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무명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수퍼 스타로 만든 제수씨[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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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빈센트를 위해
한스 라위턴 지음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반 고흐 미술관 연구원이 쓴 요 반 고흐 봉어르 전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항상 긴 입장 줄이 늘어서 있다. 사람을 덜 오게 하는 게 이 미술관의 목표일 정도. 미술관은 최근 “관객 경험 개선을 위해 연간 관객을 2017년 최고치 225만명에서 40만명 줄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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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을 딴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려 보낸 '아몬드꽃'. 조카 빈센트의 기증으로 현재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아트북스

생전에 그림 한 점밖에 못 팔았던 빈센트 반 고흐의 인기가 이 정도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다. 반 고흐 미술관 수석 연구원인 한스 라위턴이 10여 년의 연구 끝에 쓴 이 책은 오늘의 반 고흐를 만든 숨은 조력자 요 반 고흐 봉어르(1862~1925)의 삶을 추적한 전기다. 일기ㆍ회계장부ㆍ서신을 통해 요가 반 고흐의 예술적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세상에 알렸는지 입체적으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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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의 요 반 고흐 봉어르와 아들 빈센트 반 고흐. 파리에서의 찬란한 생활이 21개월로 끝날 줄 그때는 몰랐다. 사진 아트북스

요는 반 고흐의 제수다. 암스테르담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영어 교사로 27살에 테오 반 고흐와 결혼해 파리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테오는 27살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겠다고 나선 맏형 반 고흐를 유일하게 믿어준 혈육이다. 형의 생계까지 책임지며 꾸준히 후원한 덕분에 반 고흐는 전업 화가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요의 결혼은 바로 이 탯줄보다도 질긴 형제 관계에 들어가는 거였다. 1888년 말 파리에서 두 사람이 약혼을 알릴 때 아를의 반 고흐는 룸메이트 폴 고갱과의 다툼 끝에 귀를 자르고 있었다. 1년여 뒤 반 고흐는 37세로 권총 자살한다. 반년 만에 테오도 세상을 떠났다. 요에게는 삼촌의 이름을 물려받은 14개월 아들 빈센트, 형제가 나눈 수백 통의 편지, 그리고 수백 점의 반 고흐 그림이 남았다. 파리의 화상 테오조차도 팔지 못했던 애물단지들이었다.

요는 딱 21개월 함께 살고 죽은 남편과 그보다 반년 먼저 숨진 시숙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뷔쉼에 하숙집을 차렸다. 아들 빈센트와 시숙 빈센트, 두 빈센트를 위한 삶이 시작됐다.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진 이곳이 ‘반 고흐 메이킹’의 전진기지였다. 벽난로 위에 건 ‘감자 먹는 사람들’을 비롯해 집 전체가 반 고흐 작품으로 가득했다.

요는 낮에는 하숙집을 운영하고, 밤에는 반 고흐와 테오의 편지를 필사하고 번역했다. 그녀는 영어ㆍ프랑스어ㆍ독일어에 능통한 지성인이었고, 일찌감치 이 편지의 가치를 알았다. 시큰둥해 하는 평론가들에게 편지를 보여주며 반 고흐에 대해 쓰도록 독려했고, 팔지 않는 중요작을 적절히 섞어 전시하며 그림값을 올릴 줄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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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1924년 요에게서 1304파운드에 구입한 해바라기(1888). 사진 아트북스

요가 평생 끈질기게 매달렸던 일은 서간집의 영어판 출간.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간청에 죽기 한 해 전인 1924년 아끼던 ‘해바라기’를 판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반 고흐의 유화는 어느 미술관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가가 됐다. 내셔널 갤러리는 지난해 개관 200주년을 맞아 이 ‘해바라기’를 중심으로 반 고흐 특별전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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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요가 재혼한 화가 요한 코헌 호스할크, (재혼으로 이름이 바뀐) 요 코헌 호스할크 봉어르, 테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빈센트 반 고흐가 암스테르담 코닝이네베흐 77번지 집 거실에 앉아 있다. 1910년말~1911년 초 촬영. 사진 아트북스

먼저 간 남편의 무덤을 형의 묘 곁으로 이장해 주기도 했다. 형제의 무덤은 오늘날 반 고흐 팬들의 순례지가 됐다. 요의 헌신은 궁극적으로 테오가 형에게 헌신한 시간을 명예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남성 위주의 미술계에서 쉽게 무시됐지만 끈질기게 반 고흐를 알리고, 전시하고, 가치 있는 곳에 요령껏 판매했다. 그렇다고 요의 삶이 반 고흐로만 채워진 건 아니었다. 소설 번역과 평론으로 이름을 알렸고,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며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 향상에 앞장섰다.

요가 세상을 뜨고 한참 뒤인 1949년 아들 빈센트는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을 설립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빈센트가 시립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했던 재단 컬렉션을 구매해 네덜란드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했다. 이후 1973년 반 고흐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렇게 반 고흐 집안의 작품을 세계인이 누릴 수 있게 됐다.

전시기획자, 딜러, 출판인이자 새로운 여성운동에 참여한 신여성 요를 조명한 저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완전히 남성 지배적인 세상에서 자신의 세상을 가질 수 있었던 여성이다." 책은 2019년 네덜란드에서 출간된 후 이듬해 네덜란드 전기상, 리브리스 역사상 등을 휩쓸었다. 2022년 나온 영어판 제목은 ‘요 반 고흐 봉어르: 빈센트의 명성을 만든 여성’. 진작 나왔어야 했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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