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서울 1.5배 태운 최악 산불…7년 전 보고서에 예방책 있었다 [산불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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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군 영덕읍의 한 항구에서 어민들이 돌미역 작업을 하고 있다. 뒤로 불길에 전소된 배의 잔해가 남아 있다. 조경래 국립청소년해양센터장 제공

지금도 불에 탄 마을을 지날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요.

경북 영덕군 국립청소년해양센터내 대피소에서 만난 이미상(65)씨는 한 달 전 불덩어리가 마을로 날아왔을 때의 끔찍한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따개비 마을’로 유명한 석리 이장이다. 바닷가 언덕에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모양이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 같다고 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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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따개비 마을이 산불에 파괴돼 있다. 뉴시스

지난달 22일 경북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25일 영덕까지 넘어오면서 마을은 처참한 잿더미로 변했다. 주민들은 방파제로 몸을 피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는 “10분만 늦었어도 주민들은 몰살 당했을 것”이라며 “마을을 복구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2년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점점 불어나는 산불 피해…서울 1.5배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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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22일 경북 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산불이 남긴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초고속 산불’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확산 속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탓이다.

행정안전부·산림청에 따르면, 경북 산불의 피해 면적은 9만 9289㏊로 잠정 집계됐다. 서울시 면적의 1.5배에 달한다. 산림청이 산불 진화 직후 파악했던 산불 영향 구역보다도 두 배 이상 크다. 시설 피해액은 1조 1306억 원으로 확인됐다. 영남 산불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만 1조 4000억 원의 추경 예산이 투입된다.

인명 피해도 역대 최대 규모다. 27명이 사망했으며, 4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717세대, 2898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7년 전 보고서에 “인명피해 중심 진압 체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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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경북 의성군에서 한 여성이 산불로 발생한 연기 주변을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산불 전문가들은 이렇게 전례 없는 피해가 발생한 건 “전술·전략의 실패”라고 말한다. 경보 및 대응 시스템이 산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불 대응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을 때마다 제기돼왔다. 하지만, 이듬해 산불이 잠잠해지면 다시 손을 놓아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산림청은 강원도에 대형산불이 발생한 이듬해인 2018년에 3920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산불통합관리체계연구’ 용역을 진행했다. 해당 연구 보고서는 인명 피해 예방을 중심으로 산불 진압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다양한 정부 기관과 지자체가 따로 화재에 대응하다 보니 중복·혼선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농기계 등을 동원해 마을 단위로 주수(화재가 번지지 않도록 미리 물·약재를 뿌려두는 행위)를 하는 것 역시 대책으로 제시됐다. 실제로 경북 산불 당시 안동시 임하면의 한 마을에서는 주민이 농약살포기에 물을 담아 집집마다 뿌린 헌신 덕에 쑥대밭이 된 이웃 마을과 달리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런 대책이 실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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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경북 청송군 파천면 지경리에서 밤새 번진 산불로 무너진 가옥 앞에 불에 탄 농기계가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산불 진화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농기계 임대사업소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마을 단위로 보급한 농약살포기로 주수만 해뒀어도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확신한다”며 “산불 진화에 필요한 장비·데이터를 유관기관이 실시간 공유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산불취약지역 허가 기준 강화 ▶산불 차단 기반 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사전산불영향평가제도 도입 등도 거론됐지만 대부분 적용되지 못 했다. 보고서 역시 비공개 된 채로 사실상 잊혀졌다.

“헬기 통합 관리” 논의했지만 무산 

정부 유관기관별로 운영 중인 헬기를 통합 관리하는 부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이번 초대형 산불처럼 국가 재난이 발생하면 국가 헬기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국무조정실 산하 항공운영통합기획단이 헬기를 별도 관리·조직하는 부서 신설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당시 기획단에 참여했던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정부 조직별로 각자 헬기를 별도 운영해야한다는 명분이 있어 결국 무산했지만, 국민 관점에서 보면 부처간 칸막이나 조직 이기주의로 볼 수도 있던 사안이었다”며 “산불이 역대 최악의 인명 피해를 양산한 시점에서 헬기 자원의 효율적 운영 방안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빠른 불, 더딘 경고…“대피 체계 개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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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삼의리 삼의계곡에 전날 발생한 산불에 불탄 차량이 보존돼 있다. 이 차량 인근에서 산불 대피하다 숨진 3명이 발견됐다. 연합뉴스

초고속 산불에 맞서 주민 대피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북 산불 당시 경보 시스템이 불길의 속도를 앞서가지 못하면서 인명 피해가 커졌기 때문이다. 본지가 입수한 산림청의 ‘산불접수 및 진화 시간대별 조치사항’을 보면 7명이 숨진 경북 영양군 석보면의 경우 산불이 확산한 뒤에야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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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기후변화로 인해 고온 건조해진 환경과 강풍의 결합으로 ‘빠른 불’의 위력은 앞으로 더 강해질 전망이다. 21세기 들어 3% 비중에 불과한 빠른 불이 전체 산불 피해의 89%, 사망자의 66%를 발생시켰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다. 문현철 한국재난관리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은 “대형화·상시화되는 산불에 맞서 인명 보호 중심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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