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합 사표 제출, 우리 정부 수립 뒤로 미뤄야하는 이유 10가지 [김성칠의 해방일기(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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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1월 6일 개다. [4시 기상]

아침에는 삼국유사 이야기.
낮차로 강 군을 보내다. 끝없는 감회가 가슴에 용솟음쳤으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서정득(徐廷得) 군과 웃음엣소리만 주고받았다. 차에 오른 그의 모양은 아무리 붐비는, 사람이 들끓는 차속에서도 고영초연(孤影悄然)히 보여진다. 일로평안히 가라. 군의 앞길도 그러하라.
요사이는 차가 늘 연착이 되어서 주먹밥 나눠주는 다섯시 차가 어두워서야 오고 때로는 열시를 넘는 경우도 있으나 직원들이 구휼사업을 꾸준히 지속하여 가는 것이 한없이 고마웁고 마음 든든하다. 여사무원들의 노력에는 항상 감사한다.
11월 7일 개다. [4시 기상]

양력으로 고쳐서 오늘이 개천절이라고.
아침에 수석(首席)이 와서 학교도 놀고 하니 조합도 놀자고 하는 것을 직원 전부를 모아놓고 아침 강화 대신에 개천절의 의의를 천명하고 우리들에게 좋은 명절이긴 하나 아직 음양력(陰陽曆) 간의 환산도 되지 않았고 더욱이 국가가 건설되어서 축제일로 확정된다면 물론 준행할지나 그렇지 못한 오늘날 함부로 놀기만 하는 것은 삼갈 일이며 항차 요사이는 걸핏하면 구실을 장만해서 놀고자 하는 기풍이 있으니 삼가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또 오늘은 소련의 혁명기념일이어서 풍설에 38도 이북의 주민은 부녀자들이 벌써부터 이 날에 피란을 걱정한다고 하니 우리들은 비록 그러한 처지에 놓여있지 않을망정 그러한 동포의 수난을 마음 아파해야 할 것이다.
[해설: 1909년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大倧敎, 창립 당시에는 “단군교”)가 창립되면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선포했다. 이것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경일로 지정하고 1948년 수립된 정부가 이어받았으나 이듬해부터 정확한 음-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양력 10월 3일로 고쳐 정했다.]
11월 8일 개다. [4시 기상]

아침에는 동요 이야기.
아침 굶다.
낮에 뜻밖에 장인이 오시다.
38도 이북의 소식을 비교적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진단학회의 국사교본을 초하기 시작.
[해설: 이남덕의 부친 이덕균(李悳均, xxxx-xxxx)은 충남 아산 출신이지만 3-1운동 관련 수배를 피해 고향을 떠난 후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천내리에 정착했다.]
11월 9일 개다 흐렸다. [4시 기상]

아침엔 민요 이야기.
낮에 장인이 현철 군 데리고 떠나시다. 천내리에 중학이 신설되어 13일에 입학고사가 있기 때문에 빨리 떠나시다.
오후엔 경희의 조력을 얻어서 무를 묻다.
11월 10일 흐리다. [2시 기상]

아침엔 가사(歌詞) 이야기.
내일 아침부터 봉흥회(鳳興會) 하기로 작정하였다.
다음과 같이 게시.
“모이라 봉흥회에
매일 아침 여섯시 정각에 모이어
낯 씻고 달음박질하고
애국가를 부르기로 합니다.
참가하고 싶은 이는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시오.
단련의 계절 겨울은 왔다.
조국을 위하여 일할 이 몸
무쇠처럼 튼튼하게 기르자.”
오후엔 면 농민위원회에 가서 구휼사업의 보고와 품평회 이야기.
진단학회서 낸 조선사 강의안을 초하느라고 〈초당〉 번역이 약간 늦어짐.
11월 11일 개다. (일) [4시 기상]

밤중에 비가 오기에 새벽 봉흥회를 걱정했더니 이내 개여서 먼지도 일지 않고 되려 좋았다.
날씨 좋은 일요일임에도 종일 들어앉아서 〈초당〉 번역하느라고 끙끙거리다.
11월 12일 개다. [3시 기상]

아침엔 이순신 선생의 이야기.
〈초당〉 번역과 승경도(陞卿圖) 베끼기.
오후엔 서정욱(徐廷煜) 군이 충북교육회의 리플렛을 가지고 왔는데 그중에 아주 좋은 글이 있었다. 충북 교육계에 사람 있음을 알 수 있어 마음 든든하였다.
하우영(河又榮) 씨 오늘부터 집에 와 있게 되었다. 아내가 좀 숨을 돌릴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아내는 이때까지 우리가 남에게 얹혀살았는데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되려 남을 건사해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신기한 듯이 말하였다. 조금이라도 우리 힘으로 남의 고난과 걱정을 덜어줄 수 있고 그들로 하여금 향상에의 지향(志向)에 눈뜨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겠다.
11월 13일 개다. [4시 기상]

오늘은 조합에 나가지 않고 종일 〈초당〉 번역하다.
낮에 왕암리 황해광(黃海光) 씨 다녀가다. 금년같이 비싼 고추를 값을 받지 않겠다 하니 잊지 않고 나중에 무얼로든지 답례를 해야겠다.
점심 먹다 아내와 거취 문제의 이야기가 나서 사표 제출의 시기는 우리 정부 수립 후라얄 것을 역설하였다.
1. 총독부거나 군정청이거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니 우리는 맡은 소임을 통해서 우리것을 끝까지 지켜가지고 새 정부에 넘겨야 할 것이다.
2. 군정당국은 우리의 진퇴와 거취를 맡길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재단(裁斷)을 내릴 곳은 후일 따로 있을 것이다.
3. 지금 조급히 결백을 보이고저 할 때가 아니다. 일정(日政)에도 협력한 우리다. 미정(米政)에 협력 못할 것이 무에냐.
4. 동포와 거취를 같이 해야 한다. 이 혼란한 과도기에 자기만 독선을 고집할 것이 아니다.

5. 건설에의 중대한 시기다 소절(小節)을 생각지 말고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6. 이왕 과오를 범했을지나 중도에서의 탈락을 꾀하지 말고 재단(裁斷)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
7. 미군이 또 징용으로 위협한대도 기어이 사직(辭職)할 것인가 반성해볼 일이다.
8. 직업의 전환도 사회의 안정을 기다려서 할 일이다. 이 격동기에 나까지 겹드려 움직이려 할 것이 아니다.
9. 이러한 기회를 타서 실력 이상의 자리를 얻어보겠다는 생각은 물론 없겠지만 차제에 내 소질을 살려보겠다는 희망도 삼가야 할 것이다.
10. 우리는 이 이상 미군을 성가시게 하지 말고 힘써 배울 것을 배운 뒤에 얼른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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