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조선의 미를 일본의 자랑으로" 400년째 흙 빚는 조선도공 후예 [한·일 수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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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이 거쳐온 60년은 파란과 곡절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반일’과 ‘혐한’을 넘어 이제는 양국 국민 교류 ‘1200만 명 시대’라는 반전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 놀라운 서사의 싹을 틔운 이들은 다름 아닌 한·일 양국 국민이었다. 갈등과 반목을 넘어선 양국 국민의 ‘인연(絆)’을 통해 한·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선조들이 지향한 사쓰마야키(薩摩燒·사쓰마 도자기)의 미(美)를 추구해 반드시 일본의 자랑으로 인정받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의미입니다.”

427년 전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의 도공 심당길의 후예, 일본 도자기의 명가 심수관(沈壽官·65·일본명 오사코 가즈테루) 15대손의 이야기는 묵직했다. 지난 6일 가고시마(鹿児島)에서 만난 그는 ‘나는 누구인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4시간여에 걸쳐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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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일본 가고시마현 미야마에 있는 심수관요.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의 도공 심당길의 15대손 심수관이 이곳에서 대를 이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쓰마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15대 심수관이라는 습명 문패가 달려있는 대문 안쪽으로 나란히 걸려있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눈에 들어온다. 김현예 특파원

‘오는 날이 오늘이라/매일 또한 오늘이라/날이 저물면 해는 또 뜬다/오늘은 오늘/언제나 세상은 마찬가지’
매년 8월이면 바다 건너 고향을 오매불망 그리워한 도공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는 일본 가고시마의 미야마(美山). 공항에서 버스로 한 시간. 또다시 기차를 타고 내린 뒤, 신의 강(神之川)을 건너 차로 달리길 10여분. 녹음으로 에워싸인 조용한 마을 입구에 낯익은 문패를 단 대문이 보인다. 심수관요(窯)다.

대문 안으로 한걸음 걸어 들어가려는데, 바람결에 펄럭이는 국기 두 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태극기와 일장기. 국기 사이엔 아담한 돌하르방이 정겹게 서 있다. 앞마당에 들어서자 15대 심수관이 반긴다. 대문 앞 국기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환히 웃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국 국기부터 거는데, 한 30년은 됐어요. 재팬 보이콧(노노재팬 운동) 때도 빠짐없이 걸었어요. 비가 오는 날엔 내려요. 소중한 국기가 비에 젖게 둘 순 없잖아요.” 그가 불쑥 휴대폰을 꺼낸다. “바람이 불면 태극기와 일장기가 같은 방향으로 휘날려요. 그걸 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집니다.” 같은 방향으로 휘날리는 두 나라의 국기.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이 모습을 일부러 촬영한다. 심수관요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어 묵직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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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가고시마현 미야마에서 만난 15대 심수관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두 나라 국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바람이 불면 같은 방향으로 휘날리는 태극기와 일장기를 보면 기쁘다고 했다. 김현예 특파원

올해가 한일 수교 60주년인데.

60년 전 부친(14대 심수관)이 한·일국교정상화가 되면서 고향인 남원, 청송(그는 청송 심씨다)에 갔어요. 당시 서울대에서 강연도 있었고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60년 전 그때는 매우 의미 있는 해였어요. 지난 60년 새 한국과 일본은 모든 분야에서 관계가 깊어진 것 같아요.

이야기는 2019년 작고한 14대 심수관 이야기로 흘렀다. 그는 한·일 수교 후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서울대 강연을 하게 됐는데, 당시 학생들은 일제 강점기를 들며 한·일 국교정상화에 거센 반대를 하는 상황이었다. 연단에 선 그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선 미래로 나갈 수 없는 것 아닌가.” 청중은 일순 조용해졌고, 당시 누군가가 일어나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를 부르자 모두 일어나 노래를 따라 했다. 그를 초청했던 교수와 학생들은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건 새롭게 앞으로 나가자, 미래로 나가자는 것이었어요. 내일부터 우리들의 새로운 힘으로 바꾸자. 그걸 전하고 싶었던 거죠.”

돌연 그가 질문을 던진다. “일본인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한국인의 정의는 뭐고요.” 이야기가 이어졌다.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조센진(조선인)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어요. 그럼 저를 재일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나요. 뉴커머(1980년대 일본에 온 한국인을 칭함)나, 올드커머라는 말로는 어렵잖아요. 일본에 온 지 400년이 넘었는데, 그럼 저는 클래식 커머(classic commer)겠네요.(웃음) 저는 누구일까요. 이탈리아에 유학 갔을 때 제 신분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빨간 여권(일본 여권)이었어요.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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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일본 가고시마현 미야마에 있는 심수관요 뒤뜰. 공방 옆으로 난 계단 앞. 돌하르방 뒤로 조각나버린 심수관 작품이 흩어져있다. 김현예 특파원

일본 이름 오사코 가즈테루(大迫一輝), 한국명 심일휘 사이에서 그가 스스로 던진 질문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어느 날 일본을 찾은 한국인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피는 한국인의 피지 않나.” 질문은 ‘민족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로 꼬리를 이었다. 답을 준 건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遠太郞)였다. 시바는 그의 부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고향을 어찌 잊으리오』(1964년)를 출간해 일본 사회에 심수관을 널리 알린 인물이다. 옹기 공장서 일하던 그의 편지에 시바는 이렇게 답했다. “민족은 피나 종족이 아니라 문화의 공유체다.” 속사포처럼 심수관의 설명이 이어진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민족이라고 한다면 눈 색깔, 피부색은 관계없는 겁니다. 한국인 5명 중 1명이 일본에 온다고 하는데, 싫어하는 나라에 갈까요? 일본인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인과 일본인은 많은 공통점이 있어요. 감정도 그래요. 일본인이 눈물을 흘리면 한국인도 눈물을 흘립니다.

