들었다. 부엌 앞으로 내밀어 지은 외양간은 창고로 개조하였다.

사랑채는 나중에 늘려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안채와 달리 큰 방 셋을 마련하고 밖으로 툇마루를 두어 방과 방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문은 전형적인 솟을대문으로 대문의 왼쪽에 마구간과 광이 있다. 출입로 오른쪽에 연꽃이 있는 방지가 있어 사랑채 앞쪽 지붕선과 함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24.양양 조규승가옥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0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포매리 106-1  시 대 조선시대

현 소유자의 10대조가 세운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는 ㅁ자형 평면을 가진 집이다. 집을 지을 당시에 현재 사랑채로 사용되는 건물을 먼저 짓고 그 뒤에 안채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 옆에 방과 부엌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가운데 방 3칸을 배치하고 앞면에 툇마루를 놓았다. 툇마루 양 옆으로는 부엌과 창고를 마련하였다. 창고는 공간을 넓게 확보하기 위하여 앞으로 내밀고 앞면은 누마루 형태로 건물을 높였으며 방 앞쪽으로 툇마루를 놓았다.

가옥이 ㅁ자형 배치이므로 폐쇄된 안마당을 가지고 있고 출입구와 함께 건넌방과 아래사랑 사이에 좁은 문이 있어 작은 출입구로 사용하고 있다.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집이지만 3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5.양양향교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5호

지 정 일 1985.01.17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거마천로 52-20 (임천리 297)  시 대 고려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 충혜왕(재위 1330∼1332, 1339∼1344) 때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인조 4년(1626) 크게 넓히고 숙종 8년(1682)에는 임천리로 옮겨 지었다. 한국전쟁으로 향교가 불타 없어지자 1952년에 대성전과 동무·서무, 동재·서재 등을 다시 짓고 그 다음해 명륜당을 다시 지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다. 동·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대성전 좌우에 자리잡고 있다. 그 앞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맨 앞쪽에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이 있는데 규모는 앞면 7칸·옆면 2칸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6.양양 명주사 부도군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지 정 일 1991.02.25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송이로 1043-13 (어성전리 산58) 시 대 고려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명주사에 마련된 이 부도밭에는 모두 12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으며, 4기의 비석도 함께 남아있다.

12기의 부도 중에서 7기는 3단을 이루는 기단 위로 탑몸돌 및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사각의 바닥돌과 둥근 탑몸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나머지 5기는 받침돌 위로 종 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큼지막한 머리장식을 두었다. 4기의 비는 낮은 사각받침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갖춘 구조이다.

원래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모두 모아 보존하고 있다. 

27.양양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지 정 일 1996.09.30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구룡령로 2115 (서림리 74-1)   시 대 통일신라

현재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 상평초등학교 현서분교 교정에 3층석탑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불상으로, 1965년 가까운 논에서 발견되어 옮겨 놓은 것이다.

불상의 머리는 없어졌고 몸도 손상이 많은 상태이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싼 형태로 보아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8각형의 대좌는 결실된 부분이 있지만 조각솜씨가 매우 우수하다. 밑받침돌 위에 4매의 석재로 구성된 하대석을 올려 놓았는데, 각 면마다 1구씩의 사자를 돋을새김하였다.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1구의 향로와 7구의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중대석 위에는 별도로 8각의 딴 돌을 놓았는데 이것은 원래 중대석 받침돌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별도로 중대석 받침을 만든 예는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과 청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24호)처럼 9세기 중엽의 대좌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불상의 주변에는 기둥주춧돌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약사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8.양양 서림사지 삼층석탑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0호

지 정 일 1996.09.30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구룡령로 2115 (서림리 74-1)  시 대 고려시대

상평초등학교 현서분교 운동장 한쪽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는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논에 있던 것을 1965년 옆에 있는 서림사지석조비로자나불좌상(강원도문화재자료 제119호)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신의 1·2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급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둔하고 무거워 보이는데,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들려있어 무거운 맛을 덜어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1·2층은 4단, 3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대역할을 하는 네모난 노반이 3층 지붕돌과 한돌로 조각되어 있다.

몸돌의 너비가 좁고 두툼한 지붕돌이 급경사로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 가늘고 길어 보이고 안정감이 적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9.양양 기구회첩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지 정 일  2013.01.11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학포길33 (오산리 51)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책의 구성은 창립배경을 명시한 회첩서문과 세부 운영기준인 입령, 회원 좌목으로 되어 있고, 끝부분에는 후대에 작성된 발문이 있다. 서문에 중국 양양의 기구회를 본떠 본 기구회를 창립하였다는 설립 취지를 밝히고 있고, 영조 37년(1761)에 창립하였다는 ‘신사년’ 간기가 있어 제작 년대가 확실한 것으로 보여진다. 겉지와 속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속지는 동일 지질 16장과 창립이후 현재까지 회원을 추록하고자 추가한 2가지의 속지로 구분되어있어 총 3가지 지질로 구성되어있다. 좌목을 작성한 필체로 보아 창립회원은 20명으로 추정된다. 별록 2책, 기구계 수입ㆍ지출부 각 1책, 기구계 좌목 1책이 함께 있다. 기구회첩은 1761년 중국 양양의 기구회를 본떠 창립한 양양군 유지들의 친목모임인 기구회의 회첩으로 동명이지의 문화를 비교해볼 수 있고, 현재까지도 기구회의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어 지역의 미풍양속 등 향토문화의 계승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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