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마침내 그랜드슬램

본문

17446477659009.jpg

지난해 우승자 스코티 셰플러가 올해 우승자 로리 매킬로이에게 마스터스 챔피언의 상징인 그린 재킷을 입혀주고 있다. [AP=연합뉴스]

10여년 전, 소파에 누워 유러피언 투어 골프 중계를 보다가 저절로 벌떡 일어섰다. 한 소년의 스윙이 너무나 힘차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소년 이름은 로리 매킬로이였다. 아일랜드를 여행할 때 일부러 벨파스트 교외에 있는 그의 홈 클럽을 찾아갔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걸린 사진 속 어린 시절 매킬로이는 너무도 순박했다. 더 어린 시절 동영상도 인상적이다. 9살 아이가 칩샷으로 세탁기 구멍에 볼을 넣는 영상이었다. 아이는 매우 긴장한 듯했는데, 실력으로 봐서는 별로 어렵지 않을 미션을 네 번 만에 성공했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모습이었다.

타이거 우즈는 2살 때 TV에 나왔다. 조그만 캐디백을 메고 신나게 걸어 나온 꼬마는 드라이버로 호쾌하게 티샷을 했다.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화려한 조명과 방청객의 눈길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했다. 위대한 선수는 벼랑 끝 승부를 즐긴다. 마이클 조던이나 우즈는 답답하게 경기하다가도 승부의 분수령인 순간에는 꼭 넣어야 하는 슛이나 퍼트를 어김없이 넣었다.

매킬로이(36·북아일랜드)는 스윙이 훌륭하지만 가장 중요할 때 실수했다. 매킬로이가 프로가 된 후 한국에서 경기할 때 호텔 방에서 집이 그리워 울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기자가 마스터스를 처음 취재하러 간 2011년, 마침 매킬로이가 우승 기회를 잡았다. 그는 최종라운드를 최경주 등 공동 2위 그룹에 4타 앞선 선두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날 8오버파를 쳤다. 아멘코너 한가운데인 12번 홀 그린에 앉아 난감해하는 그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평소 갑옷을 두른 듯하던 스타 선수도 오거스타에선 고해성사하듯 속마음을 얘기한다. 그중 매킬로이 얘기를 듣는 게 제일 좋았다. 그는 지난 50년간의 마스터스 및 디 오픈 우승자를 다 외운다. 지식이 많고 사려 깊고 위트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나약한 인간의 마음을 솔직히 보여주는 점이다. 골프를 넘어 인간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다.

매킬로이는 2014년까지 마스터스를 뺀 3개의 메이저대회(디 오픈·US오픈·PGA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마스터스만 우승하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이었다. 그런데 이후로 실력 발휘를 못 했다. 마스터스에서 가장 움츠러들었다. 그랜드슬램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고 경기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14일(한국시간) 제89회 마스터스에서 연장 끝에 우승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매킬로이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본능적으로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가끔 주저한다. 그러나 막상 겪고 나면 생각했던 만큼 아프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아프지 않겠나. 재미교포 프로골퍼 마이클 김은 “매킬로이는 셰익스피어”라고 표현했다. 골프라는 무대에서 비극을 쓰는 작가라서다. 그러나 다시 도전해 이겼다. 세계 남자골프의 여섯 번째 그랜드슬래머가 되면서 골프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이름을 남겼다. 비극을 넘어선 인간 구원의 드라마를 쓴 셈이다.

매킬로이는 우승 후 인터뷰룸에 들어오면서 “여러분은 (내가 우승했으니) 내년에는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할 거냐”고 물었다. 마스터스 때마다 “올해는 될 것 같냐” “어떻게 준비했냐” 등 반복된 질문을 받았던 그가 기자들에게 던진 농담이다. 그간 고생 많았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더는 하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2,452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