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사람보다 소가 많은 마을에 청년들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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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마을’이 성공하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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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는 전라남북도 통틀어 인구가 가장 적은 지자체다. 인구 2만 명에 소가 3만 마리. 사람보다 소가 많은 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곳에 2020년 젊은 부부가 이주했다. 부부의 눈에 띈 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장수의 특수한 지형. 주민들에게 산은 지역의 발전을 막는 걸림돌이었지만, 트레일러닝(산악마라톤)을 즐기는 부부에게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부부는 직접 달리기 코스를 개발했고, 트레일러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회를 열었다. 일본 등 해외에서 단체로 참가 신청을 할 정도로 빠르게 소문이 났다. 지역소멸 위기 속에 활력을 잃어가던 장수에 지난해 4000명의 외지인이 다녀갔다.

정부의 균형발전, 지역소멸 대응 정책에도 꿈쩍하지 않던 지역들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2018년부터 전국 곳곳에 조성해 온 51개 ‘청년마을’이 변화의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청년마을 사업은 ‘청년이 즐거운 곳에 청년이 모인다’는 명확한 비전을 내세운다. 청년이 지역에 살면서 관계와 비즈니스를 만들고, 또 다른 청년들을 불러들이는 방식이다. 선정된 청년마을에는 2억원씩 3년간 총 6억원을 지원한다. 전문가·학계·현장 의견을 바탕으로 청년마을이 지역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을 정리했다.

첫 번째 조건: 지역 자원의 창의적 재해석

75%가 산지로 이뤄진 장수에는 산악마라톤을 테마로 한 청년마을 ‘트레일 빌리지’가 있다. 김영록 락앤런 대표와 아내 박하영 디렉터가 장수의 험준한 지형에서 산악마라톤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시작됐고, 지금은 전 세계 러너들이 찾는 트레일레이스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보은에는 모터사이클과 자전거 라이딩을 테마로 하는 청년마을 ‘라이더타운회인ㅎㅇ’이 조성됐다. 김한솔 공동대표는 “마을 근처에 있는 피반령은 충청권 라이더들에게 유명한 라이딩 코스”라며 “피반령을 내려온 라이더들이 반드시 회인을 지나치게 된다는 점에 착안해 라이더타운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문 닫은 어린이집을 리모델링해 모터사이클과 자전거 수리가 가능한 라이더들의 아지트 ‘라이더유치원’을 만들고 라이더들을 위한 카페도 열었다. 라이딩에 관심 있는 청년들을 모아 지역살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휠러스 페스티벌’이라는 모빌리티 축제도 개최했다. 인구 1600명의 작은 마을이 연간 수만 명이 다녀가는 ‘라이더 천국’으로 탈바꿈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마을이 지속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지역 자원의 창의적 재해석’을 꼽았다. 청년마을 멘토단장인 전충훈 마르텔로 대표는 “단순히 지역에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면서 “남들이 외면하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새롭게 그려내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조건: 관계를 만드는 기술

지역에서 청년들이 섬처럼 홀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역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와썹타운’은 빈집을 리모델링해 촌캉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강원도 홍천의 청년마을이다. 와썹타운을 운영하는 김성훈 업타운 대표는 “2021년 홍천에 정착한 이후 마을의 진정한 일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했다. ‘노인과 바다’라는 이름으로 일년에 두번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바다로 놀러가고 면민체육대회, 어버이날, 설추석 등 모든 특별한 날을 주민들과 함께한다. 김 대표는 “지역에 정착한다는 건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이곳의 문화, 전통, 모든 것에 녹아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래야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청년마을의 활동과 사업을 지역 주민들에게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김한솔 대표는 “오토바이 소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주민들도 있었기에 라이딩이라는 주제로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하려고 하는지, 지역에서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지를 주민들에게 끊임없이 설명했다”고 했다.

