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보모'가 된 국가, 부양책에 길들어진 시장...자본주의 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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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자본주의를 망가뜨렸나
루치르 샤르마 지음
김태훈 옮김
한국경제신문
자본주의가 기능 부전에 빠졌다. 혁신과 경쟁을 바탕으로 한 역동성이 사라지며 성장 동력은 떨어지고 있다. 자원 배분의 최적화를 가능케 했던 효율성도 힘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시장의 자율성과 공정 경쟁도 예전 같지 않다. 빈부 격차나 대기업 등의 독과점은 심화하고 양극화는 확대되며, 불경기는 빈번하게 찾아든다. 자본주의의 실패라 할 만하다.
자본주의를 이처럼 망가뜨린 주범으로 흔히 꼽히는 건 시장의 실패다. 시장 기능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각종 한계와 결함을 노출한 채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게 됐다는 시각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이에 동조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시장과 자본주의의 원칙을 왜곡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뉴욕 증권거래소(NYSE). [로이터=연합뉴스]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정부 관리 자본주의’다. 어느새 ‘보모 국가’가 되어버린 정부는 복지 정책과 재정 및 통화정책을 동원해 끊임없이 시장을 지원하고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지 머니(easy money)’다. 정책 금리 인하나 채권 매입으로 시장 금리를 낮추거나 시장 안정을 위한 긴급 대출이나 지원, 개별 은행과 기업에 대한 구제 금융 등을 통해 차입을 장려하는 모든 수단을 망라한다.
‘이지 머니’를 동원한 정부가 자본주의의 관리자를 자처하면서 정부와 시장 사이의 힘의 균형은 깨져 버렸다. 재정과 발권력을 동원한 정부는 시장의 자율성과 역동성을 잠식하고 있다. 물론 정부가 시장이나 자본주의를 망칠 의도로 나선 건 아니다. 정부는 불경기와 불황, 금융위기 등 절체절명의 순간에 소방수나 구원투수로 등장해 위태로웠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해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며 정부는 재정 지출과 저금리 등 자신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행사했고, 시장은 국가의 보살핌에 길들여져버렸다. 게다가 정부는 위기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위기가 아니라 위기의 조짐이나 징후만 보여도 당장 돈줄부터 풀 태세로 덤비기 시작했다.

지난달 서울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100달러 지폐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뿐만 아니다. 정부의 진통제에 취해버린 시장은 고통을 견딜 생각도 힘도 없다. 진통제 용량을 줄이는 건 참을 수 없다. 저자가 “긴축은 더 이상 지출 삭감이나 세금 인상을 뜻하지 않는다. 전년보다 아주 약간 느리게 부채와 적자를 늘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대로 정부의 과잉 지출을 줄이기는 어려워졌다.
그 결과 경기 둔화나 침체 속 부실기업이 퇴출당하고 구조조정돼 시장 체질이 개선되는 '불경기의 청산 효과'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사라지게 됐다. 부채 상환이나 사업 정리 압력이 줄면서 이른바 ‘좀비 기업’이 생명을 연장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이들 좀비 기업에 투자금이 몰리는 문제적 상황까지 발생하게 됐다. 부실기업에 대한 담대한 투자가 만연하고 빚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건 문제가 생겨도 정부가 구제 금융에 나설 것이란 ‘굳건한’ 믿음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를 지탱한다는 명분 속 정부가 시장에 막대한 유동성을 쏟아붓고 있지만 곳곳에서 누수 현상이 생기는 한편, 자본 오배분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생산력 향상을 위한 투자로 이어져야 할 자본이 금융 시장의 몸집만을 부풀리고, 혁신과 성장을 가져올 창조적 파괴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더 커진 정부가 더 많은 빚을 내가며 시장에 돈을 공급함에도 생산성은 떨어지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끊임없는 부양책으로 자본주의는 역동성을 잃고 잠재력이 약해졌다.” 저성장 고착화의 위기에 직면해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적자 재정과 완화적 통화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 한국의 상황에서 저자의 이 말은 더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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