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횡재할 수 있었지만"…'고종 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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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일본 공사가 제게 와서는 미국 방문을 포기하면 매우 유혹적인 전망을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저의 여행 목적을 예측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종의 밀사’ 고(故)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1906년 11월 8일 윌리엄 그리피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일본의 회유 시도다. 헐버트가 1905년 10월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런 헐버트의 미국행을 일본이 막으려 한 것이다.
헐버트는 편지에서 “제가 현실에 안주하고 일본인들에 대해 좋게 이야기했다면 저는 큰 횡재를 얻는 혜택을 받았을 것”이라며 “이것은 제가 정의라고 믿는 대의명분을 따라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는 차원에서 일생일대의 만족이 될 것”이라고 썼다.

1906년 11월 8일 헐버트 선교사가 그리피스 교수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 헐버트는 "일본 공사가 미국 방문을 포기하라 했지만 거절했다"는 내용을 편지에 담았다. 사진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제공
헐버트는 이 편지에서 한국의 독립을 예견하기도 했다. 그는 “저는 일본이 강제적으로 한국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넘겨주게 될 때가 올 것을 자신있게 고대합니다. 일본은 결코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 강제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전망했다.
헐버트는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편지와 강연 등을 통해 국제 사회에 한국의 입장을 호소했다. 헐버트는 1949년 7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86세의 나이로 방한해 한국 땅에서 숨을 거뒀다. “미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위치한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묘역.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전율 기자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이하 연구소)는 헐버트 등 내한 선교사들이 1880년부터 1942년까지 쓴 편지 8000여 편의 번역을 완료했다고 5일 밝혔다. 연구소는 2015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을 받아 개항 이후 입국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연구진은 6개국에 흩어진 200여 컬렉션을 찾아다니면서 편지를 확보했다고 한다. 연구소는 최근 20권 분량의『내한 선교사 편지 번역총서』발간도 마쳤다.
연구를 이끈 허경진 연세대 전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내한 선교사 편지에는 정치, 외교, 경제, 교육, 의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한국에 근대 문화가 스며든 과정이 녹아있다”며 “기독교 복음 전도를 넘어 한국학 차원의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1949년 7월 1일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헤롤드 고다드 러그 총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원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한국으로 떠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편지상의 '1929'는 헐버트의 오기로 추정. 사진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제공
편지에는 한국인을 도우려는 내한 선교사들의 분투가 생생히 담겨 있다. ‘한센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 포사이드 선교사는 1909년 4월 동료 선교사 오웬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광주광역시로 떠났다. 여정에서 한센병으로 고통받던 한 여인을 발견한 포사이드는 자신의 겉옷을 입히고 말에 태워 보살폈다.
이를 계기로 한센병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포사이드는 1910년 6월 7일 자신의 후원자 알렉산더 박사에게 “한센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 이들은 집이 없고, 나라를 떠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정성껏 치료하면 일부는 놀라운 회복을 보이기도 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내 도움을 호소했다.
연구소는 ‘선교사 편지 디지털 아카이브’도 내년 8월 공개할 예정이다. 허경진 교수는 “한국인과 애환을 함께한 선교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편지를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아카이브 작업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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