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한때 친미국가 이란이 미국의 '원수'되기까지…이란 핵개발 뒤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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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앙숙이 되기 전만 해도 친미국가였던 이란. 이란의 핵 개발 역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1950년대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시작된 미국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계획'에 따라 57년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지원을 받은 게 계기였다. 팔레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을 미국 등과 추진했다. 팔레비 일가가 수집한 앤디 워홀, 잭슨 폴록 등 미국 작가 작품들이 이란 현대미술관에 전시될 정도로 친미 성향이었다.

67년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한 이란은 막대한 석유 수익을 원자력 분야에 쏟아부었다. 70년대 팔레비 국왕은 이란원자력기구를 설립하고 2000년까지 원전 23개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했다. 미래의 자원 고갈에 대비해 원자력 에너지를 확보하고, 잠재적 핵무기 개발 능력도 갖춘다는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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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왼쪽)이 멕시코에서 팔레비 국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며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중단됐다. 당시 팔레비 왕정을 전복시킨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핵 기술이 비이슬람적"이라면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 이란 미국 대사관이 이란 시위대에 점거되고 미국 외교관이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벌어져 양국 관계는 악화했다. 미국은 결국 80년 이란과 단교했다. 이란은 이 때부터 미국을 자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악마'로 규정했다.

그 뒤 8년간(1980~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을 치르며 이란은 핵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90년대 중국·러시아와 핵 협력을 확대한 이란은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에 성공했다. 2002년 반정부 세력이 나탄즈 우라늄 농축 시설을 폭로하면서 이란 핵 문제는 국제적인 이슈가 됐다.

이후 유럽 3국(영국·프랑스·독일)과 중국·러시아·미국 등 6개국이 이란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 2013년 온건 중도 하산 로하니가 이란 대통령이 된 뒤, 협상은 가닥을 잡았고 2015년 7월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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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1일 이란 테헤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미국 예술가 앤디 워홀이 그린 아메리칸 인디언 운동의 지도자 러셀 민스(오른쪽)의 초상화가 전시된 모습. AP=연합뉴스

JCPOA에 따라 이란은 ▶농축도 상한선 3.67% ▶농축우라늄 비축량 300㎏ 이하 등에 합의했다. 이는 원자력발전소 연료로 사용할 때는 충분하지만 핵무기 제조는 불가능한 수준이다. 나탄즈에 있던 원심분리기도 대폭 감축하고 플루토늄 재처리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대신 서방은 해외에 동결됐던 1000억 달러(약 136조 6000억원) 자산을 이란에 돌려줬다. 원유 수출과 금융거래도 재개했다. 하지만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JCPOA에 언급된 이란의 핵 활동 제한이 시한부이고, 탄도미사일 개발을 제한하는 내용도 없다면서 2018년 합의 탈퇴를 선언하고 제재를 재개했다. 이에 다음 해 이란도 합의 폐기를 선언하고 핵 활동을 가속했다.

핵개발에 박차를 가한 결과, 이란은 현재 핵탄두 9개를 만들 수 있는 60% 농도의 우라늄 408㎏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5월 분석했다. 이란이 핵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인 90% 농축우라늄 233㎏은 3주 만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평가다. 특히 이번에 미국이 타격한 포르도에서는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가 2700대 가동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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