청년마을 자문위원단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선철 감자꽃스튜디오 대표는 “지역에서는 비즈니스보다 훨씬 중요한 게 주민과의 관계”라고 말했다. 그는 “우주선을 띄우는 최첨단 기술도, 애플의 비즈니스 전략도 지역에서는 무용지물”이라며 “지역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고 공동체 안에 녹아드는 소통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 번째 조건: 지속가능성을 설계하는 행정조직

청년마을은 ▶청년조직 ▶행정조직 ▶중간지원조직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다. 기획자이자 실행자로서 주체적으로 사업을 이끄는 청년조직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청년마을의 장기적 방향을 설정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행정조직의 역할도 중요하다.

황종규 동양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도 행정의 역할을 강조했다. 황 교수는 “청년마을 사업은 다른 삶을 꿈꾸며 지역으로 들어간 청년들을 응원하는 ‘마중물’ 같은 사업”이라며 “청년마을 사업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중앙정부(행안부)의 마중물 사업이 끝난 뒤 지방소멸의 당사자인 지방정부(지자체)가 이어받아 지원하는 명확한 거버넌스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는 청년마을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기업·대학·공공기관과의 협력사업을 발굴하고, 타부처 정책을 청년마을에 연계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사업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한국표준협회를 중간지원조직으로 선정해 보다 체계적인 관리·지원체계를 구축했다.

최이호 행정안전부 지역청년정책과장은 “청년마을 사업의 목표는 청년이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드는 것”이라며 “청년마을 운영단체를 지역 기반의 건강한 청년단체로 육성하고 이들이 지역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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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조건: 외부와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

지역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앵커(anchor)’가 필요하다. 지역을 처음 접하는 외지인을 환대하고 필요한 정보도 제공하는 거점을 뜻한다. 전국에 있는 51개 청년마을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청년마을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지역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회성 방문을 넘어 지속적으로 지역을 찾는 ‘관계인구’로 성장할 수 있다.

2021년 청년마을 사업에 선정된 충남 공주의 ‘자유도’가 대표적이다. 공주 원도심인 중학동에 있는 1960년대 도시 한옥을 마을호텔로 리모델링해 지역의 일상을 체험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지역을 더 깊게 만나고 싶은 청년, 잠시 머물며 로컬의 삶을 경험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마을호텔에 숙박하며 인사이트 트립, 워크스테이, 로컬디자인 등 단계별 체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서울이나 부산이 아닌 지역의 소도시를 탐방하는 최근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최이호 행정안전부 지역청년정책과장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 도쿄, 오사카 같은 대도시뿐 아니라 슬램덩크의 배경지인 가고시마나 오키나와의 외딴섬까지 찾아가는 것처럼, 한국을 찾는 외국인 역시 서울 너머 ‘진짜 한국’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면서 “청년마을이 ‘K-로컬’을 이끄는 작지만 강한 거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섯 번째 조건: 일과 삶의 통합

청년마을의 본질은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삶의 지속가능성에 있다. 전충훈 대표는 “도시에서는 일과 삶이 분리될 수 있지만, 지역에서는 일과 삶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면서 “비즈니스를 하든 활동을 하든 결국은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지역으로 간 청년들도 단발적인 프로젝트를 지양하고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김영록 대표는 “장수는 아내의 고향이었지만, 이제는 나의 고향이자 얼마 전 태어난 우리 아이의 고향이 됐다”면서 “함께 재미있게 달리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보은의 청년들은 라이딩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이들을 모아서 축제를 열고, 축제에서 만난 방문객을 다시 관계인구로 확장하는 사이클을 만들고 있다. 김한솔 대표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건 결과가 금방 나오는데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면서 “3년쯤 하니 조금씩 결과가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종규 교수는 “주류의 삶 대신 지역을 택한 청년들을 지원하는 일은 지역을 살리는 일종의 공공투자”라며 “지역에서 살아가며 변화를 만드는 청년들의 이야기에 새 정부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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