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조직·사람·인프라…당신은 어디에 기부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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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기부자들이 주목하는 ‘기반조성기부’

일러스트: shutterstock
한국에서 가장 기부 받기 어려운 ‘3대 영역’이 있다. 첫째 조직에 대한 기부, 둘째 사람에 대한 기부, 마지막으로 인프라에 대한 기부다. 이 셋을 다 했던 사람이 있다. 경남 진주의 시민활동가이자 자선가 김장하(81) 선생이다.
김장하 선생은 시민단체, 환경단체, 지역 언론, 극단, 복지기관 등 풀뿌리 단체에 수십 년간 꾸준히 기부금을 전달했다. 돈의 사용처에도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운영비, 인건비, 임대료 등 단체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기부금을 쓸 수 있게 했다. 자선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제약 없는 기부’를 일찌감치 실천한 셈이다.
비영리 조직, 사람, 인프라 등에 기부하는 것을 ‘기반조성기부(Base-Building Support)’라고 부른다. 비영리단체가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주는 기부를 뜻한다.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는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기반조성기부가 최근 국내 재단과 고액기부자들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역행하는 기부자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단체를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데 필요한 비용 ▶인재를 채용하고 역량을 강화하는 데 드는 비용 ▶사무 공간이나 설비, 소프트웨어를 마련하는 비용 등이 기반조성기부에 포함된다. 단체가 성장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지원이지만, 기부에 따른 성과가 당장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기부’라고 불린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조직, 사람, 인프라에 대한 지원을 기부의 필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소외된 분야였다. 개별 프로젝트나 사업을 지원하는 기부금은 있어도 조직이나 사람을 지원하는 기부금은 거의 없었다. 또 사업에는 기부를 하면서도 그 사업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비영리 조직의 운영비나 인건비로 예산이 쓰이는 건 제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한국의 기부문화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기부자들이 최근 들어 생겨나고 있다. 3대 기피 영역으로 불렸던 조직·사람·인프라만 딱 집어 지원하는 기부자들이 등장했다.
김강석 블루홀(크래프론) 공동창업자는 지난달 다음세대재단과 ‘임팩트 비기닝 블루’ 기금을 조성했다. 시작 단계의 비영리조직들이 과감하게 상상하고 임팩트에 몰입할 수 있게 최소 2000만원씩의 지원금과 역량 강화 교육을 제공할 예정이다. 기금 출연자인 김강석 기부자의 뜻에 따라 ‘사업’이 아닌 ‘사람’ 중심 지원으로 설계한 게 특징이다. 전형적인 기반조성기부 사례다. 김강석 기부자는 앞서 2022년에는 소규모 비영리 조직의 성장을 지원하는 ‘IP1 기금’을 36억원 규모로 조성하기도 했다. 단체가 흔들리지 않고 중장기 전략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대 3년간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재산 기부로 설립된 공익재단 브라이언임팩트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혁신가들을 선정해 월 300만원씩 최대 4년간 지원금을 주는 ‘브라이언펠로우’를 운영 중이다. 김범수는 ‘한 사람의 혁신가가 세상을 바꾼다’는 철학으로 사람에게 집중하는 기부를 하고 있다.
김강석과 김범수가 제공하는 지원금은 모두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제약 없는’ 기부금이다. 인건비, 운영비, 임대료, 사업비 등 기부를 받는 쪽에서 용도를 결정할 수 있다. 방대욱 대표는 “한국의 많은 비영리 창업가가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감과 비전을 갖고 활동을 시작하지만, 단기적이고 보수적인 기부 문화로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면서 “조직·사람·인프라에 대한 이 같은 기부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부와 투자 사이
김장하 선생의 기부는 ‘주고 잊어버리는’ 기부다. 기부의 효과가 몇 달, 혹은 몇 년 뒤에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조직의 가치와 목표를 믿고 장기적 관점에서 함께 고민하면서 기다려 준다. 흥미로운 건 이런 방식이 기부보다 ‘투자’의 성질에 가깝다는 것이다. 성공을 확신할 순 없지만, 공동체의 변화 가능성을 생각하며 과감하게 지원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김강석과 김범수가 하는 기반조성기부도 기부와 투자 사이에 있다. 비영리에 사업비를 지원하는 전통적인 기부는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Low Risk, Low Return)’이다. 예측할 수 있고 실패 확률은 낮지만, 성과도 제한적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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