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의 형성과 자연환경은 상당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한 국가 전체에서는 물론이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의 자연환경적 차이에 따라 각기 지역의 인성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강원도는 산과 바다를 아울러 가지고 있지만 역시 한가지만을 지적하라 한다면 강원도 자연환경의 가장 큰 특성은 결국 산이 된다. 많은 산으로 인하여 농경지가 적고, 이는 인구의 희소와 직접 관련이 있다. 이에 강원도에는 대규모 도시가 형성되지 못하였고,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발전이라는 개념에서는 상당한 거리가 느껴지는 지역이다.
그런 때문인지 일찍이 조선시대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원도에 대해 “산수가 아름다워 놀기는 좋으나 경제적 효용이 있는 곳이 아니기에 생활의 넉넉함이 없어 세거하기에는 알맞지 못한 곳”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강원도는 흔히 예맥의 땅이라고 전해 온다. 이에 대한 최고의 역사기록은 중국의 『한서(漢書)』 동이전(東夷傳)이다. 이 기록에서 예맥인들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예맥사람들은 성품이 순진하고 착하며 욕심이 적어서 요구함이 없고, 풍속은 남녀가 다 곡선으로 된 옷깃의 옷을 입었다. 산천을 소중히 여기고, 산천마다 경계를 짓고 이웃끼리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일가끼리 혼인하지 않고, 모든 일에 꺼리는 것이 많았다. …(중략)… 별자리로 풍년을 점쳤다. 늘상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주야로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을 제사지내고 신으로 삼았다.
이 기록의 내용이 물론 현재의 강원도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이를 통하여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순박한 생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근래에까지도 강원도 전지역에 전승되어 온 민속의 현상들 곧 암하노불(岩下老佛)로 일컫는 산간의 순박한 강원도 사람의 품성을 비롯하여 별자리로 풍년을 점치는 좀생이점, 범을 제사지내고 신으로 삼는 산신신앙 등을 헤아려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성종대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성현(成俔)은 그의 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에서 원주 사람들의 기질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원주 사람들은 태어나는 날부터 그 부모가 자식의 명의로 먼저 곡식 한 말을 떼어 주어 재곡(財穀)의 밑천으로 삼아 해마다 이자를 받아 재산을 불려 나가는데 하찮은 왕겨 한 톨도 만금처럼 소중하게 여긴다. 새벽부터 밭고랑에 서서 쟁기질을 재촉하고 김매기를 서두르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다가 날이 컴컴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서로 모여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윗감을 고를 때조차도 “아무개는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았으니 안 된다”라고 하거나 “아무개는 산에 올라가서 꿩 사냥을 했으니 안 된다”라고 한다. 반드시 근검하고 인색한 사람을 골라 사위로 맞아들인다. 한 번이라도 방탕한 행동을 하면 향당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을 안에 높은 담장을 친 큰 집들이 많고 몹시 가난한 사람은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원주인들은 부지런하고 절약하는 성품을 지녔다는 것이다. 또한 『여지도서』에서는 횡성사람의 성품을 평하여 말하기를 “효도가 지극하며 노인을 공경한다. 농사에 힘쓰며 송사(訟事)가 없는 고장”이라 하였으니 효근(孝勤)하며 화평한 성품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강원인의 성품에 대하여 포괄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지적한 사람은 조선 숙종때의 이중환이다. 그는 『택리지』에서 강원도는 ‘산이 많고 들은 적으며 사람들의 성품은 부드럽고 삼간다’라고 하였다. 팔도를 돌며 각 지역의 인심을 직접 체험한 이중환의 표현이다. 한마디로 강원도인의 품성은 순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박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강직하다는 것과도 통한다. 고려 고종 때 거란족의 침입에 맞서 원주·춘천인들은 도륙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항전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군사마저 흩어져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는 곳이 비일비재한 상황에서도 원주민들이 영원산성에 집결해 끝까지 항전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대에 와서는 류인석 의병장을 비롯하여 도내 각처에서 많은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구국봉기 정신은 순박함 속에 내포된 올곧은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