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폴란드서 한식 만드는 우크라 이모님들…“전장의 동생도 한국김 맛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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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 알싸한 고추장 요리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며칠 째 빵과 소시지로 끼니를 때워 한국음식이 마침 그리운 터였다. 주방에선 ‘이모님들’이 상추를 한창 손질하고 있었다. 상추는 식당에서 직접 길렀다고 한다. 영락없는 점심 손님맞이를 서두르는 대한민국 한식당의 풍경이다. 이모님들이 우크라이나전을 피한 난민들이고, 여기가 폴란드란 점만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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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폴란드의 한식당에서 한식을 만들고 있는 타냐 코르부착(오른쪽)과 이리나 니블리차. 박현준 기자

타냐 코르부착(41)과 이리나 니블리차(46)는 15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식당 하루의 부엌을 책임지고 있다. 타냐는 이곳에서 2년 가까이일한 베테랑, 이리나는 한 달된 새내기로 경력은 다르지만 둘 다 우크라이나전으로 한식을 처음 만났다.

타냐는 원래 우크라이나 서부 이바노 프란키우스크의 검찰청 공무원이었다. 그에게도 모든 우크라이나인처럼 2022년 2월24일 러시아 침공이란 난폭한 운명이 닥쳤다. 타냐가 일하던 곳에서는 그날 오후 4시30분쯤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달 뒤 타냐는 탈출했다. 50인승 버스를 타고 나흘에 걸쳐 폴란드 국경에 도달했다. 폴란드인 자원봉사자들이 빵과 물, 생필품을 제공했다.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며 타냐는 “폴란드인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이 3년 넘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주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쳤다. 친구의 아들은 전쟁 직후 스물다섯 나이로 전사했다. 4살 터울인 타냐의 남동생도 3년째 전장에 있다. 가끔 위치를 함구한채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누나는 전장의 동생에게 한국산 김과 옷을 부쳤다. 동생은 “한국 김이 아주 맛있다”며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승리한다”고 누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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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난민 타냐 코르부착과 이리나 니블리차가 만든 비빔밥과 상추. 박현준 기자

한국 식당을 찾은 건 2023년 가을 구인광고를 보고서였다. 실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비빔밥과 짜장면에 자신있다”고 한다. 하루의 문은경 사장이 “타냐는 짜장 소스도 만들 줄 알고, 본인이 집에서 만들어서 가져오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타냐는 한식을 만들 때면 우크라이나 음식 고움프카가 생각난다고 했다. 쌀과 다진 고기, 양파 등을 양배추로 감싸고 찐 뒤 토마토 소스를 곁들여 먹는 요리다. 비빔밥을 쌈에 싸먹는 맛이라고 한다. 비빔밥을 주문하니, 타냐가 손질하던 상추가 함께 나왔다. 비빔밥에 된장을 조금 넣고 상추쌈을 만들어 먹어보라고 단골 손님이 일러줬다. 고움프카식 비빔밥인 셈이다.

타냐는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하지만 알 수 없다”면서도 “반드시 우크라이나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면 한식당을 열어보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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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폴란드의 한식당에서 한식을 만들고 있는 타냐 코르부착(오른쪽)과 이리나 니블리차. 박현준 기자

타냐와 달리 이리나의 마을은 전쟁 직후 바로 함락됐다. 러시아에서 겨우 15㎞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반항하던 사람들은 죽거나 감옥에 갔다. 준비해둔 식량을 아껴 먹으며 버텼다. 두 달 뒤 우크라이나군이 마을은 수복했다. 러시아군이 다시 몰려들며 이윽고 이리나의 마을은 뺏고 뺏기는 격렬한 전쟁터가 됐다.

이리나는 우크라이나군이 마을을 탈환한 직후 두 아들과 함께 걷거나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가며 2022년 4월 폴란드에 도착했다. 그 직후 우크라이나를 원조하는 단체에서 일하다 최근에 한식당의 문을 두드렸다. “비빔밥과 불고기”가 자신 있는 한식이라고 했다.
이리나는 “15일 휴전협상이 잘 안 될 것 같다”고 한숨지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협상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게 이리나의 생각이다. 그래도 평화가 찾아오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집은 전쟁통에 완전히 파괴됐을지도 모른다. 이리나는 “집은 어제 있었지만 오늘 없을 수도 있고, 오늘 있지만 내일 없을 수도 있다”며 “그렇지만 버섯을 따던 숲, 낚시하던 작은 연못, 우크라이나 국기와 같은 고향의 푸른 하늘이 그립다”고 했다.

문은경 사장은 “육아로 잠시 휴직한 또 다른 직원은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에 한식당을 차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며 “김치 담그는 법까지 몽땅 전수해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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