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가족 돌봄청년 맞춤형 지원체계 만들자"…당사자들이 말하는 정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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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청소년옹호활동가 ‘WAVE’
당사자들이 모여 관련 정책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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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가족 돌봄아동·청년(이하 돌봄청년)’ 관련 정책 제안에 당사자들이 직접 나섰다.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차기 정부가 주목해야 할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다.

돌봄청년은 중증질환이나 장애·정신질환 등으로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돌보고 있거나 생계를 책임지는 34세 이하를 이르는 개념이다. 해외에서는 ‘영케어러(young carer)’라고도 부른다.

지난달 29일 온라인 화상회의를 통해 당사자 조직인 웨이브(WAVE) 활동가 3명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웨이브는 월드비전의 돌봄청년 지원 사업에 참여한 당사자로 구성된 권리 옹호활동가 조직이다. 이들과 간병과 생계, 학업을 병행하며 겪은 어려움, 복지정책 정보 부족으로 인한 고충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제안 정책으로는 ▶능동적인 지원 대상 발굴과 서비스 연계 중심의 복지 체계 ▶시군구 기초 자치단체 단위의 현장 전담 인력 확충 ▶맞춤형 조기 지원과 자립을 위한 투자 확대 등을 구체적으로 내놨다.

지원만큼 중요한 대상자 발굴

올해 고3 수험생인 은비(활동명)는 일곱 살부터 가족을 돌보는 일을 했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알코올성 치매인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고, 오빠와 언니는 지적장애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상황이다. 네 식구 중 요리를 하고 식사를 챙길 수 있는 사람도 은비가 유일하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돌봄을 전반적으로 책임지는 ‘주돌봄자’인 셈이다.

그런데도 은비는 ‘돌봄청소년’이라는 용어를 올해 초 학교에서 처음 들었다. 본인이 돌봄청소년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됐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당연하게만 여겨왔어요. 가끔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그걸 누군가 알아주고 지원해 줄 거란 생각은 못 해봤거든요. 청소년들은 학교에 있으니까 학교 차원에서 복지 시스템과 연결해 조기 개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현행 제도로는 돌봄청소년 스스로 직접 복지서비스를 찾아 신청해야 한다. 학업과 간병을 병행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쉽지 않은 조건이다. 월드비전이 지난해 돌봄청소년 1117명을 대상으로 조사·분석한 ‘돌봄청소년 맞춤형 지원체계 수립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가 지원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이용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실제 어떤 서비스가 지원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이슬(활동명)의 제안도 비슷했다. 그는 “돌봄청소년의 상황이 워낙 다양해서 복지 제도가 있더라도 내가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무척 어렵다”며 “어른들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온라인에서도 온갖 정보가 섞여 있어서 돌봄청년 맞춤형으로 전용 플랫폼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청년미래센터를 통해 돌봄청년과 고립·은둔청년을 전담 지원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만 인천·울산·충북·전북 등 4개소에 불과해 실질적인 지원을 받기엔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이슬은 “운 좋게도 발굴 대상에 들어가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었지만, 관할 지역이 넓지 않아 지원받지 못하는 청년이 훨씬 많다”며 “맞춤형 사례관리와 발굴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래에 투자할 시간조차 없어

돌봄청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문제는 ‘시간 빈곤’이다. 정부 차원의 첫 실태조사인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를 살펴보면 돌봄청년은 일주일에 평균 21.6시간을 돌봄에 썼다. 주돌봄자의 경우 주당 평균 돌봄시간이 32.8시간으로 훨씬 길어졌다. 하루 4시간이 넘는다. 돌봄기간은 평균 46.1개월로 조사됐다. 주로 돌보는 대상은 할머니(39.1%)였고, 형제자매 25.5%, 어머니 24.3%, 아버지·할아버지 각 22.0%로 나타났다. 직계가족이 아닌 친척을 돌보는 경우도 21.7%나 됐다.

대학교 4학년인 바다(활동명)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간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생계비 마련을 위해 학교 행정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주말에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한다. 평일에는 뇌전증을 진단받은 아버지의 약을 챙기고 우울증을 앓는 여동생도 챙기고 있다. 그는 “취업을 위해 성적을 관리하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며 “한때는 공부하고 스트레스 풀러 놀러 가는 친구들이 마냥 부럽기도 했는데, 돌봄청년에게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과 함께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돌봄청년을 10년 전부터 지원하기 시작한 영국에서는 ‘단기 돌봄 서비스’를 통해 주돌봄자의 시간 빈곤을 해결하고 있다. 주간돌봄센터 이용이나 요양원 단기 체류를 포함해 가정을 방문해 돌봄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중앙정부는 간병인 수당을 돌봄청년에게 지급해 가족 돌봄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있다.

호주 정부에서는 지역 비영리단체들을 통해 대면 혹은 전화 상담, 온라인 기술 지원, 재정 패키지 지원, 긴급 임시 간호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재정 지원 프로그램 ‘영케어러 보조금’은 돌봄과 학업을 동시에 이어갈 수 있도록 연간 4000호주달러(약 360만원)를 지원하는 제도다.

국내에서도 지난 3월 ‘가족돌봄 등 위기 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지만, 법이 시행되는 건 2년 후다. 전문가들은 실질적인 지원책을 시행령에 담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할 시기라고 했다. 남상은 월드비전 옹호실장은 “가족돌봄 등 위기 아동·청년 지원법이 실효성 있는 복지로 이어지려면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며 “지원 예산을 확대하고 현장성과 전문성을 갖춘 민간단체들과 협력해 대상자를 조기 발굴하고 개별 필요에 따른 맞춤형 지원을 할 수 있는 체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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