청송 종갓집 어르신과의 일화를 꺼냈다. 그가 “일본인이 됐다”고 하자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어르신이 답했다. “어, 그래도 자네는 청송 심씨일세.”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럼 아이들이 미국 가서 결혼해 피부색이 다른 아이를 낳으면 어찌 됩니까?” 그러자 어르신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청송 심씨일세.” 그는 “그때 통이 정말 크다. 이 대단함은 뭘까, 한국에선 일족(一族)이 국경을 넘는구나.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고 당시 일을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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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심수관이 지난 2005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물레를 돌리고 있다. 중앙포토

최근 한일 젊은이들의 교류가 정말 활발한데.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에겐 문화라는 측면에서 양국의 허들이 사라지고 있잖아요. 앞으로는 더 자연스러운 형태로 융합해나가지 않을까요.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드라마, K팝을 좋아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것을 만든 한국의 풍토, 말하자면 역사와 배경에 대해 스스로의 생각이 생겨난다면 이해가 깊어질 겁니다. 한국 청년들도 마찬가지고요. 1 더하기 1은 2가 아니잖아요. 3도 되고, 4도 되는 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어요.

한국이란 뿌리는 어떤 의미를 갖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것은 우리는 427년 전, 전쟁이라는 불행한 일을 계기로 일본에 왔지만 청송 심씨라는 성을 지켜온 겁니다. 조선으로부터의 기술을 15대에 걸쳐 이어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비행기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선명히 보이잖아요? 그런데 해변에서 보면 바다와 육지의 구분이 쉽지 않아요. 방금까진 바다였는데 물이 빠져서 육지로 보이기도 하고요. 한국과 일본이란 육지에 접한 물가에 있는 사람들, 자이니치(在日·재일동포)의 존재는 커요. 이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의 사이를 부드럽게 해주는 완충재가 되기도 하고 접착제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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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도에 달하는 불꽃이 일어나는 심수관의 가마. 그는 이곳을 '미지의 세계'라고 칭했다. 온도를 쉽게 조절할 수 있는 전기나 가스식 가마와는 달리 옛방식 그대로 불을 피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마 앞에서 15대 심수관이 활짝 웃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그가 최근 일 하나를 꺼냈다. 수학 여행차 심수관요를 방문한 도쿄의 고등학생들 얘기였다. 학생들은 나가사키를 들러 원폭 피해 이야기를 듣고, 미나마타에 가서 공해병인 미나마타 문제를 공부하고 온 참이었다. 그가 물었다.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 지원 법률을 정한 게 언제인 줄 아나?”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원폭 피해 50년만인 1995년부터 시행됐어요. 미군의 폭탄에 사망한 일본인을 위한 법이 50년 뒤에나 만들어진 겁니다. 그럼 그때 나가사키에서 목숨을 잃은, 당시 나가사키에 살던 조선인은, 대만인은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묵묵히 듣고 있는 학생들에게 그가 또 말했다. “그래서 그들의 위령비가 어디 있는지는 아십니까? 그들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는요?”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을까. “이런 것들은 일본에 많이 있어요. 예컨대 아시오동산(足尾銅山·많은 조선인 희생자가 나온 도치기현의 구리 광산)도 그렇고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할지 모두가 지혜를 짜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역사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과거를 모두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들여다본다면 몰랐던 것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매우 중요해요. 미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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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고시마현 미야마에 있는 심수관요. 대문 안쪽으로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내걸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무거운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휴대폰에서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똘망한 눈을 가진 손주다. 손주 사진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는 영락없는 할아버지 모습이다. 그의 뒤를 이어 16대 심수관으로, 이름을 습명(襲名·선대 이름을 계승)할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의 일이란 자식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해요. 16대는 많이 힘들 거에요. 지금은 저의 시대, 저의 동료, 저의 손님들의 시대니까요. 이들은 저와 함께 늙어가는 거고, 아들은 아들의 세계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저는 일본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통 도예 일을 하고 싶어요. 가고시마에 이런 도자기가 있다. 일본인들이 이것을 자신들의 긍지로 여기는 때가 비로소 제가 한국에 은혜를 갚는 날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제겐 멀리 있는 고향에 대한 은혜 갚는 길입니다.

이야기는 그의 선조인 심당길의 시대로 올라갔다. 가고시마에 온 조선의 도공들은 고향서 쓰던 원료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흙을 찾을 순 없었다. 17년 만에 이들이 물레 위에 올린 것은 그간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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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심수관의 작품. 출처 심수관요 홈페이지

“선조들은 개척자였어요. 가고시마의 사쓰마 도자기는 큰 의미에서 유전자(DNA)는 조선, 백자일 수 있겠지만, 그들이 마주한 소재는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그렇게 초대, 2대, 3대로 쌓아온 것이지요. 사쓰마 도자기가 지향해온 미를 우직하게 추구해 갈 겁니다. ‘돌아가는 물레의 움직이지 않는 심’ 이야기를 부친이 종종 말씀하셨는데, 물레는 돌지만 가장 가운데 있는 심은 움직이지 않잖아요.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심지를 찾아갈 겁니다.”

마지막 그의 말이다. “수백 년 이어온 것들에 우리의 뿌리가 있어요. 만나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들, 할머니들이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걸 느낄 때가 있고요. 선조들이 보기에 부끄럽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인에게도, 일본인에게도 자랑스럽게 여겨지길 바라요. 이것이 제가 한국에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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